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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May 14. 2023

실직에 대처하는 우리 모두들의 자세 - 10부

10부. 우리 모두 다 미쳐버렸다.

카카오톡과 핸드폰 주소록에 저장된 사람들의 목록을 쭈욱 훑어본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저장된 사람들의 리스트가 대략 천명 남짓이다. 이 중 카카오톡으로 연결된 계정이 5 ~ 600명 수준이니, 약 400명 정도는 10년 넘게 연락이 끊겼단 뜻이다. 즉, 전화해 봐야 연락도 되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으니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대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냥 끝이 보이는 관계이니, 그 끝을 다시 연장하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이제 나머지 600여 명. 카카오톡을 쭈욱 훑어보니, 마침 다 기억이 나는 이름들도 있지만, 막상 프로필 사진을 보니 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선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그렇다. 그 사람들 역시 번호가 바뀌었지만 애써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제 나와의 인연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었지만, 한 명씩 사람들을 지워가다 보니 이제 남는 사람들은 몇 명 없었다. 결국 같이 회사에 다니며 업무를 하던 사람들뿐이니 그 사람들은 이제 날 피하고 싶어 하며 - 애써 말을 걸지 않으려는 사람들뿐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짧은 안부 문자 한 통이지만, 그 들은 내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는다. 나의 기운이 자신들의 회사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은 내가 사준 술을 얻어마시며, 내가 사준 커피를 얻어마시던 사람들이었는데, 막상 내가 힘들게 된 순간 나에게 소주 한 잔 사주겠다 혹은 밥 한 끼 사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메시지조차 없었으니 그들은 나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는 것이 확실했다. 아니, 애써 그들은 나와 연락조차 하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분명 잘 지내고 있고, 자신의 핸드폰 - 연락처를 꾹 바라보며 서로 간에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니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만, 그들의 관계 속에 나는 빠져 있었다.

내가 속한 단톡방도 빠져있었고, 미처 빼지 못한 단톡방은 다들 내가 없는 사람인 셈 치며 여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둘 중 한 명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더라도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과 무응답이었다. 즉, 어떠한 답도, 어떠한 연락도, 어떠한 기대도 사라지게 만드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능했던 선배들을 피해 가며, 마치 잘릴 위기에 처해있는 그 선배들을 경멸의 미소로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그 상황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그래도 누군가의 입에는 안줏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나의 근황에 대해서는 조금씩 넓게 퍼져간다. 그 소문의 첫 시발점은 "내가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선택지 중 분명 어딘가 갈 곳이 있기 때문에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메시지다. 그 메시지 중 일부는 "좋은 곳"을 갔으니 권고사직을 선택했을 것이란 장밋빛 미래를 그려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좋은 곳"에 대해 기대가 사라지고, 나의 선택이 권고사직이 아니라 "대기발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들은 다른 시나리오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나는 회사 내에서 무능력자가 되고, 파렴치한이 되며, 회사에서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뢰한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들에게는 난 회삿돈을 횡령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큰 업무 실책을 저지른 사람으로 둔갑해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느 누군가는 성추행이란 단어를, 어느 누군가는 폭행이란 단어를, 어느 누군가는 절도 혹은 돈을 빌리고 갚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자신들의 상상의 나래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굳이 그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그 이야기에 주인공인 나는 전혀 개입할 수 없었으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채워나가며 그 안에서 벽돌을 하나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벽돌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권고사직을 당했고, 대기 발령을 당했지."


난 분명 누구보다 유능했고, 누구보다 고과를 잘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능력이 뛰어났으니 내가 수행하는 업무가 분명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회사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당연히 그러니까 권고사직을 당하고, 대기 발령을 받은 사람이란 모습으로 그림 그려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채워나가기 힘든 그 그림들 속에서 그들은 나와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으리라. 당연히 나와 손을 내밀고 싶지 않았으리라. 단지, 내가 떠나길 바라고, 빨리 사라지길 바랐을 것이리라. 그래야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애써 나를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자리로 똘똘 뭉쳐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들은 내가 "왕따"여야 했고, 무뢰한이어야 했으며, 파렴치한이어야 했으니 나와 대화를 나눌 필요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축배를 든다. 소주 한잔을 마시며, 안전해진 자신들을 축복한다. 앞으로 우리는 저 사람처럼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당연히 우리는 똘똘 뭉칠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며, 우리들끼리 서로 위하고 - 끈끈하게 행동하다 보면 이 어려운 난관은 분명 벗어날 수 있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회사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길 좋아한다. 그러니, 자신들의 목표는 고작 나 한 명을 포함한 몇 명으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하려 하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집에 보내고, 권고사직을 시키며, 이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어야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달성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은 모습을 그려보며 미친놈처럼 히죽거리기만 할 뿐이다. 최대한 한 명이라도 더 잘라야 회사는 안전해지고, 자신들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테이블의 대상자는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대상자가 되어 모두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젠 더 이상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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