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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임철규 저, 『눈의 역사 눈의 미학』 서평

by 별빛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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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유명 휴양지인 콕스 바자르(Cox’s Bazar)는 세계에서 가장 긴 100마일 해변으로 유명하다. 많은 신혼부부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며, 블로그를 조금만 뒤져 본다면 해변의 아름다움을 남긴 사진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콕스 바자르 도로를 지나는 수많은 UN 난민기구, WHO, UNICEF의 차량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곳은 미얀마 로힝야 난민들의 난민촌으로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100마일 해변도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며, 로힝야 난민촌도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다. 한 지역이 한 편으로는 신혼부부와 관광객들에게 휴양과 희망을 주는 곳으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살 곳을 잃은 로힝야 난민들의 절망의 이미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왜 이 두 곳은 서로 상반된 것일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두 상반된 이미지 중 하나의 이미지만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본다”는 것의 본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임철규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은 본다는 것의 본질에 대해 다양한 방향을 통해 설명을 하고 있다. 눈은 우리의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인간만이 “본다”는 행위를 통해 사유를 한다. 그리고 인간만이 “본다”는 행위를 통해 알아가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한정적이다.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는 시야는 한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눈의 시야는 취사선택에 의해서 볼 수 있는 것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감각 기관인 눈은 안구를 통해 맺힌 빛의 잔상이 남겨진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를 인식하게 된다. 아쉽게도 인간의 눈은 가시광선의 영역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현실의 모든 전부를 시각적 이미지로 남길 수 없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지식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뿐이다.

저자는 태초 신화부터 시작하여 “시각”에 대한 역사를 다방면으로 검토한다. 태양의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눈이 가진 성적인 메타포, 이후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비잔틴의 성상논쟁 등 다양한 역사적 흐름을 통한 “본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설명한다. 결국 인간은 우리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만을 볼뿐이다. 구석기시대 인간은 그동안 바라본 풍요와 다산의 상징을 동굴벽화를 통해 남기고자 했다. 또한 탄생의 신비로운 모습을 비정상적으로 부각된 비너스상을 통하여 남겼다. 그들에게 있어 얼굴보다는 비정상 적으로 부각된 풍만한 가슴과 복부를 통해 풍요로움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자연의 험난함 속에서 다산과 풍요가 지속되길 바라는 기원도 함께 반영된 것이다. 이후 인간의 “본다”는 것의 역사는 사유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중세시대 잠시 동안 기독교의 전통에 따라 “말씀”이 강조되기는 하였으나, 인간은 자신이 바라보고자 하는 것만을 바라보는 것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다시 현재로 돌아가 보자. 세상은 로힝야 난민에 대한 침묵으로 일관한 아웅산 수치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로힝야의 과거는 분명 미얀마 식민 통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영국의 통치 정책에 의한 피해자였고, 미얀마 국민들의 뼛속 깊이 새겨진 로힝야족에 대한 분노는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로힝야 난민의 불쌍함만을 바라보았고, 수치는 미얀마 국민들의 분노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각자는 각자가 보고자 하는 것만 바라볼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규탄을 한 젤렌스키는 러시아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분노하며 국제사회가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연설을 통해 민간인 학살의 증거라며 다양한 사진을 제시한다. 그러나 러시아 및 몇몇 국가에서는 그 이미지조차 조작된 것이며, 러시아에 있는 신 나치주의자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해방전쟁임을 강조한다. 본다는 이미지는 극단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볼 뿐이다.

인간의 시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보았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그리스·로마 시기에는 다양한 이미지를 정형화된 조각상을 통해 남기고자 하였다. 하지만 비잔틴의 시대로 가서 인간의 시각은 극단적으로 변한다. 이 세상의 완벽한 존재인 성상은 이슬람의 공격에서 방어해 줄 수 있는 방패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결과 성벽을 포함한 모든 곳은 성상의 이미지로 채워지게 된다. 신의 완벽한 이미지를 통해 신의 권능을 재현할 수 있으며, 육 화 한 신의 존재는 이미지를 통해 다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하지만, 비잔틴은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이라 믿었던 존재인 성상은 십계명에서 언급한 우상일 뿐이며, 그 우상을 숭배한 결과 신의 단죄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믿음이 더욱 강했던 시기이다.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해 좌우되었고,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신의 권능이며, 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신의 심판인 것이다. 즉, 성상이라는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간은 극복을 한다 원근법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본다”는 것의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본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저 멀리 존재하는 진리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보고 관찰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과학 역시 발달한다. 천문학의 발달을 통해 광학 기술이 발달하게 되고, 먼 곳을 바라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대항해시대를 통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다. 더 이상 별자리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에겐 나침반이 있었고 망원경이 있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은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데아는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과학의 발전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발전하게 된다. 찰나의 순간을 과학적 기술을 통해 기록하게 되어,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였던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이 바라보는 현실은 인간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렌즈라는 광학 기술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사진의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현실주의의 기운이 싹트게 된다. 우리가 바라본 현실에 대한 단면을 해부를 한다는 시각으로 관찰을 하게 된다. 그 결과 Slice of Life라는 현실주의의 기조를 통해 우리의 삶의 단면을 세세하게 바라보고자 하였다. 낭만주의의 감성과 상상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은 런던과 파리의 뒷골목을 경험하면서 그 현실을 글로 남겼다. 수많은 낭만주의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남겼던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버터조차 먹지 못해, 마가린으로 연명하는 런던의 빈민층의 삶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파리 거리의 이면에는 오물이 쌓여있는 뒷거리 속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부랑자의 삶만이 있었을 뿐이다. 결국 역사적 사실은 수많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바라보고자 하는 것만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본다”는 것의 폭력성과 힘에 대해 주목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취사선택이다. 우리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만을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 순간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 시대에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영광스러운 영웅의 모습만을 남기고자 하였으며, 낭만주의 시대에는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남기고자 하였다. 그 모든 것은 당시 주류의 선택에 의한 선택된 시각이었던 것이다.

로힝야 난민에 대한 미얀마 군부의 학살에 대해 세계는 규탄을 하였다. 하지만 그 현실의 내면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미얀마의 식민통치를 위한 로힝야의 이주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침묵한다. 제국주의의 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과 미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악의 축의 공세에 극복한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국의 숭리는 수많은 사진으로 남겼으며, 『라이프지』의 메인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종전과 동시에 프랑스군이 알제리로 넘어가 알제리 독립을 막기 위해 저지란 학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바라보질 않았다. 지금의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그런 국가가 되었다.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은 선택된 순간만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야기와 같이, 현실은 강자의 눈에서 선택된 것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결국 “본다”는 것은 선택의 결과이다. 보는 행위를 통해 인간은 사유하며 존재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위였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본다는 것의 의미를 작품 전반에 담음으로써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의지로 실명을 선택하면서 인간의 눈이 아닌 내면의 눈으로 바라볼 것을 선택한다. 결국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실제의 이상향이 아닌 우리 인간의 눈으로 선택된 결과에 따른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와 같이 인간의 눈은 우리의 눈이 선택한 것을 선별적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최선의 이미지를 간직해야 한다 생각했던 인간은 최고의 이상향인 이데아의 세계와 동일한 신의 완벽함을 그려내고자 한다. 결국 인간이 선택한 것은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신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대립되는 상황 원근법의 발전을 시작으로 한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이미지의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부여해준다. 이제 인간에게 있어서 시선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눈을 통해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사유하고 선택을 하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게 되었으며, 한 사람의 표정에 주목하게 된다. 항상 최선의 이미지가 아닌 아름답지만 슬플 수밖에 없는 이미지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과학의 발전은 이미지의 한 순간마저 선택할 수 있는 결과를 부여하게 된다. 바로 “사진”의 발명 때문이다. 저자는 “본다”의 역사적 흐름의 끝에 사진을 통한 현실의 바라봄을 주목하였으며, 이후 그 현실에 대한 해체를 통해 포스트 모더니즘으로까지의 발전에 대해서 주목한다. 이를 통해 다양한 소재를 통해 “본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에 대해서 주목을 한다. 인간의 시선은 소망과 기원을 위한 시선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삶의 한 단면으로 까지 옮겨져, 궁극적으로는 실제 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에까지 다가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의 발전에 따른 “시선”의 조작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로힝야의 난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학살, 알제리의 프랑스 학살과 같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이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과학의 발전에 따른 결과였다. 사람들은 콕스 바자르의 로힝야 난민촌이 아닌 100마일 해변에 더욱 주목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학살보다는 러시아의 경제 봉쇄에 따른 국제 유류가와 원자재 상승에 더욱 주목한다. 알제리를 학살 및 수탈했던 프랑스는 예술을 사랑하는 고귀함의 도시로 포장되어 있다. 러시아의 부차 학살에 대해 주목하기보다 뉴스에서는 건설자재 특히 시멘트와 알루미늄 단가의 인상으로 수많은 건설사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다루고 있을 뿐이다.

시선은 선택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바라보게 할 수도 있다. 아무 의미 없이 손가락을 향해 방향을 가리킨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왜 가리켰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시선을 이동시킨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 의도적으로 시선을 움직이게 한다. 미디어의 발전과 다양한 매체의 발전을 통해 우리의 시선은 그게 진실인지 조차 모른 상태에서 바라볼 뿐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두 후보의 이미지를 담는 언론의 모습은 극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쏟아내는 모 후보에 대한 이미지는 부인의 부정, 아들의 부정 등 다양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며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포장을 하기 시작헀다. 그러나 상대 후보의 주식 조작 사건과 장모의 비리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특히 이런 극단적인 이미지는 최신 매체라 할 수 있는 유튜브를 통해 카톡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확장이 되기 시작한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우리의 시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화각 자체도 한계가 있어, 모든 것을 다 바라보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바라보는 게 아닐까 한다. 저자는 본다는 것의 의미는 선택이라 했다.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선택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본 것에 대한 관심 역시 우리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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