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섭 작가의 역사 동화 『서찰을 전하는 아이』, 『너의 운명은』
성공하는 역사만이 우리의 역사일 수 없다. 아픔 역시도 우리가 품어야 할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겪은 수많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픔의 역사, 민중의 역사를 주목하는 것은 때론 색다르다 볼 수 있다. 한윤섭 작가의 역사 동화는 우리에게 그런 색다름을 전달해 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 동화의 전형적인 플롯을 생각해보자. 위대한 장군, 위대한 왕의 아름다운 업적을 첫 페이지부터 시작한다. 때론 비범한 탄생이 첫 페이지를 그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는 비범한 인물들에 의해 이룩한 아름다운 것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일까? 하다못해 바보온달의 이야기 역시 비범한 공주의 시집을 통해 용맹스러운 온달 장군의 탄생기를 만들어냈다. 우리 주위의 동화들 속에 선 그저 평범한 사람의 그저 평범한 이야긴 존재하지 않았다.
한윤섭의 『서찰을 전하는 아이』는 그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민초인 보부상의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 석 자도 쓰질 못한다. 단지 할 줄 아는 것은 장돌뱅이 시절 손님을 모으기 위해 배웠던 몇 곡조로 마치 약이 들어있는 듯 마음을 녹이듯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힘이었고 권력이었다. 하다못해 소문을 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자산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조용히 고향에서 지내길 바랬던 아버지의 동료들과는 다르게, 아이는 알지 못하는 서찰을 들고 떠나기로 한다.
배움의 길은 쉽지가 않다. 서찰에 적힌 글자가 어떤 의미를 하는지 조차 모르고,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한 자씩 배워가는 동안 몇 푼의 돈을 내어주며 그 의미를 배워가기 시작한다. 물론 글자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도 함께 배우고, 장사치의 기본 덕목인 흥정이란 기술도 함께 배워가기 시작한다. 한윤섭이 보여주는 아이는 비범한 아이가 아니다. 단지 노래 한 곡조 맛깔나게 부를 줄 아는 아이였으며, 자신이 팔 수 있는 건 두 손과 노래 한 곡조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아이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범한 역사 동화의 주인공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배고픔을 알고, 피곤함을 알며 두려움을 알았던 아이. 배움이 부족하여 자신이 무엇이 부족한지를 너무나 잘 알았던 아이.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차 모르던 아이. 그 아이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 숨 쉬고 있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한윤섭은 본 작품을 통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민중의 역사를 그리고자 하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지만, 종국에 가서는 역사의 한 틀을 이루는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 아이는 녹두장군을 만난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찰의 진정한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바라본다. 역사의 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순간이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순간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몇 년 후 새롭게 쓴 한윤섭의 역사 동화 『너의 운명은』에서는 그 상황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였지만, 정작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무력하기만 하다. 주인공 아이는 극단적으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다. 방에 누워 낮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가 해준 밥을 겨우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지낼 뿐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정작 내 삶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삯바느질로 하루를 연명할 뿐이다. 부엌의 쌀독은 바닥을 보일 뿐이다. 이 아이는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단지 어떻게 하면 굶지 않고,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다.
땅을 잘 써서 그랬다고 한다. 풍수에 맞는 조상의 묘를 잘 써서 안부자 노인이 부자가 되었다 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조차 모르는 아이는 풍수가 길한 땅을 찾고자 했다. 노인에게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해보기도 한다. 단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노인은 글을 알고 배운 뒤 다시 찾아오라 한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돈이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인 모를 산의 잔가지를 모아다 파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주인 모를 나라의 주인은 일제라 그랬지만, 우리가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 모를 산의 잔가지는 어차피 넘쳐나는 것이니 누가 가져가도 그만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 산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나뭇가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김초시는 아이에게 도둑이라 하고, 아이는 단지 글을 배우고 나뭇가지를 모았다고 이야기한다. 김초시는 그런 아이에게 천자문을 알려주고 글을 알려준다. 아이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배고프지 않기 위해, 더 이상 가난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기 위해 배우려는 아이의 뜻을 존중하여 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한다. 아이는 글을 한 자씩 배우며 점점 눈을 떠가기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위의 삶은 어떠한지, 왜 우리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하나씩 배워가며 점점 아이는 눈을 떠가기 시작한다. 아이의 마지막은 마지막 눈을 뜨며, 의병으로 성장한 아이의 모습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아이는 왜 나라를 되찾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는지 모른다.
한윤섭은 두 동화를 통해 우리 주위에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단지 역사의 폭풍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휩쓸리는 것은 아니었다. 첫 시작은 아무것도 모르고, 왜 그래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 그런 아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책의 페이지가 지나면서 본인의 의지로 배움이 쌓이는 순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해가는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동안 동굴 속에 갇혀서 눈앞에 보이는 그림자만이 이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던 아이는 배움을 통해 힘겹게 동굴 밖을 뛰쳐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힘겹게 바라본다. 글자 한 자를 배우기 위해 하루치 생활비를 털 수밖에 없었던 서찰을 전하는 아이나, 천자문 한 페이지를 배우기 위해 추운 겨울날 나무 잔가지를 모아가며 어깨를 짓 누르는 고통을 견뎌나갔던 아이는 역사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단지, 자신이 알고 싶은 것만 알았을 뿐이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만 알면 되었다. 아버지는 보부상으로서 장이 서는 날짜만을 알면 될 뿐이었다. 그 이상의 지식은 필요치 않았다. 글자를 아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질 않았다. 단지 노래를 배운 것은 손님을 끌어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생존을 위해서 배우기만 했던 두 아이는 살기 위해 배우고자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딜 가야 할지 몰라 서찰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아이와 어떠한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명당을 찾기 위해 배움을 간청하였던 두 아이는 본인의 기대를 뛰어넘는 배움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우리의 역사는 비범한 인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 명의 비범한 인물이 돋보일 수 있겠으나, 그 밑을 구성하던 수많은 민초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 한윤섭은 비범한 한 인물에 주목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였던 배고픔을 느끼고, 모름을 알았고, 부족함을 알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울 수 있다. 아이들이 처음 읽게 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위대하고 비범한 위인의 남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흥미가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읽었던 위인전과는 다르게 그 시작은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부모들은 조금만 더 아이의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지켜봐 주었으면 한다.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의 시작이 지나게 되면, 우리의 삶과 같이 작지만 소소하기도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삶은 내 아이의 삶과 같을 것이다. 내 아이가 행했던 행위들은 아직은 모를 수 있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도 우리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