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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Jan 06. 2024

그저 진흙탕을 뒹구는 들개일 뿐이다.

잠시간의 기쁨만 있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다는 기쁨이 있었지만 그 뒤로는 순탄치 않았다. 아니, 나 스스로가 진흙탕으로 뛰어들어갔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눈물 흘리는 거세소처럼, 나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 첫 발단은 처음으로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나처럼 밑바닥에서 더 떨어질 길이 없는 사람을 찾아 헤매었고, 그중 하나가 나라는 것을 알았다. 절박하게 장학금이 필요했고, 빨리 대학을 졸업해야 했으며, 대학 졸업 후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네처럼 똑똑한 학생은 처음 봤네. 한번 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해 볼 생각이 없는가? 진정 참 스승을 찾아 헤맨다면, 나와 같이 하면 좋은 길을 찾게 될 거야."


그리고 달콤한 말로 나를 꼬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충분히 많으며, 내가 실패하더라도 할 수 있는 길은 최악이 "대학교수"이며, 그 이후는 할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조기졸업을 고민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길에 대해서 따로 고민해 보질 않았던 터였기 때문에 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삶이며, 그저 터널의 밝은 빛만을 쫓아 뛰어다녔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목표가 있는 삶을 찾아 걸어가 보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이 있던 차였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입학을 하겠다고 싸인을 한 순간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진작에 조교 한 명이 도망간 터였는데, 단지 그 조교는 새벽 4시에 대리운전을 요청하던 교수의 말에 단 한마디 반항을 하자 파문 아닌 파문을 당한 직후였단 내용은 조교 생활을 한 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나 들은 이야기였다. 

그들은 그저 나처럼 24 ~ 25살의 미래가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전무 제시하며, 그 길을 향해 걷자고 이야길 했다. 하지만, 그 길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입학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다. 수많은 조교들이 나이 40이 넘도록 박사학위 따지 못해 고생을 하고 있었고, 그나마 번호표 뽑아가며 쥐어주는 시간강사 자리 몇 개로 연명할 뿐이었다. 그나마 그 시간강사 자리로 받은 얼마 되지 않은 돈은 교수 사은회, 스승의 날, 명절, 생일 등등 여러 명목으로 착취당하는 돈이었으며, 그들은 다시 후배 대학원생들의 돈을 착취하는 관계로 서로가 서로에게 기생을 할 수밖에 없는 착취 공동체로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잘하는 것은 글 쓰기였다. 그러니 제일 먼저 나에게 주어진 일은 교수가 당연히 해야 하는 논문 쓰기에 대한 초안 드래프트를 잡는 일, 그리고 출판하는 저서에 내용을 수정해 주는 일 등을 잡아주었다. 그러고 나면, 교수는 선심 쓰듯 서문에 "사랑하는 제자 XXXX"라는 이름으로 큰 영광을 돌릴 뿐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수익은 전부 교수의 몫이었다. 그나마도 나는 한참 뒤에 줄을 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고생한 것들도 그 위에 선배들의 몫으로 돌려야 했으니, "사랑하는 제자"라는 타이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교안 준비, 강의 준비, 시험 감독, 시험 채점 등등 모든 일들이 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었다. 난 그 일을 묵묵히 참아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난 스스로 악어의 주둥이러 내 머리를 들이미는 일이 생겼다. 그건 단지 기말고사 시험이라는 한 에피소드에서 시작되었다.

난 의례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그 시험문제를 가지고 시험 당일 강의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시험문제를 전달해 주며,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히 시험문제를 풀라고 이야기했다. 당연히, 시험문제는 쉬운 것이 아니었으나 학생들은 10분도 안되어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고 - 그 이상으로 견디며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조용히 감독을 한 뒤 시험지를 들고 가 채점을 하던 터였다. 

그리고 그때는 별 문제가 없다 생각하고, 점수를 60점 정도 부여를 했던 것 같다. 당연히 100점 만점에 절반 정도 수준으로 답을 했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그 점수에 대한 결과를 안 교수는 나를 불러 다짜고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 학생이 60점을 받으면, 학점은 당연히 C+이상 줄 수 없는데 그렇게 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없잖아. 그 점수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는 교수에게 시험지를 보여주었다. 단답형 중 일부는 답을 적지도 못했으며, 내용이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라 알려주었다. 하지만, 교수는 "그래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면 그 점수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지 않아? 너무 학생들에게 엄격하게 점수를 주는 거 아냐?"라는 이야길 하며 그 학생에게만큼은 좀 더 관대하게 점수를 줄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 학생은 부총장의 딸이었으며, 이미 그 학생의 미래는 결정된 뒤였다. 좋은 성적으로 "수석졸업"이란 타이틀로 학부를 졸업해야 하고, 자연스럽게 석사를 취득한 뒤 해외 유학을 다녀와 대학교수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난 당연히 거절했다. 그 뒤 나의 역할 중 하나인 시험 감독과 채점이라는 일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교수는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유치원 통학, 택배 수령은 약과였다. 종종 해외에서 책이나 DVD를 구입하여 관세를 물어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관세에 대한 대납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당연히 관세 납부 후 돈은 현금이 아닌 교수가 논문을 쓴 후 필요 없어진 책이나, 출판사에서 선물로 준 책들로 관세를 대신에 돌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위치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 제시한 일들은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겹치기 시작하니, 교수는 나에게 연구실을 나오지 말고 일주일 동안 반성물을 쓰라 했다. 집에서 조용히 반성물을 쓰며 고민을 해 보았지만, 내가 왜 반성문을 써야 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난 조심스래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더 이상 대학원을 다니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그날 이후 부재중 통화가 수백 통 울렸지만, 난 그 전화를 전부 무시했다. 군 입대도 미룰 것을 이야기했던 터인지라 제일 먼저 군복무를 생각했다.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길인 장교로서 길을 찾았고, 마침 해병대 장교 모집 기간인지라 아무 고민 없이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교육대에 입소를 하고, 16주간의 긴 시간 동안 장교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임관을 하기 전, 아직 민간인의 신분이었지만, 그들은 군인에 준하는 대우를 해 주었다. 우리 나름대로 우리의 계급은 소위와 준위 사이의 계급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 의미 없을 뿐이었다. 그저 민간인이었으며, 우리는 군인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입소 첫날, 사복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었으며, 3일간의 대기 입소 기간이 종료되자 우리는 강제로 삭발을 했고, 군인으로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얼차려는 기본이었으며, 직각식사와 직각보행, 모포마저도 직각이 되어야 한다 했다.


"참 해병은 말이다, 죽는 그 순간 오와 열을 지키며, 자신의 군복의 각을 세우고 전사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진실이었는지는 모르나, 모든 것들의 순서와 규칙, 각을 중시하는 삶을 살도록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규율과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야 했다. 난 체력이 약했기 때문에 그 모든 훈련을 받는데 겨우 흉내 내는 수준이었으나,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몸에 맞추듯 정확하게 반복하며 모든 과정을 충실히 이수하는 동기들도 있었다. 난 그저, 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 훈련을 받는 존재였으니, 그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나를 향해 "싸이드"라고 불렀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이야기였다.

난 그저 얼차려 시간에 눈을 감으며 내 코끝을 간질이는 따스한 바람이 마음에 들었다. 숲 속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유격 훈련보다 더욱 행복했다. 난 그저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였으니, 훈련은 그저 이수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받았다. 그리고 난 아직 민간인이니 임관 전에는 굳이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다른 동기들과는 다른 모습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체력 약한 자가 해병대 장교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품의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30만 원 정도 돈을 받았으나, 모든 돈은 다시 생활이라는 명목으로 조금씩 차감되었다. 전투복과 정복을 거는 옷걸이 하나에 대해서도 비용이 차감되었고, 손톱깎기를 본 적도 없었는데 그 비용이 차감되었다. 내 손은 16주가 끝나는 기간 동안 손톱 한번 깎지 못하고, 때가 꼬질꼬질 끼어 있었지만 이미 내 통장에 손톱깎기에 대한 돈이 빠져나간 뒤였다. 그리고 오바로크라는 명목으로 돈이 빠져나가고, 전투복과 정복을 다림질해야 하는 명목으로 돈이 빠져나갔다. 나는 왜 옷걸이가 세탁소에서 공짜로 주는 걸 돈 주고 사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 얼차려를 받을 뿐이라 조심스럽게 침묵을 했다.

그 뒤 임관날짜가 다가오자 훈련소로 선배들과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선배는 조심스럽게 소위 임관을 축하한다 이야기하며, 열심히 마이크를 들며 첫 사회생활인 만큼 보험과 자산관리가 중요하단 내용을 연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반 강제적으로 변액 보험을 가입시켰으며, 필요도 없는 보험들을 단체로 가입시킨 뒤 떠났다. 한참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의 신분은 군인이었지만, 곧 전역할 직업보도 교육 상태였으나 군인이란 신분으로 1년간 임관하는 후배들을 대상으로 보험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선배들의 아량에 감사하며 그 기간 동안 자신들의 먹이인 후임들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벌리곤 했다.

나도 그 시절, 훈련소에서는 보험 가입을 하지 않았지만, 자대 배치 후 중대장, 대대장의 강요로 전역을 앞둔 선배를 위해 변액 보험을 가입했다. 월 20만 원씩이었으니, 3년 남짓 600만 원이란 돈이 공중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배 장교들을 향해 밥과 술을 사야 하는 말도 안 되는 관행들. 나름 회삭이라는 자리는 그저 상관에게 맛있는 밥을 사줘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부조리함.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전역 직전까지 "당직"을 서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 등 모든 것들의 부조리함이 내 주위를 꽉 채울 뿐이었다.


"너희들 단기 장교들은 우리 같은 장기 복무 장교들 대신 당직이너 서 주는 놈들이야."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작전장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모습은 그저 작은 일에 불과했다. 마침 내가 발견하게 된 상황은 그저 착취의 관계에 지나지 않던 사병들 간의 관계, 그리고 철없는 단기 부사관들의 어이없는 일탈들을 본 직후였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 속에서 그들은 그저 "동생 같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용서받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터진 그날. 

난 처음으로 그 일을 경험했고, 모든 부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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