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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비평]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 들

(우리가 본다는 것에 대하여)

by 별빛바람

당신 눈앞에 다양한 사진이 놓여 있다. 타이렐사의 최고 걸작품인 넥서스-6 조차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진은 처음이자 마지막의 모든 순간을 담고자 노력한다. 카메라를 든 사진가는 그 사람의 시작을 촬영하고, 마지막을 촬영한다. 사진은 수많은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진 우리의 삶 중 어느 한순간을 포착하여 남기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진을 바라보며 너무나 기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 사진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것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기 때문이다. 사진은 결국 우리의 한 순간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진은 수많은 움직임의 모음 중에서 단 한순간을 포착해서 찍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진이 가진 프레임은 한계가 있어 우리가 속해있는 모든 공간을 전부 담을 수도 없다. 그건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바라보는 사진작가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이 “선택”되었다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대부분 핸드폰의 셔터를 수십 번 눌러가며 내가 맘에 드는 이쁜 이미지를 포착하고, “스노우”라는 어플을 통해 뽀샤시한 이쁜 이미지로 남기고자 하였을 때 그 사진 역시 우리가 선택된 한 순간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이러한 개인의 사진에서 다양한 선택이 있는 와중에, 우리는 더 많은 선택의 순간을 다른 사진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었다.


1.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사진은 너무나 비참했다. 포커스도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명을 듣지 않는다면 직관적으로 어떤 사진인지 떠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4장의 사진은 기록에 남았으며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사진에 대한 본질이었다. 실제로 존더코만도가 아우슈비츠에서 찍은 이 사진은 유명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유태인 학살을 주도한 선택받은 유태인인 존더코만도의 사진이었다는 이유로 부각되지 않았을 수 있고, 이보다 더 비참하고 끔찍한 사진들이 많았기 때문에 선택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사진 1-1. Sonderkommando Photographs no. 280


사진 1-2. Sonderkommando Photographs no. 281


사진 1-3. Sonderkommando Photographs no. 282


사진 1-4. Sonderkommando Photographs no. 283


이 날의 4장의 사진을 통해 유태인 학살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주위에 살던 사람들은 이곳의 학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나치가 철저한 철통보안 속에 학살 캠프를 운영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철통보안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기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으나, 나오는 기차는 늘 빈 차량일 뿐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여 단 하루도 안 되는 마지막 삶을 목욕탕으로 위장된 가스실에 끌려가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존더코만도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소각되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이런 행위가 있는지도 몰랐다.

미국 드라마인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지중대는 유태인 학살 캠프를 발견하였으나, 그 지역 주민들은 그런 곳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시신을 치우라는 이지중대의 지시에 독일인 귀부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구토를 했다. 그들에게 이곳은 있어서는 안 될 곳이며 보이지도 않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존더코만도의 사진은 어느 누구도 보질 못했다.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학살에 선봉에 섰던 존더코만도의 행위 때문일까? 아니면 그 누구보다 유태인들을 괴롭혔던 유태인 작업반장 카포 때문이었을까? 우리들의 기억 속에 유태인들은 똑똑하고 현명한 민족이었으나 나치의 잔혹한 정책 때문에 핍박받은 순수한 민족일 뿐이었다.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각을 다시 한번 돌려보자. 방글라데시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콕스 바자르. 그곳은 백마일 해변으로 유명하다. 저 멀리 펼쳐진 백사장은 신혼부부가 두 손을 잡으며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곳이며,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광경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도로는 우리가 보지 못한 차량, 유엔 난민기구의 차량이 쉴세 없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차량이 왜 지나가는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인터넷 블로그를 들여다보더라도 콕스 바자르는 백마일 해변으로 유명할 뿐, 그곳의 또 다른 시각을 바라보질 않았다. 로힝야 난민캠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조차 잊힌 그날 이후 미얀마의 민족 영웅이었더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치는 전 세계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에 대한 어떠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었고, 학살을 금지한다의 성토의 목소리조차 없었던 아웅산 수치는 부끄러움의 대명사였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지만, 힘없는 소수 약자의 고통에는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세계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로힝야가 누군지 모른다. 미얀마 혹은 버마의 수많은 소수민족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왜 미얀마 군부가 로힝야족을 학살할 수밖에 없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힘없는 소수민족을 학살하는 나쁜 사람들일 뿐이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 “람보 4”에서 람보는 학살당하는 카렌족의 의약품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 선교단체를 구하기 위해 총을 쏴댔다. 하지만 왜 군부는 카렌족을 학살했는지? 그리고 로힝야를 왜 학대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미얀마 군부는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민족들은 정말 힘없는 민족이라 우리의 연민의 대상이어야 했다. 그들의 아프고 힘들 수밖에 없는 진짜 역사는 아직 아무도 보질 못했다.


사진 2. 로힝야 난민캠프(https://www.bbc.com/news/world-asia-56493708)



2. 우리는 제대로 보질 못했다.


그의 이름은 다양했다. 보수 평론가 지만원은 그를 북한 군인 김창식이며 “광수 1호”라 지칭했다. 5.18의 북한군 개입 증거라 주장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발언에 찬사를 보냈으며, 탈북자들까지 가세하여 북한군의 개입을 증언하였다. 광주의 시민들은 어느 순간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나름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한 숨겨진 진실을 밝혀냈다 했다. 그날 이후 우리 국군의 정훈 및 안보교관들은 “광수 1호”외 다양한 사진들을 근거로 하여 북한군 개입의 증거라 핏대를 올렸다. 예비군 훈련 때 우리는 강당에 앉아 졸고 있었다. 하지만 예비역 안보교관은 광수 1호 사진을 빠짐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유라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남침을 1980년대에도 당했단 뜻이 아닌가? 서슬 시퍼런 군부 정권에 오히려 우리나라 안보에는 구멍이 뚫렸단 뜻이었다. 육군 장성 출신이며 정보사 출신인 전두환은 북한군의 움직임을 파악조차 하지 못한 무능한 군인이었다. 당연히 신군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시절 광주의 이름은 또 하나의 권력이라 했다. 한 극우 사이트의 회원은 5.18 항쟁 이후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올리며 “홍어 택배”가 왔다는 조롱도 한다. “광수 1호”를 중심으로 한 북한군의 개입으로 전라도는 조롱의 상징이 되었으며, “전라디언”이라는 용어와 함께 민주화가 아닌 폭동의 한 현장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실제 증거는 없었다. 단지 사진 한 장에 대한 해석뿐이었다.


사진 3. 광수 1호, 혹은 김창식이라 불이었던 평범한 시민(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47004)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진리부는 영사(Ingsoc : 영국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문서와 사진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윈스턴은 자신이 기억하고 보았던 진실이 역사적 진실이었는지 조차 혼란스럽게 된다. 어린 시절 들었던 동요의 구절, 신문 기사조차 진실인지 모른다. 그리고 오세아니아가 유라시아와 싸웠는지 동아시아와 싸웠는지 알 수 있는 기억은 단 한 개도 없다. 단지 만들어진 상황과 해석에 의해 맞추어질 뿐이었다. “광수 1호” 역시 마찬가지의 권위를 얻는다. 단지 눈매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북한군 김창식이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 정부인 남한을 무너뜨리러 온 침략군이었다. 그 이전에 광주 폭동은 교도소의 폭동이 시발점이라 했다. 또 한편으로 광주는 남한 내 자생된 고정간첩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폭동이라 했다. 아니, 광주에선 그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했다. 그러다 다시 한번 광주는 “광수 1호”를 포함한 남침한 북한군에 의한 국지적 도발이 되어 있었다.

중국도 그러했다. 우루무치는 중국 내 한족이 진출하여 최첨단 바이오 공장이 투자되는 혁신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내몽고 지역과 함께 신장 자치구는 중국의 매화사의 바이오 공장이 한 축으로 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최근 들어 중국 내 유일한 이슬람 지역이기 때문에 이문화 체험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위구르인들은 터키 트루크계 민족이기 때문에 서구인들과 동일한 푸른 눈을 가지고 있으며, 코란을 읽는 중국의 문화와는 사뭇 다른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수용소를 바라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위구르인들을 위한 직업 교육기관이라 설명을 하지만 그곳이 위구르인을 학대하는 곳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적어도 중국 내 사람들은 이곳은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다. 마치 천안문 광장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오히려 우리는 천안문 광장의 탱크맨 이란 사진을 통해서 무언가 일어났을 것 같단 추정을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발생하지도 않았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단지 사진이 있으나, 그 사진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진이었다.


사진 4. 천안문 광장의 탱크맨. 이 사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진이다.


3. 우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왜 보질 못했는지 비난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진리부 소속의 외부 당원들이 교묘하게 수정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결 이후 최후의 승자였던 스탈린이 제일 먼저 하였던 일은 트로츠키의 사진을 지우는 일이었다. 당연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었다. 아니 우리는 그 사진을 본 적조차 없었다. 이미 수많은 진리부 소속의 외부 당원들은 모든 것을 바꾸고 재구성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알 수 있도록 수정하였다.

대한민국에도 마찬가지로 진리부가 존재했다. 우리가 보고자 했던 영화들은 가위질로 삭제가 되었으며, 대중가요는 사전 검열로 그 실체는 사라지곤 하였다. 영자신문과 잡지는 이미 한 차례 검열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으며, 조금이라도 정권에 위협이 가해지리라 생각이 들면 삭제가 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대한민국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 갑자기 나타났단 것이다. 그날 광주에서는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다시 한번 광주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여 “광수 1호”를 포함한 북한군에 의해 대한민국의 안보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영국의 진리 역시 신사의 나라로서 기반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행했던 버마 민족에 대한 수탈과 그 수탈에 대한 관심을 소수민족으로 돌리기 위했던 수많은 정책들. 그 정책 때문에 현재도 미얀마의 버마인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태초부터 적대적 관계를 가졌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군부가 태어날 때부터 잔혹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미얀마를 점령한 영국의 정책은 보다 쉽게 통치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다. 그 결과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가 되었다. 발칸의 화약고는 세르비아 인들이 한 축으로 하여 다양한 민족의 설전이 난립할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사진이 처음 발명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과학의 힘과 사진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진은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작가들은 “리얼리즘”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의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사진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것이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진의 뷰파인더는 한 곳만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곳뿐만 아니라 바라볼 수 없는 그곳에는 우리가 의도치 않은 모습들이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을까? 아니 사진을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뷰파인더가 바라보지 않은 곳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진리부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사진은 한순간의 시점을 공간으로 담아두지만, 사진이 담고 있는 화각은 한계가 있었다. 135 판형 기준 우리의 시각과 유사하다 할 수 있는 50mm 표준 렌즈의 화각 기준 전체 시야에서 담을 수 있는 부분은 46도 정도였다. 아니, 기술이 발전해서 줌렌즈가 개발되고, 망원렌즈가 개발되었으니 어느 정도 커버는 할 수 있다고 주장을 했지만 그래 봐야 17mm 렌즈 기준으로 100도 밖에 커버가 되질 않았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공간이 너무나 많았다. 그 의미는 숨길 수 있다는 의미였다. 숨기는 방법은 뷰파인더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사진의 발달과 함께 사진의 편집 기술이 발전하게 된다. 화학약품 조금이면 피사체를 의도적으로 지울 수 있었다. 그렇게 스탈린 옆에 있던 트로츠키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원판 필름의 약간의 수정으로 서구를 갈망하던 일본 제국주의 신봉자들은 자신의 작은 키와 뭉뚝한 코를 완벽한 서구인으로 만들어버렸다. 뤼미에르는 흑백 필름에 채색을 하는 방법으로 컬러로 만들었다. 간단한 기술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기술까지 다양한 기술은 숨기기 위해 태어났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애교에 불과했다. 단지 기술 하나로 사진을 숨기는 것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수준이었다. 아무리 스탈린이 기를 쓰고 트로츠키의 흔적을 없애려 하였어도, 트로츠키는 존재했다. 사람들의 기억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단지 말을 하면 애정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랄 뿐이었다. 우리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텔레스크린으로 차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정한 조작은 따로 있었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아시아와 전쟁을 하는지, 유라시아와 전쟁을 하는지 몰랐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문서부터 시작하여 사진까지 다 수정을 해 버리면 과거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된다.


4.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 들

뷰파인더의 한계로 인해, 혹은 그 한계를 활용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우리는 바라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No. 280~283번의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보다 그 사진을 이야기하기 싫은 사람들은 유태인을 철저한 선의 피해자라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슈피겔만의 “쥐”에서 언급된 카포의 행포는 나치 이상으로 유태인들을 학대하고 수탈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유태인 자신이었음을 이야기한다. 폴란스키 역시 “피아니스트”에서 카포의 행위를 언급한다. 그와 함께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에서는 카포와 함께 존더코만도의 존재까지 언급을 한다. 영화의 제목만 본다면 가스실에서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한 아버지의 분투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실제의 모습은 가스실에서 학살된 유태인의 시체 처리 및 소각을 위한 특별 부대원이 바로 유태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유태인은 신이 선택한 축복받은 민족이며, 이 세상을 움직이는 선의 민족이라고 불릴 뿐이다. 유태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진실이며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하지만 그 현실의 이면을 자세히 언급하기보다는 마치 표준 렌즈의 화각이 전체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회피하는 방법으로 진실의 일부분만 보여주었다.

영국의 이미지는 부정할 수 없는 신사의 나라였다. 유럽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낀 영국의 리더십 속에서, 전 세계대는 공용어로서 영어를 선택했다. 인도와 바꿀 수 없었던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인도인 전체의 가치보다 그가 쓴 36편의 작품의 가치를 더 높게 치며 뱅골의 대기근에 학살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된다. 우리가 듣게 된 목소리는 단지 셰익스피어의 구절들 뿐이며, 영국의 검은색 택시와 붉은색 2층 버스, 템즈강의 낭만만이 우리 눈에 보일 뿐이다. 특히 영국의 흔적, 영국의 정책에 의한 역사적 현실을 만들어낸 과정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은 다수인 버마 민족을 통치하고자 미얀마의 소수 민족을 활용하였다. 특히, 이슬람계 로힝야족은 미얀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이주된 민족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 된 로힝야족의 학살에 대해서는 그 역사적 흐름조차 알지 못했다. 단지 버마의 군부가 비이성적이며, 그들의 본능 깊숙이 숨겨져 있던 악행을 감출 수 없기에 행동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질 못하는 사람들뿐이다. 콕스 바자르의 100마일 해변에서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미얀마의 로힝야족이 영국의 식민 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선택된 민족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없었다.

우리는 시각을 다시 돌려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핍박받는 것을 듣기는 했으나 왜 핍박받는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 자체가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와 정신을 손 봄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는지 조차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존더코만도의 280~283번 사진이 사라짐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에 소이탄을 투하하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도 함께 사라졌다. 2000년도 더 전에 신에게 약속받은 땅에 이주한 이스라엘의 유태인에 대한 역사는 희망의 역사이고 의지의 역사였지만, 2000년도 더 오랜 기간 생활한 팔레스타인의 셈족의 역사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드 넓은 광야에서 역사와 문화를 이룩한 팔레스타인족은 2000년이란 기간을 거주했음에도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땅을 빼앗은 악랄한 민족이 되어 있었다. 로힝야 역시 자신의 2 ~ 3세대에 걸쳐 이룩한 터전이 졸지에 이방인의 이미지로 각인돼 버린 것이다. 물론, 로힝야는 자신의 의지로 이주를 했다. 국제사회의 정치적 메커니즘에서 정치적인 명분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민족은 역사와 현실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어떠한 뷰파인더에도 담기지 않았으며, 역사책 속에도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 현실을 바라보지 못했다. 김 군은 여전히 빨갱이였다. 보수 평론가 지만원의 만행을 우리는 손뼉 치며 기뻐했다. 분명 우리가 듣기론 광주는 폭동이었다. 수많은 보수 논객들이 머리에 핏대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심을 점점 물들게 했다. 극우 사이트인 “일간 베스트”를 통해서 광주의 이미지는 희화화되었고, 그 진정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일베만의 수많은 유행어와 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들은 지만원의 언급 / 과거 조작된 기록을 통해 광주는 분명 폭동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 피와 눈물을 외면하며, 광주의 진실은 단지 빨갱이의 역할이라 이야기했다.

진리부는 단순히 일베만을 통해서 이룩하지는 않았다. 심리학자의 조언을 통해 우리 역사의 진보에 대해서 폄하하기 시작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들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수치라 이야기하며, 단어를 재배치하여 “노 고무통 대현령”이라며 낄낄대기 시작한다. MC 무현이라는 일베만의 밈이 만들어져 조잡한 음악적 감성으로 진보의 역사를 폄하했다. 심지어 음원 사이트에도 이 음악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코알라가 되어 “노알라”라는 이름으로 폄하된다. 물론, 노알라가 된 이유는,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슬람의 “알라”이미지와 같이 결합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웃음의 대상이었다. 그와 함께 광주는 홍어의 천국이라는 이미지로 바뀌게 된다. 빨갱이의 음식으로 홍어가 선택이 되었다는 밈으로 광주의 역사는 왜곡이 된다. 이젠 어떤 것이 진실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워진다. 진정성 있는 조작인지, 아니면 단지 웃음을 위한 것인지? 혹시라도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들은 그냥 장난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이런 문화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속에서 광수 1호는 있어왔다. 아니 수많은 광수들은 광주의 시민이었다. 김밥을 나눠주며, 광주의 현실을 알려주며 열심히 피땀 흘렸던 사람들은 북한군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현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왜? 너희들을 장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5. 그리고 남아있는 것 들

천안문 광장의 탱크맨은 이미 죽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의 언론을 일제히 그 탱크맨은 살아있으며, 중국의 어느 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이야기만 했다. 보여주지 조차 않았다. 그리고 그때 천안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광수 1호는 남아있으나, 광주의 현실에 대해서 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유태인의 비극적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유태인의 폭력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국은 여전히 신사의 나라였고, 로힝야의 비극은 버마 민족이 포함된 미얀마의 역사일 뿐이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단지 그런 것들 뿐이었다.

사진은 여전히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찍었다. 뷰파인더의 화각이 벗어나는 상황에서 사진을 찍고자 하는 노력은 쉽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 하면 언제나 들어오는 대답은 “그래서”였다. 그리고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라는 폭력에 다시 한번 노출이 되었다. 도대체 어떠한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냐 하면, 역시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증거”만을 원할 뿐이었다. 광수 1호의 조잡한 논리와 천안문 광장의 지워진 역사는 그냥 말 한마디에도 권위를 얻었다. 진실의 몸부림을 위한 증거는 역시나 좀 더 객관적이며 자세한 증거를 제시하라는 폭력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선택된 구도는 여전히 힘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사진은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이라는 평면에 가두는 작업을 통해 권위를 얻어갔다. 그 속에서 선별작업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생산해냈다. 색조와 채도의 조화를 통해서 이미지의 진실은 왜곡되어갔다. 단지 빛의 예술일 뿐이라는 이미지 속에서 사진의 이미지는 희석되어간다. 이제는 편집이라는 이름하에 조작이라는 이미지를 희석해갔다. 그리고 선택된 이미지만 남아 간다. 그 이미지의 진실을 읽을 수 있는 맥락조차 사라지게 된다.

사진 자체는 순수했다. 하지만 진리부는 사진의 특징을 너무나 잘 파악했다. 그 속에서 이미지의 조작의 방법은 그리 큰 작업이 아니었다. 채도를 조금만 수정한 것으로, 색감을 조금만 수정한 것으로 사진의 진실은 희석이 되었고,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로 만들어갔다. 우리의 생각을 각인시키는데 필요한 시간은 결코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진은 그렇게 만들어간다. 거기에 권력의 시녀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면 권위를 얻어만 간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단지 이건 가짜라고만 이야기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역시 그들의 전략에 발맞춰 행동할 뿐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우리는 언제나 함께 맞서 싸웠다. 그들의 행위는 단지 사진 한 장을 통해서 다양한 이미지를 생산할 뿐이라면, 우리의 의지는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 열심히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우리의 목소리는 아직은 작다. 그 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뭉치를 확성기 삼아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우리는 여전히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의 몽둥이는 우리를 흠씬 두들겨 패며, 그런 건 존재하지 조차 않았다고 한다. 2+2는 5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빅브라더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이빨은 조금만 힘을 줘도 흔들리며, 우리의 몸은 멍이 들고 배가 튀어나와 흉측할 뿐이다. 하지만 아직은 견딜만하다. 목소리는 아직은 나온다. 목에서 피가 섞인 가래가 튀어나올지언정, 우리는 그 사진을 제대로 보기 위해 울부짖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눈이 부었을지언정 우리는 다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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