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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그 봄날, 따뜻한 빛

by 별빛바람

정부군이 방송국을 점령한 지 3일이 지났다. 어차피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규 방송을 보는데 지쳤던 나는 정부군의 선전 방송에도 관심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이 나라의 주재원으로 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이곳 국민들이 걱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정부군의 선전방송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경청했다. 정부군에 의한 내전이 발생한 지 한 달. 시민군이 졸지에 반란군이 된 지 한 달. 그리고 정부군이 이 나라의 시민을 학살한 지 한 달이 되었다. 아빠는 외국을 방문한 주재원의 신분이었으며, 나와 엄마 그리고 어린 동생은 주재원 가족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안전이 보장되었다.


우리의 가슴에는 외국인이며 한국인임을 상징하는 표식을 붙여놓았다. 정부군에 의한 내전의 움직임은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을 거라 추정이 되는 화교들에게 처음으로 총부리가 겨누어졌고, 화교와 비슷한 우리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역시 집단 린치의 대상이 되었다. 내전이 시작된 첫날 거리를 향해 전단지가 뿌려졌다. 그 전단지에는 “중국인이 우리의 재산을 약탈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중국인 상점과 중국인 약방이 첫 공격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중국 식당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삼겹살과 김치, 그리고 아빠가 자주 마시던 소주를 먹을 수 있던 식당도 공격을 당했다 한다. 나이 80이 다 되신 화교 노부부의 식당이었다. 가끔 엄마와 나는 바쿠테를 먹으러 가곤 하였다. 동생은 오리구이를 좋아했으나 이젠 먹으러 가기 힘들게 되었다. 나와 동생을 보며 무뚝뚝하게 중국어로 말씀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다치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참 혼란스러웠다.


아빠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정부군이 인터넷과 국제 전화를 차단한다고 발표했다. 명목상으로는 국내에 있는 간첩들이 외국으로 자국의 정보를 유출하기 때문이라는데, 아마 민간인 학살 증거가 외국으로 나가지 않길 바라는 거 같아.”


“그럼 이제 외국인들 안전도 보장이 안 되는 건가요?”


그나마 내전 중이라 하더라도 외국인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는데, 정부군의 발표는 외국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어쩌면 조만간 성난 정부군 측 시민들이 우리 집을 향해 달려들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아빠는 10년도 더 전에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고 했다. 그때는 그 나라의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 세계의 경제 대혼란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때도 돈 많은 화교가 대상이었다고 했다. 아빠는 그때 단신으로 부임했었다. 당시 이슬람 근본 세력이 대부분이었던 파수루안에서 중국인들은 공격의 대상이었다. 성난 시민들은 자신들의 가난과 고통이 중국인 때문이라 생각하였는지 낫과 칼을 들고 중국인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때 성난 시민들을 만날 때마다 “Saya orang Korea, bekerja di pabrik besar sini sebagai menejemen!(저기 큰 공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한국 사람이에요.)”이라 소리쳐야 했다고 했다. 그들에게 우리의 피부는 자신들보다 더 하얗기 때문에 눈에 더욱 잘 띄었다 했다.


하지만 내 피부는 까만색이었다. 아니, 우리나라에선 특히 더 까맸다. 친구들은 내 피부를 보며 깜상이라 놀렸다.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나라에 오랫동안 살아서 그랬을까? 하지만, 이곳에서 내 피부는 너무 하얗다고 했다. 나는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를 보는 사람들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먼저 물어볼 뿐, 내가 한국인인지 조차 물어보질 않았다. 이 나라에서 중국인과 일본인은 작은 사업체를 소유한 번듯한 이 나라의 구성원이었다. 한국인은 어딜 가나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런 이방인들 중 그들은 중국인을 먼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우리 같은 한국인은 기업을 대표하여 왔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공격하지 못했다. 아직은 그랬다. 아빠도 우리의 주재원 신분이 언제까지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안전했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발표는 외국인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젠 이곳을 떠나야 했다.


“하진아. 이제 곧 떠나야 할지도 몰라. 대사관과 이야길 해야겠지만, 우린 주재원이기 때문에 전용기를 확보할 수 있을 거야. 아마 빠르면 1주일이고, 더 늦을 수도 있을 거야. 그 기간 동안 안전하게 있어야 해.”


아빠는 달력을 보았다. 엄마는 학기 중에 이 나라를 떠나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많이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의 안전이 우선이라 했다. 우선은 급하게 태국이나 말레이시아로 이동을 해야 했다. 한국으로 바로 가는 건 쉽지 않을 수 있다. 정부군은 이미 공항도 장악했으며, 직항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는 차를 타고 국경까지 이동하기도 하였지만, 방글라데시 근처는 소수민족 반군들과 대치중이다 보니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작년 가족들과 함께 갔던 콕스 바자르의 해변이 생각났다. 그 해 여름휴가 때 아빠는 가족들과 상의 끝에 콕스 바자르로 여행지를 정한다고 이야길 하였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다카까지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방콕을 거쳐 이동하였다. 다카에서 다시 경비행기를 다고 하루를 꼬박 보내가며 도착한 콕스 바자르는 아빠가 설명한 것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저 멀리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 가운데 우리 가족은 맘 편하게 호텔과 해변을 거닐 수만은 없었다. 아빠의 마음은 이미 로힝야 난민촌으로 다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의 가방에 있었던 미러리스 카메라인 라이카의 SL은 아빠와 함께 전 세계를 누볐기 때문에 여기저기 은색 빛의 속살을 보여주곤 하였다. 시그마 24-70 렌즈도 이미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었지만, 아빠는 사진만 잘 찍히면 된다고 했다. 아빠는 지금 순간을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정부군이 로힝야 난민만을 학살하지만 언젠가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총부리를 겨눌 것이라 했다. 아빠의 역할은 이들의 고통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라 했다.


5살 동생 유진이는 너무나 천진난만했다. 동생에게는 아직 정부군과 반군 그리고 저항군의 개념조차 몰랐다. 학살이란 개념도 몰랐다. 동생은 이곳에서 만큼은 얼굴 하얗고 귀여운 인형 같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동생을 볼 때마다 귀엽다고 이야길 했다. 한국의 과자보다 이곳의 과자를 제일 처음 먹었다. 추운 겨울의 눈싸움에 대한 추억보다 한 여름뿐인 이곳에서 건기와 우기만을 경험한 동생이었다. 한국에 대한 추억보다 이곳의 추억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동생은 우리나라 경찰의 늠름한 모습보다, 우리나라 군인의 멋진 모습보다 땟구정물이 찌든 정복에 누런 이를 드러내는 정부군의 모습이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역시 동생은 콕스 바자르의 해변에 있는 모래사장만 기억하였다.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이는 유엔 난민기구의 차량과 누더기를 걸치며 진흙을 비져 간신히 살 곳을 마련하던 로힝야 난민들의 기억보다는 로힝야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뛰어놀던 것만 생각날 뿐이었다. 아직 동생은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다.


구석에 앉은 동생은 아이패드를 만지작 거리며 넷플릭스를 눌렀다. 분명 동생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진아. 지금은 인터넷이 안 돼서 볼 수 있는 건 옥토넛 밖에 없어. 옥토넛이라도 볼래?”


“옥토넛은 아까도 봤잖아. 아빠 나 다른 거 보고 싶어. 전에는 인터넷 되었잖아. 나 그럼 유튜브 보면 안 돼?”


동생이 눈물을 흘리며 때를 쓰기 시작했다. 동생은 아직 인터넷이 끊겼다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동생은 아이패드만 누르면 좋아하던 뽀로로와 옥토넛을 보던 시대에 태어났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원한다고 볼 수 있지 않았다. 아빠도 간신히 주머니에 핸드폰을 하나 꺼냈다. 평소 가족들과 통화하던 아이폰이 아니라, 3G 통신이 되는 노키아폰이었다. 시내 핸드폰 매장에서 간신히 구해와 말레이시아의 통신사로 가입을 하여 로밍으로 사용하던 폰이었다. 언젠가 통신이 끊길지 모르기 때문에 아빠는 미리 준비를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동생에게서 인터넷 단절은 너무나 낯설었는지 모른다.


아빠는 다시 분주하게 전화를 건다. 서울의 본사와 통화를 하고, 태국 지역 본사와 통화를 한다. 현재의 상황을 전달하였고 곧 철수를 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주재원이기 때문에 잔류를 해야 할 수 있다고 늘 이야기했다. 우리가 철수하는 순간 아빠 회사의 공장과 사무실은 정부군이 압류를 할 것이고, 아빠가 어렵게 개척했던 사업은 다시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고 말했다. 엄마는 가족들이 함께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였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느 상황이고, 이미 정부군이 인터넷까지 끊어놓은 상황이니 외국인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게 되었다. 아빠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보장받을지 몰라도, 아빠의 안전은 보장받지 않을 수도 있다. 아빠는 웃으며 나에게 다시 한번 이야길 했다.


“하진아. 아빠가 이야기한 거 기억나지?”


“어떤 거? 135 필름?”


아빠는 작은 양철통을 들며 이야길 했다. 아빠는 이곳의 상황을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며 필름 카메라로 이곳저곳 촬영을 했다. 몇 년 전 아빠는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큰 맘먹고 독일의 라이카 카메라인 MP를 구입했다고 했다. 그 카메라는 항상 우리 가족과 함께했다. 동생의 돌잔치 때도,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갈 때도, 심지어 아빠는 내가 학교를 등교하던 그 순간에도 사진을 찍어줬다. 1년에 2주씩 한국을 방문할 때도 아빠의 가방에는 카메라가 늘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충무로의 사진관에 들러 필름을 현상하고, 다시 필름을 사서 다시 귀국을 했다. 아빠는 남들과 다른 100ft 필름을 늘 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나와 함께 필름 로더기와 매거진을 이용해서 필름을 감았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빠는 일부러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아빠는 사진관에 들릴 때마다 아빠가 산 필름과 다른 매거진을 달라고 했다. 아빠가 늘 고른 필름은 코닥의 T-max 3200이라는 흑백 필름이었지만, 아빠가 고른 매거진은 언제나 후지필름의 C200이나 코닥의 포트라 400 같은 컬러필름이었다.


“응. 그래. 하진아. 이 필름은 무슨 필름이라고 했지?”


“티맥스 3200. 흑백 필름이라고 했잖아.”


“현상 용액은 무엇을 써야 한다고 했지? C-41?”


“아니. 매거진 대로 현상하면 필름을 다 망치기 때문에, 반드시 현상소에 가면 DF96으로 해야 한다고 했어.”


아빠는 장난꾸러기였다. 아빠는 혹시라도 정부군이 필름을 압수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곳에서 흑백 현상액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필름 현상 장비와 용액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 넓은 나라에서 컬러필름 현상 용액을 구할 수도 있을 거라 아빠는 생각했다. 정부군이 필름을 압수하여 현상을 하게 되었을 때, 필름에 찍힌 사진 때문에 우리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빠는 매거진과 다른 필름을 감아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 가끔 엄마는 아빠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아빠가 찍은 사진이 국경을 넘게 되면 분명 큰 파장이 일어날지 모른다. 당연히 정부군이 필름을 가져가서 보게 되면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아빠는 큰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늘 웃으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빠의 뷰파인더는 늘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이곳의 일상을 향하고 있었다.


양철통에는 필름이 20개 정도 있었다. 디지털카메라는 많이 위험했다. 아빠가 늘 너무 편해서 민망하다 했던 SL과 시그마 렌즈는 어느 순간부터 사용할 수 없었다. 가족의 일상을 찍다가도 정부군은 아빠의 카메라를 보고 사진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아주 작은 공간의 정부군의 총이나 차량만 찍혀도 정부군은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를 부숴버렸다. 포맷을 하더라도 분명 다시 복구가 가능하다 생각했다. SD카드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미 몇 개를 부숴버렸는지도 모르는데, 아빠는 태국에서 혹은 방글라데시에서 힘들게 구했던 마지막 SD카드 마저 정부군이 부숴버리자 그날부터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아빠의 카메라는 셔터가 참 조용했다. 하지만 수동이라 그런지 사진을 빨리 찍질 못했다. 조리개를 맞추고, 셔터를 맞추고, 다시 초점을 맞추다 보면 즐거웠던 장면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동생의 웃긴 표정을 보다가 초점을 맞추다 동생은 금방 지루해져서 다른 표정을 짓곤 하였다. 노부부의 중식당에서 먹던 삼겹살에 즐거워하던 동생의 표정. 바쿠테 국물과 안에 있는 얇은 당면 같은 국수를 빨아들이는 내 모습은 이제 한 순간을 포착해서 찍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이폰의 갤러리에는 아빠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 늘 올라왔다. 어렸을 때 가락국수를 좋아했던 내가 가락국수를 빨아드리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고, 아이스크림을 먹다 놀란 표정이 찍혀있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늘 아빠의 카메라와 뷰파인더를 통해 영원히 간직되었다. 할아버지의 온화한 미소도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도 사진으로 남아있었다. 아빠의 카메라는 우리 가족의 따뜻한 순간을 늘 남기곤 하였다. 언제나 렌즈 하나를 이용해 아빠의 얼굴과 눈은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향해 있었다. 디지털카메라라는 장점 때문인지 몰라도 아빠는 숨도 안 쉬고 셔터를 눌러댔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행복한 순간을 담던 카메라였다. 하지만 이제 그 카메라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인터넷도 되지 않았지만, 디지털카메라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빠는 포기하지 않았다.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할 수 없다면, 아빠가 늘 간직하던 필름 카메라인 MP가 있었다. 우리 가족을 찍기 위해 늘 간직하던 쥬미크론 50mm 렌즈와 쥬미룩스 50mm 렌즈는 이제 캐리어 속에 잠들어 있었다. 아빠의 사진은 엘마릿 28mm 렌즈를 통해 찍혔다. 넓은 화각으로 혹시나 놓쳤을 수 있는 순간을 아빠는 찍는 것이라 했다. 아빠는 늘 필름을 장전하고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필름이라 그런지 흔들리는 사진도 많았고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사진도 많았다. 실패한 사진도 있었지만 아빠에게 있어서 그 사진 한 장조차 소중한 사진이라 했다. 인스타그램도 사용하지 못하고, 페이스북도 사용하지 못하며, 트위터도 사용할 수 없는 이곳에서 사진 한 장이 정말 큰 힘을 낼 것이 이라고 했다.


그런 아빠도 아침만 되면 항상 기분 좋게 눈을 뜨곤 했다. 빛이 너무 밝다면 아빠는 셔터 스피드를 빠르게 할 수 있다고 좋아했다. 조리개 값을 작게 할 필요가 없어 초점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너무 좋아했다. 아빠에게 있어서 빛은 좋은 사진을 찍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재료였다. 그리고 지난 한 달 동안, 아빠의 카메라는 우리 가족을 찍지 못했다. ISO 3200이라 밤에도 셔터를 눌러대곤 하였다. 지글거리는 사진일 거라 생각했지만, 아빠는 정부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고, 탱크로 포격을 가하는 모습은 너무 자세하지 않더라도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우린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우리 차량의 번호판을 바라본 정부군은 잠깐 포격과 사격을 멈췄다. 외국인이 사망한다면 아무래도 명분 없는 내전이 더욱 명분이 없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만큼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인이라는 이방인의 신분. 그리고 주재원이라는 아빠의 신분이 우리가 안전해질 수 있는 특권의 증표였다.


그러나 아빠가 나에게 준 양철통은 우리의 특권이 사라지는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아빠와 우리 가족은 간첩행위로 적발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국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외국인 누군가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야 했다. 방송국을 점령하여 처음 발표를 한 것도 외국인의 간첩행위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리고 그 명분으로 인터넷을 차단했다. 우리는 답답할 뿐이었지만, 이곳의 시민들은 불편함을 넘어 눈과 입이 차단되는 순간이었다. 간간히 시민군들은 핸드폰으로 촬영한 사진과 동영상을 트위터로 올렸다. 전 세계사람들은 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서 이들이 고생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트위터를 통해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정부군은 트위터를 올린 사람을 찾아 총살했다고 했으며 전단지로 간첩행위에 대해 엄벌에 처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트위터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자주 사용하던 인스타그램도 어느 순간 막혔다. 우리 가족의 사진과 나의 일상을 담아두던 인스타그램이 접속되지 않았을 때 나는 아빠에게 투정을 부렸다. 너무 핸드폰이 오래된 거라 접속이 안되는 거 아니냐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친구들도 인스타그램이 안 되는 걸 알았을 때 정부군이 차단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튜브도 그즈음 차단되었던 거 같다. 작년 생일 선물로 아빠는 면세점에서 고프로를 사줬다. 외국생활을 오래 하는 나에게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선물을 해 주고 싶다고 했다. 고프로로 유튜브를 만들어도 되고 우리 가족을 위한 동영상을 찍어도 된다고 했다. 내 첫 유튜브는 피아노를 치는 내 모습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덧입힌 30초도 안 되는 영상이었다. 밥을 먹는 모습, 쇼핑몰에 방문하는 모습. 포장마차의 군것질거리를 사 먹는 모습, 전통시장을 방문해서 과일을 사는 모습. 난 과일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수박을 먹고, 망고를 먹는 모습은 일주일에 몇 번씩 찍곤 하였다. 구독자가 100명도 안 되는 계정이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취미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유튜브 접속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달 전이었던 거 같다.


아빠는 이런 상황일수록 아날로그가 더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선택한 방법은 너무나 불편했다. 스마트폰의 넓은 화면을 보다가 노키아의 작은 화면의 키패드는 잘 눌러지지도 않았다. 번호를 찾기도 힘들었다. 문자는 더욱 힘들었다. 인터넷도 안되는데, 아빠는 심심하지 말라고 MP3로 음악 몇 개를 넣어줬을 뿐이다. 아무리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같은 노래를 수십 번 들으면 지루해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아빠가 쥐어준 노키아 핸드폰은 놔두고 내 아이폰을 들고 다니곤 하였다. 물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인터넷이 느려지고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난 아이폰을 들고 다니며 언젠가는 애플뮤직을 통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유튜브를 볼 수 있으며, 사파리에서 인터넷을 접속해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을 보며 웃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전파가 차단되고, 인터넷이 차단되자 내 아이폰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늘 스마트폰을 통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페이스북을 하던 친구들은 접속이 되지 않는 스마트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아빠가 쥐어준 노키아 핸드폰은 전화를 간신히 하였지만, 그나마 우리 가족들을 연결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었다. 카메라도 없었기 때문인지 정부군은 우리 가족의 노키아 폰에 큰 관심을 가지질 않았다.


가전제품은 너무 커서 챙길 수 없었다. 한 명 당 수화물용 캐리어 하나, 기내 반입용 캐리어 하나. 이게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짐의 전부였다. 동생은 자기 장난감을 챙기기 바빴다. 페파 피그와 리락쿠마 인형, 헬로키티 인형을 챙겼다. 레고도 가져가려 했으나 가방에 다 들어가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난 책들을 챙겼다. 학교에서 사용하던 교과서도 챙겼지만, 내가 좋아하던 책도 챙겼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너무 좋아서 이 책은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아마 이 책도 면세점의 서점에서 샀던 문고판 책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책인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핀의 모험도 좋아하던 책이었다. 물론, 내가 정말 좋아하던 책은 빨강머리 앤이었지만 그 책은 어디에 있는지 찾기 힘들었다. 공항에서 다시 사야지라고 이야기는 했지만 속상했다. 그리고 내 옷 몇 벌과 함께 아빠가 쥐어준 양철통. 그 안의 필름이 중요했다. 혹시라도 세관에 걸리게 되면 이 필름은 우리 가족을 찍은 필름인데, 이곳에선 현상할 수 없어 들고 갈 예정이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다 정부군이 압수를 하더라도, 이들은 올바른 현상액을 모를 테니 현상을 하더라도 필름을 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양철통을 다 압수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필름 몇 개는 기내용 캐리어에 옮겨 넣었다. 불필요한 노트북이나 전자기기는 챙길 수 없었다. 노트북을 가져가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을 다 확인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추억 하나하나도 이들에게는 불편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하진아. 우리는 분명 빛이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아빠는 짐을 싸다 말고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주일 안에 떠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하루라도 빨리 떠날 준비를 해야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빛 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피사체를 이루게 돼. 렌즈 모여있는 빛을 하나로 모으게 하는 거고. 하지만 빛이 너무 많거나 적으면 이쁜 사진은 나오지 않을 거야. 필름 속에서는 적당한 빛이 있어야 시잔을 만들 수 있거든. 빛이 너무 과하면 하얀색밖에 안 나올 거고, 너무 어두우면 검은색밖에 나오질 않아. 적당한 빛이 있어야지만 사진이 나오거든. 그 적당한 빛은 하진이 너도 알겠지만 정말 따뜻한 빛이야. 눈을 감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빛.”


따뜻했던 그 순간. 아빠가 찍은 사진은 그 어느 때보다 이뻤다. 색도 아름다웠다. 사진만 바라보더라도 너무나 행복했다. 동생의 천진난만한 모습도 너무 아름답게 찍혔다. 우리 가족의 행복한 모습도 따뜻한 빛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되었다. 따뜻한 봄날. 사진은 그 어느 때보다 이쁘게 나왔다. 꽃잎의 알록달록한 색감도 빛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향기롭게 나왔다. 역시 마찬가지로 봄날이었다. 햇살은 그 어느 때 보다 따뜻했다. 비도 잘 안 내리는 맑은 하루였지만, 우리 가족은 아름다운 빛을 이용해 우리 가족의 추억을 담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했다. 우리의 뷰파인더는 우리 가족의 사진이 아닌 시민들의 목소리를 향해야 했다.


“아빠. 곧 있으면 여기도 이쁜 사진들을 많이 찍을 수 있겠지요?”


“아마 그럴 거야. 트위터가 막히고, 인스타그램이 막히더라도, 아빠와 같은 사람이 한 롤씩 보내는 필름 하나가 이들의 현실을 알려주게 될 거고, 언젠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게 될 거야. 그때의 봄날은 분명 그 어느 때 보다 따스한 햇빛이 비추게 될 거고.”


가족들과 함께 방문했던 콕스 바자르의 해변이 떠올랐다. 바다 냄새와 모래 냄새가 어우러져 묘한 냄새가 났다.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흙먼지가 휘날리는 도로였기 때문에 차가 지나갈 때 내뿜는 매연과 흙먼지의 냄새도 함께 섞여 묘한 냄새를 이루었다. 그 어느 때보다 더웠고, 그 어느 때보다 힘들게 도착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카메라는 우리 가족을 향하지 않았다. 콕스 바자르의 100마일 해변이 아니었다. 저 멀리 펼쳐진 모래와 바다와 지평선은 아빠의 뷰파인더를 가리키질 않았다. 아빠의 눈은 유엔 난민기구의 차량이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로힝야 난민의 주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 해만큼은 의미 있는 여행을 떠나자 않다. NGO와 함께, 간호사였던 엄마는 국경 없는 의사회 사무실로 가 예방 접종 준비를 했다. 동생은 아이들과 놀기 바빴다. 동생이 준비한 공은 뽀로로가 그려져 있었지만, 아이들은 공을 보자마자 큰 웃음을 지으며 달려갔다. 동생도 아이들의 누더기 같은 옷 보다 자기 또래 아이들이 뛰어오는 게 행복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빠가 찍은 사진, 엄마와 내가 함께 돌보았던 아이들의 모습. 그 아이들의 사진은 아빠가 말한 따스한 빛과 만나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곧 떠나게 된다. 그리고 아빠는 그 뒤 며칠이 될지, 몇 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태국이 될 수도 있고, 말레이시아가 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다시 만날 것이다. 아빠는 코타키나발루를 추천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있고, 음식도 익숙하고, 키나발루 해변의 석양도 아름다우니 이번만큼은 따스한 햇빛을 밭으며 편하게 쉬는 건 어떠냐고 이야길 했다. 탄중아루 해변에서 먹는 코코넛 주스도 참 맛있다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아빠는 깜풍 아이르에서 게 요리와 소주 한잔을 마시며 쉬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가 아닌걸 잘 알고 있었다. 방콕을 경유할지, 다카를 경유할지 모르지만 우린 분명 인천으로 가야 한다. 우리의 까무잡잡한 낯선 피부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놀릴지도 모르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엄마는 비행기에서 동생에게 우리나라말을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아니면 몇달 후. 어쩌면 몇년 후에는 아빠가 우리를 뒤 따라올 것이다.


다시 우리 가족들이 만나게 되면 그땐 여름일 것이다. 어쩌면 가을이 될 수도 있다. 아빠는 남은 시간 동안 필름 몇 롤을 더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날의 따뜻한 햇빛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때론 슬프지만, 희망을 줄 수 있는 그 따뜻한 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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