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평] 볼 수 있는 눈, 하지만 보이지 않는 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본다는 것이 지니는 의미

by 별빛바람
IE001100943_STD.gif 오이디푸스의 유일한 눈 뜬자. 테이레시아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지혜의 왕, 혹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왕의 이야기라고 어렴풋이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자신의 저주를 알게 되어 두 눈을 찌른 비극의 왕이란 내용도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내용이다. 단지 신이 설계한 운명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라는 피상적 주제만을 생각하곤 한다. 마치 동굴 속의 죄수가 그림자를 바라보며 이 세상 전체의 모습이라고 한 것처럼.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의 저주에서 해방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누구보다 지혜롭다 자만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또다시 찾아온 역병의 저주를 자신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은 그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쳤으며, 두 눈을 통해 라이오스의 살인범을 바라볼 수 있다 착각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진실을 바라보기보단 자신이 보고자 하는 그 순간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폴론의 신탁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진실은 단지 자신을 해치기 위한 크레온의 음모로 치부했을 뿐. 오이디푸스의 진실로 다가가는 순간은 두 눈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아폴론의 신탁을 시작으로 테이레시아스와의 대화, 수많은 진실에 대한 증언을 통해 고통스러운 운명이 자신을 피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두 눈은 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두 귀로 듣게 되자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지혜롭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두 눈을 통해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두 눈의 본다는 것의 한계성을 소포클레스는 주목하고자 하였는지 모른다. 이데아의 허상에 비친 그림자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도 소포클레스에게는 큰 관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의 더 큰 관심사는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두 눈을 뽑은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진실인양 착각했던 보이는 것이 아닌 두 귀와 다른 감각을 동원하여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길 바랬을 것이다.

신은 허상만을 바라보는 눈 뜬 자가 아닌, 눈 감은자인 테이레시아스를 자신의 대리자로 선택한다.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는 인간의 한계성보다는 인간의 눈은 감았으나 진실의 눈을 뜬 테이레시아스를 통해 신의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고통스럽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진실을 듣는 순간 차마 눈 뜨고 살 수 없어 자신의 눈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알게 된다. 자신의 두 눈을 통해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을, 실명함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듣기 싫었던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달콤한 말만 하고 번영뿐인 테베의 거짓이 아닌, 점점 몰락해 가는 테베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

본 작품 이후,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딸과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비난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자신이 죽어 묻히게 되는 곳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신탁을 이루기 위해서였지만, 아들이 있는 테베가 아닌 아테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진실의 눈으로 바라본 테베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잃은 것은 단지 두 눈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잃음으로 해서 진실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남편, 그리고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었던 셰익스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