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빛바람 Oct 05. 2024

학교도 밤이 찾아온다.

이젠 "학교"라는 이름이 사라진 시대

어린 시절에 스승의 날은 합법적으로 촌지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당시 정년을 몇 년 남기지 않았던 국민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매우 엄하고 무서운 선생님으로 소문이 났었다. 때론 소문이 무성해서 그랬을까? 그 선생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전부 그 선생님의 몫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던 전교조 선생님이라는 소문 부터 시작해서, 너무 엄해서 아이를 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와 같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으로는 그래도 저학년 담임 선생님이 좀 엄해야지 아이들의 바른 성장에 도움이 될거라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학년 첫 입학식이 있던 날 선생님은 학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한 친구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입학식인데도 조용하지 않고 시끄럽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선생님의 폭력은 편견이 없었다. 이제 예순이 다가올 인지한 할머니와 같은 인상의 선생님은 편견없이 뺨도 때리기도 하고, 각목을 휘두르기도 했고, 잘했어요 도장으로 이마를 찍기도 했다. 선생님의 칭찬 스티커는 공책이 아니라 이마에 찍어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편견 없는 선생님에게도 편견이 생길때가 있었으니 스승의 날이 되었을 때 였다. 스승의 날이 되자 평소에 선생님에게 많이 맞았던 아이는 커다란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선물을 하나씩 챙기며 반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선생님은 머릿속으로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어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선물을 줘야 하는 중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에, 엄마도 없는 돈을 쪼개며 시장에 있는 금은방에서 작은 귀고리 한 쌍을 준비했다. 그 당시 아버지 월급이 백만원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으니, 거금 만원짜리 귀고리는 엄청 값진 물건이었다. 아니, 우리  가족들이 한 달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선물을 보더니 내 눈 앞에서 휙 하고 던진다. 그리고 "싸구려 귀고리를 선생님한테 선물 하는게 말이 되니?" 라는 이야기를 하며 내 뺨을 때린다. 커다란 이불이며, 그릇 세트를 바라보며 함박 웃음을 짓던 선생님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일국이 아버지는 시장 입구에서 작은 리어커에서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하셨다. 동일 극장 앞에서 그릇을 파시니 그런대로 장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우연히 퇴근길에 이쁜 그릇 노점을 하는 집이 일국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고, "그릇이 참 예쁘네요." 라는 말을 살갑게 하며 떠났다고 했다. 그 날은 스승의 날 1주일을 남긴 시점이었다. 마침 일국이 어머니는 그래도 센스가 있으셨는지 국그릇이며 밥그릇이며 접시까지 해서 큰 세트를 포장해 와서 스승의 날에 선생님에게 전달해 드렸다. 그 날의 승리자는 일국이와 오리털 이불 세트를 들고온 정화였으니 말이다.

선생님은 이제 다시 공평해져야 했다. 마음에 드는 좋은 선물을 준 친구들은 반장, 부반장이 되었으며, 분단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권력은 막강했으니 칠판 한 구석에 떠든 아이의 이름을 적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나 자습 시간 혹은 수업을 하기 싫을 때면 권력을 준 아이들에게 이름을 적도록 해 주었다. 당연히 그 아이들은 정말 떠드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저 마음에 안 드는 아이들의 이름을 적는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이름이 적힌 아이들은 선생님의 축복을 받아 주먹쥐고 엎드려 뻗치기를 하거나, 선생님이 손수 만든 각목으로 엉덩이를 맞는게 일상이었다.

나는 그 시절 떠든 적이 없었지만 반장은 선생님과 서먹한 나를 선생님과 좀 더 정겹게 하고 싶었는지 내 이름을 적였다. 나는 일국이한테 왜 자꾸 내 이름을 적는지 물어봤다. 일국이는 웃으며 "니가 만만하니까."라고 했다. 그랬다. 선생님은 떠들든, 떠들지 않든 그 아이들에게 준 권력은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아무 이름도 적지 않는다면 반장은 자기 역할을 하지 않은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이 글은 그 당시 선생님들의 비인격적인 행동에 대해 고발하려는 내용이 아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에 대해 이야기 할 생각은 없다. 단지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일화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교육청 은사 찾기 서비스가 시행 된 이후, "스승 찾기" 중 제자가 아닌 스승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제자를 교육하며 이끈 것에 대한 미담을 과거의 추억으로 남기기 위함일까? 아니면 진정 스승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물론 영화와 같은 그 이야기는 실제 '23년. 한 청년이 "스승 찾기" 서비스를 활용하여 옛 은사의 은혜를 갚기 위해 흉기를 소지하고 한 달을 기다렸다는 행동은 하나의 "피해망상"의 결과로 다가온다.

피해망상의 한 사례이긴 하지만, 실제로 많은 학생이 스승을 찾기 위한 목적은 스승의 은혜. 좋은 은혜이든, 나쁜 은혜이든 그 은혜를 되 묻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선생님 왜 그러셨어요?" 라는 자극적 문구의 영화 홍보 문구 부터 시작하여, 넷플릭스의 한 드라마에서 스승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학폭 피해자의 처철한 몸부림. 그 모든 것들은 전부 하나의 일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시작하며, "밤"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목적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한 어두운 단면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은 사실 회사, 상아탑, 군대 이렇게 3가지 분야에 대해 설명을 하고자 했으나 부득이 학교의 카테고리가 추가 된 것은 억울한 학폭 가해자로 몰렸던 딸 스텔라의 이야기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아무 잘못 없는 스텔라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변호사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학교에서는 단지 "중립의 의무"라는 명분 아래 어떠한 도움 조차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었다. 그리고, 실제 그 이면에는 피해자라 주장하는 집안의 끊이지 않는 발전 기금 몇 천만원에 무릎을 꿇은 초등학교의 한 단면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내가 어릴적 초등학교 선생님은 그릇을 파는 집의 그릇을 빼앗다 시피 하며 그 댓가로 돌려준 반장이라는 달콤한 권력을 파는 장사치에 불가했다. 그리고 학부모 면담 때 지긋이 책상 서랍을 열며 "촌지 주시면 전 마다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늘 아끼지 않던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모습 밖에 없었다. 그들은 단지 교사라는 직업에 더 많은 부가가치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의 학교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선생님이 직접 스승의 날 선물을 받는 경우는 없다. 아니, 촌지 문제 때문이라도 학교는 스승의 날 행사 자체를 축소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교사 개인이 아니라 재단의 차원에서 혹은 학교 전체의 차원에서 "발전기금"이라는 명목아래 돈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렇다. 좀 더 규모적으로 바뀌었으며, 체계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저 스텔라가 다니는 학교가 학비 비싼 사립학교 였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들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리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학교는 알게 모르게 눈에 보이지않는 행동을 해 왔었다. 스텔라가 누명을 쓴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선생님도 스텔라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텔라는 선생님의 주도아래 가해자 그룹 학생들과 함께 휩쓸려 최초 진술서를 써야 했으며, 그 진술서 조차 선생님의 지도 아래 스텔라가 하지도 않은 일을 기억을 되돌려 가며 써야 했었다. 심지어 스텔라에게 유리한 CCTV조차 파기하고 증거 제출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결국 그 이유는 몇 천만원이라는 분기마다 주는 발전 기금의 달콤한 유혹 때문이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오히려 거짓말이라 치부하기 일수였다.


내가 겪었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 스텔라가 겪었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긍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단지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종류일 뿐이지, 그 이상도 -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