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화감독 중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한국을 뛰어넘어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감독으로 우뚝섰다. 특히, 영화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수상하였으니, 작품성 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함께 얻은 감독이 되었다. 많은 감독이 예술적으로 인정을 받아 유럽의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경우는 있으나, 미국 아카데미 까지 수상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애호가들이라면 충분히 알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 영화의 주제는 다소 무겁다. 최초 단편 모음집인 『지리멸렬』을 시작으로 현대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유지해 왔다. 한 대학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몰래 보던 음란서적이 여학생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바퀴벌레라 이야기 하며 허둥지둥 달려들며 숨기려 하는 모습은 마치 80년대 『유머 1번지』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며, 부조리에 가득 찬 사회 유명인사가 TV토론회를 진행하는 모습은 마치 코미디 토크쇼의 한 장면과 같이 구성을 하였다. 『지리멸렬』은 봉준호 감독의 일관된 주제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일관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영화적 문법에 대한 변화였다. 그 변화는 박찬욱 감독이 일관되게 복수 혹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탐구를 하며, 현재는 활동을 하지 않는 이명세 감독이 일관되게 영화의 미척 구성에 대해 탐구를 하였다면, 봉준호 감독은 대중성을 접목하며 영화적 문법을 함께 융합해 누구나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했다. 마치 『플란다스의 개』에서 다소 유치한 듯 화장지 길이로 실강이를 벌이는 모습은 『살인의 추억』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수사반장』의 인트로를 흉내내는 모습으로 발전하였으며, 이후 『마더』에서 미남 배우가 얼빠진 바보의 모습을 연기하는 등 현실의 부조리를 블랙 코미디와 접목함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봉준호 감독은 일관된 주제속에서 다양한 소재를 접목하며 영화적 문법이 조금씩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 봉준호 감독은 일관된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함의 결과를 작품속에 스며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일관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그 주제의식을 전달하고자 함이다. 마치 우리의 삶 주변에 있는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하듯 말이다.
I. 진화하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봉준호 감독은 사회의 부조리 중 계층간의 불평등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끊임없이 다뤄왔다.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는 와이프의 퇴직금을 털어가며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 지식인의 모습을 그렸다면, 『살인의 추억』에서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의 모습이 정의롭지 않고, 가혹행위를 일삼는 모습이 마치 일상인 것처럼 보여줬다. 우리가 마치 알고 있는 사회 지도층의 모습 중 부정적인 단면을 희화화한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인 『지리멸렬』에서 그 시작을 보여준다. 31분짜리 짧은 단편 영화에서 보여준 한 교수의 지저분한 일상은 바퀴벌레라는 짧은 에피소드로 그리고 그 모든 단편이 TV토론이라는 모습으로 확장된다. 봉준호 감독의 시각은 사회 지도층의 모습이 부끄럽고 지저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결과 영화는 『플란다스의 개』로 진화한다. 교수 임용에 실패한 시간강사 윤주는 개 짖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아파트 주위의 개를 유기하는 것이 일상이다. 사회 지도층으로 오르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만, 일상적인 개 짖는 소리에도 짜증내는 모습과 반대로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 현남은 주위에 개가 사라지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는 것으로 영화는 진행된다. 이 부분까지만 보면 윤주와 현남의 추격전이 벌어질 것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더 현실을 파고 든다. 술 한잔 마시지 못하는 남궁민 박사는 뇌물로 교수자리를 얻었으나, 술에 취해 지하철에 치여 죽는 사고를 당한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는 윤주에게 돌아온다. 학장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이후 영화는 윤주를 추격하는 현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부조리를 다시 한번 흔들기 시작한다. 단지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퇴직을 당하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학장에게 줄 뇌물과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온 은실의 강아지를 찾기 위한 공동 수사극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현실은 다시 한번 뒤틀어버린다. 결국 강아지도 찾지만 현남은 퇴직을 당하고, 윤주는 교수가 되어 무기력하게 창가만 바라볼 뿐이다. 그저 모든 죄는 다 부랑자가 뒤짚어 쓴 채 말이다.
영화는 다시 『살인의 추억』으로 변화한다. 화성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영화 같지만 기본적인 수사 원칙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결정적 증거인 발자국을 찾았지만, 그 발자국을 보존하는 방법은 그저 나무 막대기로 동그라미를 그릴 뿐이다. 그리고 무력하게 그 증거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경운기 때문에 사라진다. 그나마 서울에서 과학수사를 신봉하는 서태윤이 왔지만 그를 처음 본 박두만은 그저 날라차기를 하며 한 마디를 한다.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그 당시 사회 권력의 한 부분 중 하나였던 경찰의 권력을 무력하게 흔들기 위한 모습이다. 타자기 타이핑 조차 힘겨워하는 박두만은 그저 현장에 음모 하나 없다는 이유로 목욕탕을 전전하면 성기 주위에 음모가 없는 사람을 찾기위해 돌아다닐 뿐이다. 그나마 서태윤은 영어로 된 문서를 읽어가며 선진화된 실력을 보여주지만 말이다.
그 둘이 벌이는 사건의 해결 방식은 마치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지만 실제 해결되는 것은 없다. 그나마 조용구 형사는 군화발로 짓밟고, 시위 현장에 몽둥이를 들고다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녹슨 못에 찔린 다리가 파상풍으로 절단해야 하는 모습으로 결말을 맺을 뿐이다.
이후 그의 영화는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괴물』에서는 미군의 폐기물 무단 방류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며, 한강에 나타난 괴물과 그 괴물에 대처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마더』에서는 한 가정의 광기어린 모성애를 그림으로 그려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집합체의 역할은 『설국열차』로 다시 한번 발전하게 된다. 정확하게 구간이 나뉘어져 있어 각자의 역할과 자리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계층의 삶을 보여준 영화였다. 물론, 이 영화는 글로벌적으로 큰 성공을 하진 못하였다. 이후 『옥자』를 통해서 글로벌 대 기업의 실체를 보여주었으며, 『기생충』을 통해서 계층과 계층간의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항상 일관적이다. 그는 권력, 계층과의 투쟁을 하나의 코미디와 같은 장면과 겹쳐지며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저 우리는 코미디와 같은 장면일지 모르지만, 그 현실은 그저 씁쓸할 뿐이다. 박두만이 서태윤에게 날라차기를 하며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라는 질문을 내 던지며 이 장면은 개그콘서트의 한 장면으로 패러디가 되어왔지만, 실제 모습은 과학수사등 객관적인 수사기법이 아닌 그저 형사의 군화발과 고문에 의해 모든 사건이 처리가 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는 그 모습이 계속해서 보여지고 있다.
II. 다양한 장르를 비튼 봉준호 감독
봉준호 감독은 타란티노 감독 이상으로 영화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박찬욱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를 편하게 보고 싶어 비디오 대여점을 오픈하였다면, 봉준호 감독은 집안 분위기 자체가 영화와 만화책을 자유롭게 보며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의 결과물은 결국 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배끼는데 멈추지 않는다. 다양한 작품의 특징을 바라보며 비틀고 흔즈는 작업을 통해 자신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작품의 주된 특징이다. 도한 장르의 관습을 비트는 혼합 장르 스타일이 그의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장르는 계급과 불평등 및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설국열차』의 화려한 기차칸의 스시를 먹는 모습이나 바퀴벌레로 만든 양갱을 먹는 모습은 그저 계급의 불평등을 표현하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다. 아포칼립스 시대에 이 세상에 그저 하나 남은 설국열차의 탑승객은 그저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는 모습일 뿐이다. 자리 한 공간 먹고자 하는 양갱 한 조각 마저 부족해서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는 반면, 상류층이 살아가는 세상은 그려 무료하기 때문에 마약을 흡입하며 하루 하루를 보낼 뿐이다. 그리고 커티스는 그저 이 열차의 칸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하는 하나의 소재일 뿐이다. 각 칸마다 엮여있는 현실을 보여주며, 우리가 그저 싸워왔던 이 작은 공간과 사람이 먹기조차 힘든 양갱을 다투고 싸워왔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야기 한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각 계층간의 연결을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왔음을 말이다.
처음 『설국열차』가 개봉했을 당시에는 기상이변에 의해 발생한 포스트 아포카립스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SF 영화와 같은 인상을 만들었다. 사실 CJ 엔터테인먼트가 그저 “이 영화는 계층간의 갈등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영화”라고 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는지, 세계적 거장인 봉준하 감독의 첫 장편 영어로 만든 SF 영화라고 포장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이 영화의 목소리는 『미키17』로 다시 발전한다. 그저 한 기업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 한 명의 삶에 대해 주목한다면, 영화 『더 문』을 떠오르게 한다. 3년마다 지구의 귀환을 꿈꾸지만, 실제론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폐기를 하고 다시 새로운 복제인간이 대체되는 미래 사회의 모습과 더불어 『설국열차』에서는 그 현실이 그저 소비와 생산의 균현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모습으로 발전한다. 마치 『소일렌트 그린』에서 우리가 어떠한 건지도 모른체 맛있게 먹었던 소일렌트처럼 말이다.
그의 영화는 또 한번 장르를 비트는 작업 뿐만 아니라 관습을 비트는 작업을 수행한다. 영화 『마더』의 김혜자 배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모성애로 가득찬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부족한 아들 윤도준을 지키기 위해 집착을 하는 한 어머니의 집착과 광기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본 영화의 첫 시작이 그저 살인사건에 억울하게 누명을 쓴 아들에 대한 구명운동을 하는 억척어멈과 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영화속에서 상상을 했다. 하지만, 실제의 영화는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광기 어린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 할 뿐이다. 다소 부족하지만 순수할 것만 같았던 윤도준 역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 살인에 대해서 마저도 죄책감이 없을 뿐이다. 그럼과 동시에 이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가장 추악한 면까지 보여준다. 청소년의 성매매 혹은 불법의 경계선 아래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주인공 어머니 역시 불법으로 침술을 놔주며 돈을 받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존재였다.
이후 그의 영화는 『옥자』는 봉준호가 생각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좀 더 극단적으로 수행한다. 일반적인 극장 체인이 아닌 새로운 권력인 넷플릭스로의 공개. 그 하나의 선택마저도 한국의 영화계는 술렁이게된다. 충무로를 중심으로 하여 전통적인 극장 체인에 개봉을 해야지만 “영화”로서 인정을 해 준다는 권력의 헛소리와 넷플릭스로 개봉했기 때문에 “영화”로 분류 할 수 없다는 처절한 항변. 그리고 그 영화는 철저한 전통적 권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기업의 횡포를 보기좋게 비웃고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옥자가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도시 여기저기 휩쓸고 다니는 모습은 봉준호 감독이 기존 영화판의 권력에 대해 다시 한 번 흔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장르를 뒤 흔드는 그의 특기처럼 말이다.
III.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봄직한 영화들
우리는 권력앞에서 한 없이 작게 움츠려든다. 곤봉을 휘두르는 경찰의 권력에 한 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고, 아무리 지저분한 행동을 하더라도 교수의 학문적 권위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작은 권력도 권력이라 하였던가? 그저 아파트 동대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것은 그 동네의 갑질의 첫 시작이라고 하였던가? 작은 텃밭, 아파트 상가의 작은 상점에까지도 작은 동대표라는 타이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영화에서 여전히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어린시절 나쁜 외계인과 싸우기 위해 지구 최강의 병기 우레매를 만든 박사님의 인자한 모습이나, 지구의 종말을 앞두고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기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하는 한 박사의 모습은 여전히 우리에게는 스테레오타입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교수라는 권력 아래에서 여성에 대한 성착취, 제자들에 대한 노동착취가 일상이 된 오늘날의 모습에서 봉준호 감독은 첫 영화인 『지리멸렬』에서 바퀴벌레라는 에피소드로 유쾌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제는 봉준호 감독 외에는 이렇게 고민을 하도록 만드는 영화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저 화려한 CG와 최신 그래픽 기술을 활용한 현란한 화면만이 영화에 대한 보여주기 식으로 재생산될 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고민을 하게 만드는 영화관 방문은 점점 사라지게 되고 5 ~ 10분간의 도파민 분출이라는 유튜브로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될 수 밖에 없엇따.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항상 일관되게 보여준다. 계급에 대한 고민, 그리고 계층에 대한 고민과 함께 사회에 대한 부조리를 마치 블랙 코미디처럼 그려내는지 고민하는 감독이다. 물론, 그의 영화는 그저 무거운 영화가 아니라 예술과 대중성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상당히 잘 하는 영화감독으로서도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니 한번 시간 나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다시 한 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