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등진 산과 사라져가는 마을 사이에서

by 별빛바람

서울을 등진 산과 사라져가는 마을 사이에서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솟은 불암산(佛巖山)은 그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마치 송낙(여승의 모자)을 쓴 부처의 모습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흥미롭게도 이 산은 서울을 등진 채 앉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불암산은 본래 금강산의 한 봉우리였는데, 조선이 개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는 소식에 남산(목멱산)이 되고자 날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이미 지금의 남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에 크게 실망한 불암산은 차마 금강산으로 되돌아갈 면목이 없어 그 자리에 서울을 등지고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부처처럼 점잖게 앉아 있으나, 속사정은 실망과 부끄러움으로 서울을 외면해버린 산. 이 '돌아앉은 산'은 우리가 찾아가고자 하는 서울의 옛 모습, 그리고 잊혔기에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풍경을 찾아가는 첫 번째 여정의 이정표다.

서울을 등진 불암산처럼, 그 산자락 역시 우리의 기억과 문학 속에서 잊힌 동네가 되었다. 과거 선비들이 은거하며 기개를 떨치던 그곳은 이제 지도 위에서조차 위태로운 ‘백사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70~80년대 문학은 종종 달동네와 산동네의 풍경을 애환 서린 시선으로 담아냈지만, 이제 번화한 서울에서 그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고전 문학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명소를 예찬하는 글 뒤편에는 실학자들의 비판적인 시선과 민초들의 적나라한 삶이 존재했으나, 우리는 흔히 화려한 풍광만을 기억하려 한다.

그러니 우리의 발걸음은 단순히 명소를 유람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과 근현대, 그리고 현재의 모습이 충돌하고 어우러지는 그 ‘이면’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어쩌면 불암산이 서울을 등진 이유는, 화려함 뒤에 가려져 우리가 애써 피하려고 했던 그 쓸쓸한 민낯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서울을 등진 산 아래 사라져가는 마을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도 풍경을 애써 외면하곤 한다. 불암산의 단아한 자태와 조선 시대 한양 근교 4대 사찰 중 하나였던 불암사의 명성만을 쫓을 뿐, 불과 몇 걸음 옆에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속칭 백사마을)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불암산이 주류가 되지 못해 삐쳐서 좌절과 반항으로 등을 돌렸다면, 그 옆의 백사마을은 반항이 아닌 처절한 생존을 위해 기억을 잃어가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학원가가 즐비한 노원구 중계동 '은행사거리'는 사교육의 열기가 뜨겁게 타오르며 그 어느 지역보다 비싼 집값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화려함의 바로 뒷편, 우리가 등진 채 바라보지 않았던 백사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투기의 대상이나 신도시 개발 부지로만 바라볼 뿐, 그 땅에 새겨진 아픈 역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중계동 백사마을은 불암산이 한양의 경계를 긋기 위해 돌아앉은 것처럼, 도시 정비라는 명목하에 자행된 '배제'의 결과였다. 그 시작부터가 불협화음이었다. 1967년 도심 개발과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위해 밀려난 철거민들은 '은실학원' 부지였던 이곳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30평 남짓한 땅에 선을 긋고 네 가구가 들어가 살도록 지시받은 삶. 주소도 상수도도 없는 그 척박한 땅에서, 1969년 9월 24일 자 경향신문은 콜레라가 창궐했지만 병원이 없어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참혹한 현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image01.png 그림 1. 백사마을 이주 관련 경향일보 기사


백사마을을 자랑스러운 지역 문화라 부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서울시는 2013년 이곳을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하며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도시 개발의 이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장소로서 가치가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은 지금 사라져가고 있다. 마치 불암산이 등지고 앉아 있듯, 우리 사회는 재개발 계획이라는 명분 아래 또 한 번의 철거를 진행 중이다. 1960년대의 강제 이주 역사가, 2020년대에 또 다른 이주라는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백사마을이 직접적인 배경으로 등장한 문학 작품은 드물다. 그저 드라마의 소품처럼 낡은 배경으로 소비되곤 했다. 하지만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낙원구 행복동'은 백사마을의 풍경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소설 속, 살던 집이 헐리고 리어카를 끌며 어디론가 떠나야 했던 난장이 가족이 도착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1960년대 허허벌판이었던 이 중계동 104번지였을 것이다.

이곳은 우리가 외면하고 돌아앉은 서울의 뒷모습이다. 30평이 채 안 되는 땅에 분필로 선을 긋고, 한 가족이 7.5평의 좁은 공간에서 숨죽여야 했던 역사. 나는 2023년과 2025년, 두 번에 걸쳐 이곳을 찾았다. 사람들은 이곳을 사진 촬영의 명소라며, 과거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공간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뷰파인더 너머에는 여전히 이주하지 못한 주민들이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관계 속에서 위태로운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3천 세대가 넘는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한 굉음이, 또 한쪽에서는 역사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불과 몇 걸음 옆에는 평온한 불암산 등산로 입구가, 또 몇 걸음 옆에는 화려한 은행사거리 학원가가 펼쳐진다. 모든 것이 서로 상반된 채, 서로를 등지고 바라볼 뿐인 기묘한 공존이다.

처음 이곳을 찾은 목적은 필름과 흑백 사진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자의에 의해 등을 돌린 불암산과 달리, 백사마을은 타의에 의해 등을 돌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축 아파트에 대한 기대감 아래 수많은 사람의 삶은 지워지고,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이 기록은 단지 서울을 등진 곳이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 이것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서울의 지역 문화이며 미래를 위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image03.png 그림 2. 무허가 판자촌 옆에 보이는 부동산 간판


image02.png 그림 3. 백사 마을 골목의 모습



과거의 영광과 또 다시 등진 그 곳의 모습

헌종 10년(1844년) 한산거사(漢山居士)는 <한양가(漢陽歌)>라는 풍물가사를 통해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 한가한 소상팔경 산수도 기이하다."라는 구절을 남긴다. 이는 종로 및 광교 일대가 사치품과 돈이 물 흐르듯 넘치는 활기찬 공간임을 묘사하고 있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 매점매석을 하며 조선의 경제를 뒤흔들던 바로 그 시전의 무대. 우리는 잠시 시선을 종로로 돌려볼까 한다.

종로의 대로변은 여전히 높은 고층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둘러싸여 <한양가>나 <허생전> 속 화려함을 잇고 있다. 하지만 골목 안쪽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그곳에는 '새것'이 아닌 누군가가 쓰고 버린 물건들이, 그리고 노인들이 무료 급식을 기다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오버랩될 뿐이다.

조선 상업의 중심지였던 육의전의 영광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종로의 화려함 속에 숨은 오래된 식당과 시장의 흔적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골목 한 켠에는 여전히 자신의 공간을 찾지 못한 '쪽방촌'이라는 낡은 거리가 공존한다. 무릎 하나 펴기 힘든 좁은 방, 퀴퀴한 먼지가 쌓인 그 골목을 우리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걸어가 보지 못했다. 그곳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살아가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는 마치 그들이 없는 것처럼 등진 채 지내왔다.

<한양가>의 한 구절을 다시 떠올려 보자. 과거 종로의 화려했던 물건들은 이제 동묘라는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자재나 누군가 입다 버린 옷들과 어우러져 난전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그곳을 그저 흥미로운 눈요깃거리로, 혹은 누군가 쓰다 버린 물건들이 다시 활기를 찾는 이색적인 풍경으로만 소비하며 지나쳐올 뿐이다.


image03.png 그림 4. 작은 방 한 켠이 그리운 쪽방촌(동묘 쪽방촌)
image04.png 그림 5. 낡은 아파트 사이로 하늘에 보이는 빨랫감(동대문 아파트)

하지만 그 활기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면 우리는 다시 한번 벽에 부딪힌다. 그 벽은 우리의 목소리와 단절된 채, 오래되고 잊힌 공간으로 남아가고 있는 동대문 아파트와 쪽방촌의 벽이다. 종로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서울의 또 다른 민낯이다.

이곳 역시 우리가 남겨야 할 지역 문화이며 미래의 유산이다. 비록 과거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을지라도, 우리 이웃의 삶이 이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등을 돌린 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 뿐이다. 길을 걸으며 "과거의 기억"으로서 새겨진 안내판을 보며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공간이라 자부심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외면했던 그곳은 여전히 존재해 왔으며 우리에게 그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

이 글은 단순한 사진 기록이 아니다. 렌즈를 통해 우리가 바라보지 못했던, 아니 보려 하지 않았던 그곳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나 역시도 외면했던 그 거리를 다시 걸으며, 조용히 생각해 본다. 우리가 등진 것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시 잊었을 뿐이라고. 이제는 그 등을 돌려 마주 봐야 할 때라고.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 들

조세희 작가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썼고, 그 이후 우리 모두의 죄를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 <침묵의 뿌리>의 사진을 찍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침묵만 하고 있었다. 그 것이 우리의 죄 였던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저 아는 만큼 볼 수 있을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의 눈은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유흥준 작가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아가는 과정을 망각해 갔기 때문에 여전히 침묵해 갔으며, 그 침묵의 뿌리는 그저 서울의 아름다운 광경과 아름다운 문화만을 찾아 가려는 본능 때문이었다.


image05.png 그림 6. 좁은 골목에 구비쳐 있는 쪽방 촌 골목(신설동)

나는 그저 카메라를 들었을 뿐이다. 내 눈 역시 아름답고 화려함을 쫓아 갔지만, 그 아름다움보다 그저 우리가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우리의 문화의 유산들과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달해줘야 할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 유산을 찾고자 다시 한 번 떠났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곳은 여전히 서울을 등진 채 걸어가고 있었다.

2025년 12월 1일. 그 곳은 드디어 역사적인 축하와 환호를 받으며 공식적인 사라짐을 기록으로 남기며 축하 세레머니를 시작했다. 1960 ~ 70년대 그저 리어카 하나만을 이끌며 떠밀어져 가며, 분필로 그어 4인 1가족당 7.5평의 공간을 강요했던 그 곳은 이제 역사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바래왔다.


image06.png 그림 7. 역사속에 사라지기 직전의 그 공간의 기록


우리의 시선을 조금만 더 돌려보자. 서울 제기동의 한 곳은 옛 조선시대 왕들이 풍년을 기원하며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의 흔적이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소를 잡아 푹 끓인 국은 설렁탕이 되어 왕과 신하가 제사 후 고된 하루를 마무리 하였다는 기록. 그 기록의 기원이 되어 제기동과 청량리 그 주변은 그 어느 곳보다 오래된 노포 설렁탕집이 즐비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주위를 더 돌아볼 용기를 내질 못했다. 선농단에서 불과 몇 걸음만 더 걸어가면 여전히 존재하는 달동네의 빈민촌이 존재하며, 오래된 노포 설렁탕집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루 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쪽방촌이 여전히 존재하는 그 곳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라보질 못했다. 그저 “선농단”의 소고기 국은 설렁탕이 되어,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으로 그 비극을 잠시 이야기하긴 하였지만, 이 설렁탕 조차 마음껏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간이 여전히 존재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목소리 내지 못했다.


image07.png 그림 8 여전히 흔적으로 남아있는 순대국집


그 곳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작은 공간에서 부모님과 누나가 뒹굴며 거실이 되며, 공부방이 되고, 침실이 되며, 놀이 방이 되었던 작은 공간에 목욕 한 번 편하게 하지 못해 한 달에 한 번 엄마 손을 잡고 목욕탕에서 몸을 불리던 그 기억의 공간. 하지만 우리는 그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우리의 글 속에는 여전히 현실의 모습은 “아름다운 서울”의 이미지만을 생산해내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볼 뿐이었다.

이 글은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문화는 그저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잊어버릴 수 밖에 없는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의 미래 유산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다. 이것 마저 잊어버리면 우리는 알고 기억해야 하는 그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 곳은 유독 꼬릿한 냄새가 풍기는 고깃국집이 많았다. 그 고깃국 한 그릇을 포장해와 물을 붓고, 식고 남은 찬 밥을 부어 죽처럼 끓여넣은 그 밥이 너무나 맛있었다. 그때 꼭 어머니가 꼭 부탁하던게 있었다. “강아지 밥으로 주려 하니 짜투리 고기 좀 싸 주세요.” 식당 사장님은 알고 있었다. 그 짜투리 고기가 강아지 밥이 아닌, 우리가 국을 끓일 때 먹고자 하는 좀 더 씹히는 재료 였다는 것을.

그 곳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한 곳에서는 여전히 배추와 야채를 팔고 있다면, 한 곳에서는 다듬고 남은 배추 찌꺼기를 열심히 비닐 봉투에 주워담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 들은 그 배추를 푹 삶아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인 뒤 며칠을 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게 바로 2025년 겨울에도 일어나는 현실이었다.

이 글은 아름다움에 대한 글이 아니다. 우리가 좀 더 알아가기 위해, 우리의 미래 유산을 남기기 위해 다시 한 번 기록을 남기는 글이다. 그리고 그 기록이 다시 한 번 잊혀지지 않기 위해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사진으로 보완하고자 남긴 글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잊어간 침묵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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