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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

우리는 왜 일하는가?

by Simon de Cyrene
우리가 말하는 '꿈'의 실체

거창한 꿈을 꿨던 시절이 있었다. 원래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좀 그렇다. 사실 부모를 잘 만나서 단 한 번도 생계 그 자체를 걱정한 적은 없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노력하면, 열심히 하면 그냥 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 내가 직면했을 때까지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때서야 내 주위에 시선이 가고 사회적으로 나보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하더라. 그때 내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시작점이 달랐다면 과연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는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갖추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불안정한 상황들을 겪으며, 현실만 놓고 봤을 때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할 수준은 아니지만 앞에 상황이 어떻게 될지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에 처하면서 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교회에서는 그것을 '비전' 또는 '소명'이라고 포장하고, 교회가 아닌 일반 사회에서도 '가치관', '이념', '꿈', '목표'로 포장하지만 그 가장 근본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린 얼마나 고민하는가?


비전, 소명, 가치관, 이념, 꿈, 목표.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본인이 그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했든지 간에, 자신이 뭔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그 목표지점을 자신이 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왜]라고 질문을 해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00 업계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00를 이루기 위해서, 000이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게 되면 뭘 할 것인가? 그 이후에는 무엇이 목표가 될까? 우린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회가 만든 인위적인 무형의 무엇을 목표로 향해서, 그것에 매몰되어서 살아온 사람들의 말로를 많이 봐왔다. 우리는 특히나 지난번 대통령의 삶에서 그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너무 분명하게 봤다. 경주마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이 어떤 실수를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보다 조금 더 거룩해 보이는, 이타적으로 느껴지는 목표들도 존재한다. 인류평화, 인권, 더 좋은 세상에 되게 하기 위해, 평등, 자유. 그런 것들의 가장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모두 너무 단순하고, 거룩하지 않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이념'의 실체

사람들이 엄청나게 다투는 이념들도 많다. 사실 학부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다 보면 별의별 종류의 이념을 다 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심지어는 그 이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이념을 어떤 맥락에서 말한 것인지까지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기울여야 하는데 그 과정을 계속하다 보면 우리가 현실에서 보수, 진보, 좌우를 나누고 싸우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 다양한 이념들은 '이거야!'라고 시도했다가 그것으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나면 '이거잖아!'라고 해서 그걸 시도하다 거기에서 부작용이 일어나면 '이렇게 해볼까?'라고 타협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념]이라고 꼬리표가 붙어진 것들이 몇 가지 생겨나고 그게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들인지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시간, 짧으면 70-80년에서 길면 300-400년 정도 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앞뒤 좌우를 다 자르고 그냥 한쪽에 서서 싸우는 아주 매우 이상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이념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학자들이 했던 공통된 질문은 한 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걸 조금 다듬어서 표현하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였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은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이 생계를 해결하고 가능하면 단순히 생계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둘러싼 생각들이다. 그런데 사회가 복잡하고 지고, 통속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쓰자면 '발전'하면서 그 질문들은 사라지고 수단이었던 것들이 목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기부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처럼 인간 세상에서 물질적으로는 끝판왕까지 가본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더 많이 갖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아 우리가 사회를 만들고 경제체제를 운영하는 것의 가장 근본에는 사람들이 더 안전하게 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해결해주기 위함이었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모습으로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쩌면 가장 하이엔드에 있는 삶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는 그것으로 인해 느껴지는 행복감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기 대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삶과 결정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 재산은 적더라도 그들이 물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하이엔드에 있는 여유를 누리면서도 더 욕심을 내는 사람들도 분명 있으니까.)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

사람들의 대화를 자세히 들어보면 그 안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의미를 부여한 것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국가]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관념적으로 만든 것인가? [국경]은? [회사]는? [주식]은? 돈을 만든 지폐는 정말 그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만든 것인가? 사실 우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모두 인간이 구역을 획정하고 정의해서 그렇게 여겨지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더 세분화되고 구체화되어서 우리가 사실 그게 왜 모두 시작되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국가]는 언제쯤 생겼을까?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기 몇십 년 전 정도라고 생각하고, 우리나라 역사로 따지자면 조선까지만 해도 사실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만큼 정부의 영향이 크지 않았다. 사실 이 시대에 '작은 정부'를 여전히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이는 '작은 정부'를 처음 주장한 애덤 스미스는 18세기에 살았고, 같은 맥락에 서 있었던 자유주의자인 리카르도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살았는데, 그 당시 정부는 그 역할이 매우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작은 정부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정부는 그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보다 1세기가량 전에 살았던 존 로크는 화폐제도의 존재 자체가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그 시기의 정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정부와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화폐제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취급을 받을까? [국제사회]를 말하고 UN이 있는, 정부가 독립된 주체로 일하고 모든 것을 어떤 형태로든지 통제하는 우리 시대에 우리 기준으로 가장 작은 정부도 애덤 스미스나 리카르도의 기준으로는 거대한 정부, 그것도 엄청나게 거대한 정부다.


우리는 그런 이념적인 '썰'에 좌우될 것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왜 정부가 이렇게 커지게 되었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가는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로버트 노직의 생각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정부 또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보호단체'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주장하고 논증하는 그의 논리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상상해보자. 원시상태에서 개인들이 왜 집단을 꾸리고, 부족을 만들고, 부족들이 모여서 국가가 되었겠나?


사실 우린 '국가'라고 부르지만 조선 이전에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보다 부족 연합체에 가까운 형태를 갖고 있었다. 왕건이 왜 29명의 아내를 둬야 했을까? 그건 그 연합체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조선이 조금 더 국가와 같은 형태를 갖긴 했지만 '추노'와 같은 직업이 있었던 것은 당시에 모든 것이 중앙에서 통제되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당시 시대를 조금만 상상해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왕과 귀족'의 역사이지 '서민과 천민'의 역사가 아니지 않나? 서민과 천민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선시대의 삶도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보다 원시상태에 가까운 면들도 많이 있었다.


'생계'가 핵심인 이유

'국가'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 발전한 것은 그것이 그 구성원들을 더 잘 보호해주고, 그들의 '생계를 더 잘 해결해줄 수 있다'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삶에 정말 뭔가 엄청나고 의미가 부여하고 휘향 찬란한 보물이 있기를 기대하는 분들이 이 부분까지 읽으셨다면 이 말에 화가 나고 내게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이처럼 궁극적으로 '생계'를 해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우리는 그 생계를 해결하는 과정에 본인이 조금 덜 힘들고 고통스러우면서 본인이 더 잘하면서 그것을 하는 것이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아등바등거리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조금 더 얹자면 (1) 그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지속 가능해야 하고, (2) 단순히 생계만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사는 동안 시간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정도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일 테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존재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있게 해 줄 수 있기 위함이다.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의 진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결정되고 해결되어야 한다. 사실 가수들의 저작권이나 작가들의 인세 또한 생각해 보면 이러한 고려 하에서 도입된 제도다. 음악과 글이 사람들에게 주는 행복이 있는데 그걸 만드는 사람들이 계속 그걸 만들려면 생계가 해결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있을지를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 그 두 제도다. 실제로 그래서 법학의 영역에서는 저작권이 재산권인지, 어떤 성격을 갖는 재산권인지에 대한 견해들이 굉장히 다양하게 제시된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그 안에 개성과 성향이 다르기에 모든 사람들이 생계 해결만을 목표로 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계 해결만이 목표가 아닌 사람도 '자신의 행복'이 더 우선될 뿐 그 사람도 결국 생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사실 단순히 돈을 벌고 먹고사는 것만 따지면 나는 지금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지만 나의 '성향상' 그 일을 해서 생계를 해결하면 삶이 더 고통스러울 듯해서 지금 당장은 더 불투명한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의 삶은, 본인이 삶의 의지가 있는 이상 생계를 해결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적, 국가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때도 우린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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