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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우리 사회의 경계들에 대하여

by Simon de Cyrene

통섭. 학문 간의 융합. 이런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당혹스러웠다. 본래 하나로 존재하던 것을 잘게 쪼개서 '학문분야'라는 것을 만들고 나서 그 학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보니 거기에 다시 '통섭'이라거나 '학문 간 융합'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뿐일까?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내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은 한 학문분야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학문만 보면 안 된단 것이다. 법학 논문을 쓰기 위해서 난 사회학, 정책학, 정치학, 심리학, 의학 논문을 읽어야 했으니까. 왜 특정한 법제도가 필요한지, 그러한 법제도를 만드는 것이 인간에게 왜 유익한 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저 학문들에서 연구한 내용을 참조해야만 했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이란 이름이 붙은 학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분야에서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인접 학문'의 연구들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공학은 다르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생물학, 화학, 의학, 물리학이 완전히 구분되는 학문일까? 공학 역시 마찬가지. 경영학은 사실 더 하다. 경영학이야 말로 사회학, 정책학, 정치학, 심리학, 경제학, 법학 등 모든 분야가 다 영향을 미치는 분야이고, 경영학을 깊게 연구하기 위해선 자신의 전공과 접점이 있는 다른 학문들을 모두 공부해야 한다.


인간은 이렇듯 하나로 존재하던 것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잘라내고 나서 그렇게 잘라낸 것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게 있으면 마치 자신의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간주하면서 말이다. 학문 영역에서만 그런가? 아니다. 사람들은 심리적인 면, 신체적인 면과 의지적인 면이 마치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전제하면서 심리적으로 힘들어도 의지를 갖고 이겨내야 한다던지, 심리적으로 힘들더라도 신체적으로 아프지는 않아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심리적으로 힘들다는 이유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나약하다고 비판하고 판단한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우리가 머리와 마음과 몸을 조각내서 관리할 수 없지 않은가? 인간의 몸은 하나다.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마음이 힘들면 몸이 아프게 되어 있고, 몸과 마음이 병들면 의지도 약해지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스트레스가 누적되어서 한 순간에 크게 터지지 않나? 그런데 우리 사회에 일부 존재하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일,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면서 모든 것을 개인의 의지 부족과 나약함 때문인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노오력이 부족하다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은 어떤가? 다른 국가의 기업들도 기본적으로 경영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거나 그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만큼 경영학 전공이나 부전공을 하지 않았으면 취업 자체가 이토록 어려운 국가는 드문 듯하다. 그런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에서 기업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시하는지, 그리고 기업의 구성원을 어떻게 여기는지가 드러난다. 우리나라 기업들 중 상당수는 '그만두지 않을 사람'을 선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밖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회사들이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선호하는 것은 회사를 그만둘 '확률'이 다른 전공을 한 사람보다 낮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회사들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면 그걸 짧은 시간 안에 모방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지만 업계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무엇인가를 개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입식으로 정답을 암기하길 강요받고, 학부에서는 경영학만 공부한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회사가 새로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서비스나 제품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아닐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은 보통 기존의 틀을 깨고, 분리되어 있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나오는데 우리나라 회사들이 선호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틀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러한 경향성이 사기업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더 큰 문제다. 변호사 업계를 보자. 로스쿨에서 배출되는 변호사들의 숫자를 통제 한다한들, 그 덕분에 본인들이 조금이라도 더 벌면서 먹고사는데 얼마나 더 도움이 되겠나? 변호사 숫자는 가파르게 증가하는데... 매년 1500명의 변호사가 새로 배출되든, 2000명 이상의 변호사가 배출되든지 간에 기존의 법조영역은 상황이 더 안 좋아지면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파이를, 변호사들이 새롭게 일할 수 있는 영역을 개발하고 키울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만 아웅다웅거리면서 다투고 있다. 휴전선 이북이 아닌 이남에서 자신들 '업계'를 보호해달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되는 원인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혁신적이지 못한 것과 똑같다. 지금까지 배출된 변호사들은 법 이외에 다른 것은 모르기 때문에.


통섭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 것은 사회가 고도로 발달해서 과거에는 한 분야만 집중적으로 파도 먹고살 수 있었지만 이젠 그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새로운 것이라고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그것이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기존 질서에서 하나만 파서 그 안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이 그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는데 있다. 다른 영역을 알아가는 데는 에너지가 들고, 그 시도를 하다가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 입에서, 그런 성향을 가진 기성세대가 '요즘 것들'이 게으르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당혹스러운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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