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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vs. 취미

by Simon de Cyrene

'취향'이란 표현이 넘치는 시대다. 그리고 SNS를 어느 정도 이상 하다 보면 내가 명확한 취향을 가져야만 내가 쿨하고 힙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인스타를 보고, '취향'을 붙이는 수많은 서비스들을 보면 사실 그 내용이나 콘텐츠가 취향보다는 취미에 가까운 느낌을 꽤나 자주 받는다. '취향'은 사실 이미 특정된 영역 안에서 조금 더 디테일할 때 쓰여야 하는 표현이다. 이런 커피는 내 취향이고, 저런 와인은 내 취향이 아니며, 이런 영화는 내 취향이라거나 나는 고기를 웰던으로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게 취향일 수는 있어도 커피 자체가, 와인 자체가, 영화, 맛집 가는 것 자체가 내 취향이라고 하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 그런 건 오히려 취미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제 처음 커피, 와인을 배우는 단계에도 '취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취미'라는 표현 대신 '취향'이란 표현을 쓸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무래도 '취미'라는 표현은 뭔가 자기소개서 같고, 딱딱하며 평범하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취미'는 소개팅 첫 만남이나 고리타분한 자기소개서에 쓰는 표현이니까.


두 번째 이유는 취향이라는 표현이 갖는 뭔가 조금 더 세련한 듯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취미'란 표현이 아무리 딱딱하더라도 '취향'이라는 표현이 '취미'와 느낌이 비슷하다면 사람들이 그 표현을 쓰지 않겠지만, '취향'은 뭔가 내가 명확한 선호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사실 뭔가에 특정한 선호가 있을 정도로 뭔가를 잘 아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보니 그 표현이 나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기 때문에 그 표현이 사용되는 듯하다.


세 번째 이유는 사회적으로 '나'에 대한 의미가 부각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나'를 화두로 하는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를 찾아서 퇴사를 하고, 나의 적성을 찾아서 일하기를 권유하고, 나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사실 나를 포함한 내 주위 사람들 중에 가장 '나'를 찾아서 인생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바람에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는 '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무례하게 굴거나 상대와 나의 다름을 상대는 존중하도록 요구하면서 본인은 상대의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부작용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게 행동하고 살고 싶다면 사회가 아니라 자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현상에 대해 아주 크게 우려하진 않는다. 이는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전환 과정에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는 다른 사람도 나만큼 소중한 존재이기에 상대도 존중하지만, 이기주의자는 자신을 개인주의자로 포장하지만 자신만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는 면에서 개인주의자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나'를 정의하는 게 쉽진 않다는 데 있다. 사실 나를 찾기 위한 작업은 가능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늦어도 학부시절에 어느 정도 이상 진행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은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도 않고 우리나라 학교는 여전히 그런 것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지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그런 고민을 하거나 그런 교육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취향'으로 포장된 '취미'의 과잉은 위험한 수준에 도달하기 직전인 느낌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취미'를 통해서 정의하려고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는 것만이 삶의 의미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삶에서 가장 의미 있다고 여기며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을 하기 위한 도구 또는 수단으로 여기는 듯한 모습들이 있는 느낌이다. 내가 중요하고 싶고, 나를 알고는 싶은데 힘든 과정은 겪기 싫으니 그럴듯하게 포장된 무엇인가로 나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면서 나를 찾으려는 듯한 느낌 말이다.


그게 지속 가능하다면, 난 개인적으로 그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수준에 가면 취미를 통해 얻는 성취감이나 자기만족에는 한계가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취미를 미친 듯이 해서, 거기에서 내 자아를 찾아 거기에 올인하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건 나의 일이 되어버리고 취미가 일이 되어 버리는 순간 취미로 그것을 할 때의 그럴듯함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는 생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그럴듯함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난 모든 사람들이 취미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생계가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긴장감이 쌓이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고, 사람들은 뭔가 그 스트레스를 풀고 그 문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취미도 없는 사람의 삶은 숨 쉴 구멍이 없음으로 인해 어느 순간 불행하거나 비참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명확한 취미와 취향을 갖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을 넘어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인생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취미가 나를 정의해서는 안된다. 이는 그렇게 되는 순간 취미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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