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박사들이 참 많구나
'하이 브레인넷'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들어갈 때마다 사이트를 설명하는 문구에 들어가 있는 '고급두뇌'라는 표현이 엄청나게 거슬리고 짜증 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선 주기적으로 들어가 볼 수밖에 없는 사이트다.
세상에 고급두뇌, 저급 두뇌가 있단 말인가? 서로 '다른' 두뇌는 있을 수 있어도 두뇌를 그 특징에 따라 상하를 나누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사이트에 들어갈 때마다 하게 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들어가 볼 수밖에 없는 건 그 사이트가 박사학위 소지자들을 채용하는 채용공고를 모아놓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어디에 어떤 자리가 나는 지를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지를 몰라서 힘들어 하던중에 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 박사님께서 이 사이트를 알려주셨고, 그 이후 나는 주기적으로 그 공간을 드나들고 있다.
채용공고가 매일 나는 게 아니다 보니 1-2주에 한 번 정도 들어가던 사이트를 최근에는 매일 들어가고 있다. 이는 강사법이 바뀌면서 대학들이 강사 채용공고를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바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장은 너무 지쳐서 강사를 하고 싶지 않았던 올해 1-2월과 달리 이제는 경력을 쌓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있다 보니 매일 들어가서 각 대학 강사 채용공고들을 전부 들여다 보고 있다.
내 전공이 워낙 특이하고, 딱 내 전공에 맞는 과목을 개설하는 경우는 없다 보니 난 모든 과목명을 꼼꼼하게 보는 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난 이렇게나 많은 수업을 강사들이 한단 사실에 놀라고 있다. 이는 이렇게 많은 수업들을 강사가 한단 것은 박사학위 소지자가 그만큼 된단 의미이고, 강사들이 대학에서 하는 역할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수업 목록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문득 강사들은 학점 당 어느 정도 금전적 보상을 받는지가 궁금해서 강사들 월급을 구글링을 하면서 또 한번 놀랐다. 이는 그 금액이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박사학위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전공의 완전한 전문가는 아닐 수도 있다. 박사학위를 대충 주는 대학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박사학위를 갖고 강의를 준비하고,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직접 강의를 하고 학기 후에는 학교와 학생들 눈치를 보면서 학점을 부여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강사들에게 심한 경우에는 월 30-40만 원 정도의 비용만 지급하는 학교들이 있는 게 말이 될까? 노동착취도 그러한 노동착취가 어디 있나?
박사학위를 가진 강사들은 숫자 자체는 적지 않지만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보면 그 비율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강사들의 인권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강의가 없는 여름방학에는 월급을 주지 않고, 강의 준비와 채점까지 감안하면 중소기업이 인턴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적은 금전적 보상을 주는 대학들 만큼 악랄하게 노동을 착취하는 조직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책이 몇 년 전에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었다. 사실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래, 사회적으로 이런 건 정말 문제야'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러한 강사들의 현실을 보면서 그 책, 또는 그 제목이 너무 상업적이고 자극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더라. 이는 그 제목이 '지방대 시간강사'라는 표현을 써서, 마치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지방대 출신'이라는 약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다른 전공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최근에는 법학의 경우 국내 박사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대학에 임용된다. 이는 최소한 법학의 영역에서만큼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 유학을 반드시 가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 지인 중에 학부, 석사, 박사를 모두 서울대 법대에서 마친 사람이 몇 년째 지방대에서 강사를 여러 개 뛰면서 생계를 해결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문제는 지방대와 명문대의 문제가 아님을 그 분의 삶이 보여준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강사'라는 업종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 바닥을 한 걸음 물러서서 들여다보니, 그 안에 있는 문제들은 꽤나 심각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학문을, 이상을, 이성을 가르쳐야 하는, '상아탑'이라고 불리는 대학이 이렇다는 것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