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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by Simon de Cyrene

법조 드라마가 제작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법을 공부했다 보니 작년에 기획단계에서부터 참여해서 편성받고 제작되고 있는 지금도 작가님을 도와드리는 포지션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쪽은 전혀 연을 맺을 일이 없었다 보니 일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도 있지만 당혹스러운 것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거칠다면 거친 광고업계도 에이전시 레베에서 약 1년 정도를 경험하고 옆에서 봤는데 광고업계보다 더 거칠고, 무질서하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역이 이쪽 같단 느낌이 든다. 그에 대한 얘기는 글로 다 풀어낼 수도 없고, 이제 드라마 하나에 참여하면서 그걸 일반화해서 쓰는 것도 아닌 듯해서 구체적인 얘기는 할 수가 없지만.


그런데 이 업계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호칭이다. 이 업계에서는 처음에는 맡은 직무를 중심으로 호칭을 부르다가, 그 관계가 조금 더 가까워지거나 가까워져야만 하는 관계에 있으면 그때부터 [선배]라는 호칭이 붙는다. 작가가 배우에게, 감독이 배우에게, 스텝들이 배우와 작가와 감독에게 [선배]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것은 그 호칭이 처음부터 그렇진 않단 것이다. 처음에는 성만 따서 0 배우, 0 감독, 0 작가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서부턴가 위계질서를 자신들끼리 만들면서 약속한 듯이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내가 그 표현이 의아하게 여겨졌던 가장 큰 이유는 일단 내가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내용은 이 매거진에서도 풀어낸 바 있는데, 난 우리나라에서 남용되는 [선배]라는 표현이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그 위계질서가 갑질과 연줄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엄연하게 말하면 선배가 아니지 않나? 같은 업계에 먼저 있고, 오래 있었으면 다 선배인가? 다들 프로고 프리랜서라면 대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상대도 그러할 것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선배]라는 표현은 그걸 불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오래 연기했거나 잘 나가는 연기자는 갑이 되고, 작가나 감독도 경력에 따라서는 반대로 갑이 되기도 한다. 연예계에서 들려오는 접대문화 등은 이러한 문화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게 더 정겹고 좋지 않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정겹고 좋아야 하나? 일하기 위해서 만났으면, 일을 잘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표 아닌가? 물론 관계도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선배]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가 항상 불편한 건 아니지 않나? 차라리 일할 때는 역할대로 호칭을 부르고, 사적인 자리에선 나이대로 형, 누나, 언니, 오빠를 하는 게 더 가까워지게 하지 않을까? 그게 되겠냐고? 프로라면 해야 한다. 하다못해 난 지인이 대표인 회사에서 일할 때도 동생인 대표에게 철저히 대표라고 불렀고, 사석에서는 이름을 불렀다. 공과 사는 그렇게 분리되어야 한다.


내가 그 호칭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우리는 '그저 호칭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호칭은 관계가 형성되는데 엄청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마음이 더 열리기도 하고 덜 열리기도 하며, 편해지기도 하고 불편해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기업에서 직급을 없애고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웃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개인적으로는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조금 멀리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게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급을 부르던 것을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평소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할 말은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도 상대에 대한 호칭일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내가 직책을 가졌던 곳에서 일을 그만두면 그냥 형이나 오빠라고 부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 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걸 잘 못한다는데 있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난 그 직책이 끝나면 곧바로 관계를 전환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지를 못하더라. 그렇다 보니 내 주위에는 나는 이제 '형'이라고 부르거나 친구가 되어서 서로 이름을 부르는데 같은 동기들은 여전히 상대를 '간사' 또는 '조교'로 부르는 경우도 경험하고, 난 더 이상 간사도 과장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날 여전히 간사나 과장으로 부르는 지인들도 존재한다. 그 호칭이 아쉽고 싫은 것은, 아무래도 직책이나 직급으로 누군가를 부르면 그 관계가 그 호칭의 무게만큼이나 거리를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를 무엇으로 부르는지는 꽤나 중요하다. 이는 그런 일적인 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단적인 예로 여자들은 남자들이 '오빠'라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남성주의적인 문화라고 하지만, 그건 사실 그 표현이 관계를 사적인 관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배들에게 '형'이란 표현을 쓰고는 했다고 하는데, 남자가 여자 선배에게 '형'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봐라. 왜인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 느낌이 '누나'와는 분명히 다르지 않나? 부부 간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야'라고 하는 것과 '여보'라고 하는 건 두 사람의 관계를 다르게 형성하지 않을까?


호칭은 어떤 면에서는 비본질적이고 덜 중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사실 때로는 비본질적인 것들이 본질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호칭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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