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니지만 중요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지도교수님은 여전히 날 000 조교라고 부르신다. 어떤 이들은 어차피 교수님 제자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교수님께서 나를 '조교'라고 부르시면서 누가 봐도 조교가 해야 할 일들을 내게 시키신다는데 있다. 난 더 이상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지도 않고, 공식적으로 교수님 조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엄연하게 지도반 안에서 나보다 주니어인 친구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하게 되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인간인지라, 그럴 때면 나도 '이건 뭔가' 싶을 때가 있다.
교수님께서 악의를 갖고 나를 여전히 조교라고 부르시는 게 아니란 것은 나도 안다. 역대 교수님 조교들 중에 가장 오래, 무려 4년간 교수님 조교를 했으니 간사나 박사 같은 호칭을 내 이름 뒤에 붙이시는 게 교수님도 익숙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나를 조교라고 부르시는 것이 문제가 없진 않다. 이는 내가 조교들이 해야 할 일을 처리하다 보니 정작 내 연구는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면 박사로서 연구를 해야 하고, 박사로서 성과도 내야 하는데 여전히 조교일을 처리하고 있다 보니 박사로서의 커리어는 쌓이지 못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간다는데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조교일이 별거라고'라고 할지 모르나, 잡일을 함으로 인해서 신경과 에너지가 분산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나비효과는 작지 않다.
내가 '박사'라는 호칭을 듣거나 그런 대접을 받고 싶은 모양이라고 혹자는 생각할지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에서 내가 '박사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프로젝트에서 나는 보조작가로 불리길 희망한다. 그래야 함께 일하는 분들이 나를 보조작가로 대하고, 편하게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속한 프로젝트나 집단 안에서 내가 맡아야 할 수준의 일이 주어질 수 있도록 불리는 것이다.
이런 갈등이 처음은 아니다. 난 한 단체의 '간사'로 일 년 정도 일을 했었는데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날 간사라고 부른다. 본인들이 그게 편하고, 덜 어색하다며. 그런데 사실 내가 간사로 불린 것은 그때 그 역할을 맡았고, 그에 따른 금전적 보상을 받았기 때문인데 역할이 종료된 이후에 내가 그 호칭으로 불릴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 관계에서도 '간사'로 불린 그들과 나의 관계는 '간사'로 고착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 이후에도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친구들과 조차 거리감이 유지되더라. 그게, 참 힘들고 안타까웠다.
이러한 일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영역에서도 호칭은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여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으로는 '씨'는 내가 마치 상대를 하대 하는 것 같아서, '님'은 거리감이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고 사적인 관계에선 그냥 형, 누나, 언니, 오빠라는 호칭을 좋아하는데, 이는 그 호칭들이 두 사람의 거리를 좁혀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친해진 관계에서는 나도 상대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나보다 어려도 상대가 내게 존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은데 그 역시 그래야 그 사람과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편한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편해졌다고 생각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추는 게 필요하기도 하다. 위에서 '존대하지 않는 게 좋다'라고 했지만, 그건 내가 상대와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된 이후의 이야기다. 난 내가 상대와 편하기 전엔 말을 잘 놓지도 않고, 본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게 확인되면 툭툭 말을 놓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호칭과 말은 두 사람의 거리 또는 관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어머니, 아버지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도 내가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쓰다 보니 부모님께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의식'이 작용하는 영역보다 '무의식'이 작용하는 영역이 훨씬 크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생각보다 자주,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요소의 영향을 받아서 작용한다. 호칭, 존칭, 존댓말을 어떻게 구사하는지도 그 요소들 중에 한 가지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현실의 문제까지 영향을 미친다. 작은 것들이지만 호칭, 존칭, 존댓말을 '잘' 구사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