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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by Simon de Cyrene

'네 부모가 이렇게 네 눈치를 봐야겠니!'


힘든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에 부모님께 자주 언성을 높였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정말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서는 따박따박 부모님께 말을 하는 편이었다. 내가 대들기 시작한 것, 또는 우리 집에서 나로 인해 큰소리가 난 지가 몇 년이 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난 못된 아들이었다.


그럴 때면 부모님께선 부모가 자식 눈치를 이렇게 봐야 하냐며, 이젠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겉으로 대들고 언성을 높이긴 하지만 속은 여리고 워낙 엄격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느라 항상 눈치를 보는 게 익숙했던 난 부모님께 그러고 나면, 그리고 부모님께 저런 피드백을 듣고 나면 더군다나 더 죄책감에 시달리고 나 자신을 나쁜 놈이라 여기고는 했다. 첫째들이 많은 경우에 그렇겠지만, 처음 아이를 가져서 아이를 어떻게 대할 줄 모르는 부모님의 미숙함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자랐다.


사실 내가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것은, '난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라는 외침이었다. 그리고 '나 힘들다고!'라는 표현이었다. 어렸을 때 그런 외침을 대드는 방식으로 표현해 왔던 것은 나이가 들어서 조금은 순화되고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어도, 자녀가 얼마나 크고 나이가 들었는지와는 무관하게 자녀를 아이로 보는 부모님의 때로는 필요 이상의 간섭과 판단에 나는 지금도 '종종'이라고 할 수 있을 빈도로 부모님과 부딪힌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난 더 이상 부모님께서 꽤 오래 해오신 '부모가 자식의 눈치를 봐야 하느냐'는 말에 이제는 죄책감까지 느끼진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부모가 자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부모는 자녀에게 본인 마음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그런데 자녀도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렇다면 자녀의 독립성 역시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그 존중의 시작은 어쩌면 '서로' 눈치를 보는데서 시작되지 않을까?


'눈치'라는 말이 뉘앙스가 부정적이어서 그렇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눈치를 보는 것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눈치와 배려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다.


눈치: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

배려: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남을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 상대방의 마음이나 상황을 알아내기 위한 과정이 있어야 한다. 즉, 눈치는 사실 배려하는 것의 전 단계에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만 '긍정적인 눈치'는 '상대방을 위해서' 보는 것인 반면, '부정적인 눈치'는 '상대방에게 내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보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전자는 상대를 위하는 것이지만 후자는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후자가 전자보다 이기적인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을 '상대 때문'이라고 남 탓을 하지만, 사실 그건 본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에 해당한다. 만약 그 시선을 조금만, 종이 한 장만큼만 틀면 그건 상대에 대한 배려의 시작점일 수 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 보통 배려도 잘하는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상호 간에 눈치를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고, 모든 개인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개성대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개성'에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힘들게 하지 않는 선'이란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눈치'는 그 경계를 알아채는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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