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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pr 01. 2020

대화의 화학작용

대화의 원리. 9화

A와 B는 소개팅을 했다. 주선자에게 A는 '대화'가 엄청 잘 통했다며 느낌이 좋다고 한 반면, B는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해 보면 A는 자신의 얘기를 엄청 많이 한 반면 B는 A가 하는 말을 거의 듣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B가 반사적으로 리액션을 하는 성향의 사람이라면 A는 B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있단 생각에 계속 자신의 말만 쏟아냈을 수 있다. 물론, B가 정말로 A의 말이 재미있고 공감이 가서 그렇게 반응했을 수 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간은 누구나 공감받는 것에 대한 필요가 있고 대화는 공감을 주고받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는 사람들은 보통 상대가 내 말을 들어줄 때 그 사람에게 수용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데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이는 남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사람, 심지어는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줄줄줄 쏟아내는 남자들이 적지 않은데, 이는 그들 역시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얘기를 하고 수용받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통로가 그들에게 없다 보니 그렇게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다.


상대와의 대화에서 본인이 정서적, 감정적, 이성적으로 수용 또는 이해받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을 '화학작용이 일어났다'라고 표현한다면,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방식의 대화에서 화학작용은 대화의 당사자 둘 중에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만 일어난다. 친밀한 관계임과 동시에 상대가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 쏟아내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사전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한 사람이 거의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말은 절대로 상대방의 공감, 이해, 수용과 같은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없다. 대화의 주제가 되는 대상이나 상황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내용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상대를 수용한단 말인가?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입장을 수용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자신의 입장을 말하기 전에 전체적인 상황을 상대방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러한 사전작업 없이 '아니 왜 내 말을 이해 못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폭력적인 말이다.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도 상대방에게 만들어 놓지 않고 그걸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경험이 많고 센스가 있는 사람은 구체적인 배경지식이나 상황을 알지 못하더라도 대략적으로 이런 상황이 있는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상대의 문제 또는 감정이 이런 이유로 이렇겠다고 유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공감해주거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이성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보통 경험이 더 풍부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상황이나 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잘 공감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어른'은 흔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대화를 하기 위해 그 이면에 있는 배경 등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다 설명을 하다 보면 그 설명을 하다 지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사람보다 알던 사람, 특히 오래 알던 사람을 만나는 것을 선호하고 편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들과는 함께 알아온 세월이 있기 때문에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 그 이면에 있는 배경과 상황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같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 편한 것 역시 그 사람들은 보통 동종업계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전제하고 현안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화에서 의미 있는 화학작용은 두 사람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말하기와 듣기를 비슷한 수준으로 하면서 티키타카를 주고 받으며 일어난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 회사 동기들의 경우 연수를 받을 때는 전혀 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거나 아이를 갖게 된 이후에 급격하게 친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고 그에 대해 서로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업계에 있거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오지 않았다면,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서 어느 정도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고, 상대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상대방의 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는 노력을 어느 정도 이상 기간 동안 지속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대화에 화학작용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직장 상하급자 간의 대화,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 선생님과 제자 간의 대화에서 어떠한 화학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급자, 부모, 선생님이 상대의 말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을 하는 경우보다 그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이 그 직급일 때, 자신이 학교를 다녔던 시대에, 자신이 학생일 때와 상대가 처한 상황이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급자, 부모, 선생님은 자신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라떼'를 선물하고, 그런 사람들은 '꼰대'라고 불린다.


하급자가 상급자를 만나거나 회식하는 것을 싫어하고, 자녀들이 부모와 대화를 피하고, 학생들이 선생님을 찾아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상대와의 대화에서 어떠한 감정적, 정서적 화학작용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공감이나 이해도 받지 못하고 답정너 상태로 통보만 받는 대화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나를 불편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에 대해서 상대 탓을 하기 이전에 본인의 대화방식을 돌아보고 상대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인, 친구나 가족관계의 경우 상대방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서 본인이 느끼는 '감정적, 정서적 유대감' 또는 호감이 그러한 노력을 가능하게 해 준다. 하지만 그런 유대감이 있다고 해서 상대가 모든 것에 대해 수용, 이해, 공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호 간의 유대감은 다른 관계보다 그러한 노력을 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 주긴 하지만, 그 관계에서도 그러한 '노력'은 필요하다. 연인, 친구와 가족이 정서적으로는 가까울지 몰라도 서로의 현실을 그만큼 지식적으로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친밀한 관계에서도 사소한 것에 대해 서로 자주 연락하고 상대에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가 내게, 내게 상대가 필요할 때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공감하고 수용해주기 위해서. 상호 간의 사소한 소통이 없는 관계에서는 이해, 공감, 수용이 일어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사람의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의 지속 가능한 화학작용을 위해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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