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0대 회상. 10
나는 실패하지 않을 줄 알았다. 20대까지는 그랬다. 난 내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허황된 생각이 아니라 20대까지 난 무엇을 하든 예상보다 잘 되기도 했고, 목표를 세우면 미친 듯이 경주마처럼 최선을 다해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를 믿었다.
그런 자신감, 아니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기에 난 흔들림과 상처는 약하고 게으른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흔들리고 상처 받는 사람들은 나약하기 때문에 흔들리고 상처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흔들리고 상처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오만방자했던 나의 30대는 흔들림과 상처로 가득 채워졌다. 마치 신이 나를 저주라도 하는 것처럼, 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진했는데 30대의 내게 돌아온 건 지인들이 '너 정말 최선 다한 거 맞아?'라고 말하게 되는 결과들 뿐이었다.
불행했다. 힘들었고.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게으른 사람도 아닌데, 나름 심사숙고해서 내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들을 시도했는데, 몸과 마음이 망가져도 전진했는데 아무것도 되지 않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가는 듯한 내 인생이 싫어졌었다. 나를 낳은 부모님도 수 백번도 더 원망했고, 심지어 나를 낳기 전에 어머니께서 유산하시지 않고 그 아이가 태어나서 내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단 생각도 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보고 있는 가족들도 많이 힘들었다. 특히 안정적으로 월급이 나오고 망할 리는 없는 대기업을 다니는 남편과 30년 넘게 살아온 어머니에게 나의 30대는 저주와 같은 시간들이었다. 어렸을 때 집에서 사업을 하다 모든 것을 말아먹은 경험을 하셨다 보니 불안정한 상황을 엄청나게 힘들어하시는 어머니는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내 인생이 다 망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내 인생 하나만으로도 힘든데, 가족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지고 있단 생각까지 더해지니 나의 30대는 고통스럽고,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20대에는 그렇게 저주라고 생각했던 흔들림과 상처와 실패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떤 상태였을지,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생각해 보면 나의 30대를 가득 채운 흔들림과 상처와 실패들이 저주가 아닌 축복이고 선물이었음을 깨닫는다. 과장이라고, 정신승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고 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실패를 하고, 상처를 입었지만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이겨낸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알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30대의 실패와 상처들은 시속 200km로 달리느라 내 몸에 상처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지 못하며 지나온 내 인생에 브레이크였다. 빨리 달리다 멈추면 달리던 관성으로 인해
엎어지고, 엎어지면서 입은 상처들로 인해 다시 일어나 걷기도 힘든 것처럼, 다시 걷기 시작해도 당장 뛰지는 못하는 것처럼, 실패하고 상처를 받은 후유증은 절대 작지 않다. 그것도 꽤나 오래, 오래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km로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주위 사람들과, 풍경들이, 경주마처럼 질주하느라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객관적이 되고, 조금 더 이성적이 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래야 숨을 쉴 수 있고,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가족만 아니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기에 내가 살기 위해서, 버터기 위해서는 그럴 이유를 찾기 위해 버둥거려야 했고,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이성적이 되어야만 했다. 그 시기엔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는데, 내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로 인해 힘들어질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도 반박하기 힘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더 이상 살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확실하고 반박하기 힘든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객관적이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경주마처럼 질주하면서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내가 목표로 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인생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희미하게 '그런 것 아닐까?' 정도로 했던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확실해졌고, 10년 가까이 터널을 지나오다 보니 이제는 그 생각이 거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예전보다는 조금은 더 좋은 사람이 된 듯하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나의 가장 오만하고 엉망진창이었던 시절을 아는 가족이 '너가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사람이 되긴 했지'라고 할 정도면,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예전보단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는 있지 않을까?
터널을 들어갈 때와 비교했을 때 기나긴 터널을 지나온 후, 이제는 거의 그 터널 끝에 있거나 터널을 갓 나온 상황인 것 같은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내가 불편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보이면 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 같은데, 터널을 지나면서 내 안에 있는 여러 모습과 상처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 이후에는 어떤 사람도 함부로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의 특정한 면이 어떻게, 왜 생겼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거나 모든 게 괜찮단 것은 아니다. 나도 나를 불편하게 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들이 당연히 있다. 하지만 과거엔 그런 불편한 것들 하나, 하나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했다면 이제는 그저 나와 맞지 않는 면으로 여기고 피하게 되었단 것이 과거와 터널을 지나온 지금 나의 가장 큰 차이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때로는 신경안정제를 한 달 내내 먹어야 했고, 정신과 전문의인 친구가 정신과 치료받은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가장 가까운 가정의학과에 가서 이런저런 약을 처방받으라고 했을 정도로 나는 내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면서 버텨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만약 내게 과거로 돌아가서 터널로 들어가기 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갈지를 묻는다면 난 기꺼이 다시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겠다. 이는 첫 번째로 내가 과거의 내 모습으로 계속 살았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가 보이는데 그런 내 모습이 싫기 때문이고, 그것보다 더 결정적으로는 내 관점과 시선의 변화로 인해 내가 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지금 내가 인지하는,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터널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인식하고 있었던 세상보다 좋고, 더 나가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내가 과거의 나보다 더 좋다. 그렇기 때문에 난 다시 얼마간의 힘든 시간을 보내더라도 기꺼이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받거나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건강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유년기를 보내지 못한다. 경쟁과 무엇인가를 쟁취하는 것이 가장 선한 것으로,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세상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우리가 우리 윗세대와 사회적으로 강요받는 시선이 아닌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어야만 한다. 어떤 이들에겐 그 계기가 조금은 말랑말랑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나처럼 기나긴 터널을 지나와야만 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고, 인지하고, 인식하는 시선이 바뀌기 위해선 우린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치러야만 한단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나 좌절하는 과정을 통해 그런 관점의 변화를 경험한다.
물론, 실패와 상처를 경험하고도 바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 글을 중간에 읽다가 창을 닫고 내 계정 구독을 취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생의 실패와 상처들은 우리가 그 경험을 잘 버텨내면, 어떻게든 이겨내면 그 경험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단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겸손하고, 존경할만하거나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그런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그렇다고 해서 실패와 상처를 경험하고 있는, 아직 그 쓰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넌 좋은 기회를 잡은 거야!!'라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상처 난데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은 짓이니까. '잘 버텨내라'라고 말하고 싶다. [잘] 버텨내라고. 이 악물고. 그러다 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인식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보이고 세상은 조금은 더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거라고. 그리고 힘든 건 너무 안에 담아두지만 말고 어딘가에, 누군가에게는 쏟아내라고. 그래도 된다고. 아니, 그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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