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0대 회상. 9
거짓말이었다. 마흔이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은 거짓말이었다. 따라서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는 40대가 되지 않으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나이가 들면 덜 흔들릴까?'라는 희망에는 찬물을 끼얹을 수밖에 없다. 40대가 되어도 인간은 똑같이 흔들리고, 똑같이 불안하며, 똑같이 '혹'한다.
아니, 개인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흔들리고, 불안하거나 '혹'한 면도 있었던 것 같다. 나의 20대와 30대는 꽤나 과감했고, 도전적이었고, 하나의 목표에 집중해서 달리는 순간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건 현실을 그만큼 몰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30대 초중반에만 해도 난 세상을 꽤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그런데 세상을 어느 정도 이상 알게 되자 더 흔들리고, 불안하고, '혹'한 면들도 있더라.
그렇다고 해서 나이 든 게, 40이 된 게 무조건 나쁘단 것도, 모든 면에서 더 흔들리고 불안하거나 '혹'하는 것도 아니다. 40이 되니, 아니 사실 40이 되어서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은 아니고 30대 후반 정도부터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되어온 것 같은데, 확실히 포기할 건 포기하게 되고, 아닌 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20-30대의 난 정말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어 했다. 부와 명예와 권력에 나를 더럽히지 않는 선함까지. 대놓고 그렇게 원했다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에 나의 사고방식, 삶의 자세와 태도를 분석해 보면 내 안에 그런 마음이었었던 것 같단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나는 꽤나 경쟁적이었고, 이루지 못한 것들에 분노했으며, 성취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때로는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어도 남이 가진 걸 보면 부럽고 갖고 싶어지기도 했다.
30대 후반에서 40까지 되는 과정에서 그런 것들은 많이 없어졌다. 우선 내가 딱히 갖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면 누군가가 뭔가를 성취하거나 갖게 되어도 부럽지 않기 시작하더라. 예전에는 남들이 결혼만 해도 부럽고, 내 짝은 어디 있나 싶었지만, 이젠 내가 호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결혼하는 게 아니면 그렇게까지 부럽단 생각이 들진 않는다. 심지어 아는 형이 13살 연하의 형수님과 결혼을 했을 때도. 또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갈 형편도 되지 못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골프장에 갔을 때 그다지 재미가 없었던 기억과 지금도 흥미가 가지 않는 골프를 치러 가고 싶단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음식도 예전에는 맛있다고 하면 무조건 먹고 싶었는데, 이젠 그렇게 유별나게 맛있는 음식들이 많지 않고 TV나 후기들은 과장된 게 많다는 것을 알다 보니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한 번 가보지 뭐'라고 생각하며 메모를 해 놓는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갖고 싶지 않아 할 수만 있어도 삶이 꽤나 평안해지더라.
정말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나의 30대가 '나는 어떤 사람이지?'라는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30대엔 그럴 수밖에 없는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이 나를 행복해하고 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가야 행복한 사람인지를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게 정리되고 보니 내가 더 많은 것을 갖게 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질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반면, 네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욕구와 욕망이 확장되지는 않고 그 초점이 명확하게 맞춰진 듯하다. 그렇다 보니 내 욕구와 욕망의 범위 내, 나라는 사람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밖에 있는 것들은 잡기 위해 이를 악물지만 그 밖에 있는 것들엔 관심을 덜 가질 수 있게 된 듯하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내가 운이 좋게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좋은 것들을 어렸을 때부터 직간접적으로 누려온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학부를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회사가 계열사 호텔에서 부모님 초청행사를 열어주고, 부모님과 신입들을 모두 호텔에서 숙박하게 해 줬는데, 그게 그렇게 크게 감흥이 없더라. 엄청 기대를 했었는데, 그 순간 느끼는 기쁨과 뿌듯함이 얼마 가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허무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또 우리 집은 평범하지만 어쩌다 보니 주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지인들이 많은 편인데, 그들 덕에 경험한 '비싼 것'들에도 나는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곤 했었다. 반면에 그런 경험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벌어야 하는 돈, 그 돈을 위해 내가 노력을 들여야 하는 영역 등을 계산해보니... 그냥 지금 이대로가 더 행복한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
물론, 난 운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엄청난 부자도 아니었지만 크게 부족함도 없이 자랐기에 물질이나 성공에 대한 결핍이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20대와 30대는 욕구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나는 또 운이 좋게도 딱 그 시기에 그런 것들을 손에 쥐지 못하고 나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패에 실패만을 반복했으니까. 그렇게 20-30대를 지내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정리되고 내 인생과 가치가 조금은 더 명확해져 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이 되었다고 흔들리지 않는, 혹하지 않는 것은 아니더라. 정확히 말하면 잔잔바리처럼 흔들리는 것들은 적어졌지만, 워낙 큰 문제에 대한 더 큰 흔들림은 있다 보니 흔들림의 강도는 오히려 더 강해진 느낌이다. 이는 20-30대의 실수나 실패는 체력도 되고, 나이도 어리니 금방 일어나서 다른 기회를 잡아보면 됐는데 나이가 들수록 실수와 실패의 대가가 커지는 것이 눈에 보이고,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단 나이가 들면 현실적이고 물리적으로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게 현실이니까. 체력도 과거만 못하고...
그렇다 보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흔들림은 40대가 되어 오히려 훨씬 커진 느낌이다. 이제 좀 인생의 무게도 알고, 내가 한 선택에 어떤 대가가 있을 수 있는지를 어느 정도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흔들림의 크기와 깊이는 분명 과거보다 깊어졌다. 그리고 느낌적인 느낌으로 이 흔들림은 타고난 게 많거나 이미 죽을 때까지 먹고살게 어느 정도 모인 사람이 아니라면, 노년이 보장된 사람이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계속될 듯하다.
만약 40대가, 나이가 든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어쩌면 그 사람들이 그만큼 포기한 게 많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법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체력이 떨어져서 새로운 일을 벌리지 못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 보이는 것은 아닐까?
40대가 되어도 흔들린다. 나도 그렇고. 내 주위 40대들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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