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입에 달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면접에서도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산다'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때 면접관에게서 돌아온 답은 '000 씨는 굉장히 행복에 집착하시는 것 같네요. 행복하지 않으신가 봐요.'였다. 한방 맞은 느낌에 그 후 면접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면접 결과도 뻔했다. 하지만 면접 결과보다 그 한 마디가 더 충격적으로, 깊게 마음에 박혔다.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통상적인 한국사회의 기준으로 실패한 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재수를 했지만 휴학 한번 하지 않고 군 복무까지 6년 만에 학부를 졸업하고, 당시에는 선호하는 기업 1, 2위를 다투고 지금까지도 5위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회사에 다녔으며, 좋은 대학 로스쿨까지 입학한 상태였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당시에 꽤나 행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고, 그 면접을 본 곳도 내게 맞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는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면접에서까지 '행복'을 꺼내 쓴지도 모르겠다.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스스로에게 과도할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학부를 졸업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후배들이 나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하더라. 내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기준은 안쓰러울 정도로 엄격하고 높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보다는 낮은 기준을 들이대지만 그 기준마저도 보통 사람들보다 높았던 사람이라고.
내가 그런 말을 한 사람은 그 후배가 처음이 아니었다. 언젠가 고백을 받은 적 있냐는 질문에 '나는 특출 나게 잘생긴 것도, 키가 크지도 않다 보니 그럴 리가 없잖아'라고 했더니 한 여자 후배가 '오빠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빈틈이 안 보여요. 오빠한테 호감이 생긴 사람도 다가가지를 못할 정도로 자신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같아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힘 좀 빼고 살아요.'라고 하더라.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어떤 느낌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호감을 갖고 있던 친구에게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한참의 침묵 끝에 사실은 2년간 내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본인과 친한 친구들은 다 그 사실을 안다는 얘기를 했던 친구가 있던 걸 보면 내가 정말 빈틈이 보이지 않는 팍팍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그런 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열심히 사는 사람이고 자신을 굉장히 아끼는,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사람과 친해지기 힘들 것 같은 벽이 느껴지더라.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나이스하고 매력도 있는 사람이어서 처음에는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그 사람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뭔가 본인이 너무 본인으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은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삶 안에 들일 여지가 없어 보이는 느낌을 받으면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말하는 '빈틈이 없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 됐다.
건강한 자아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아가, 자의식이 과잉되는 것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온 세상이 자신 중심으로, 자신의 것부터 생각하는 것은 사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경계선에 있는데 이는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다가가기는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30대 초중반까지의 나는 내 인생에 진심이었고, 내 세상에 최선을 다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품고, 챙기고, 이해할 줄은 몰랐다. 다름과 틀림의 다름은 알았지만 다름을 포용할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항상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단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본인 중심으로 바라보다 보면, 본인 안에만 집중하고 주위를 보지 못하면 그 시선의 편협함으로 인해 자신이 보는 세상이 왜곡되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단 것이다. 때로는 내가 생각하고 인지하는 내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내 모습이 더 본질에 가까울 때도 있고, 본인이 모르는 자신의 모습과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그런 노력을 해야만 균형잡힌 시선과 사고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포용력이 어느 정도 생긴 건 내 인생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실패를 하고, 힘들어하면서... 빈틈없는 사람으로 살 때는 입 밖에는 내지 않았어도 속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했던 사람들보다 더 무너진 모습으로 살아가면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품을 수 있게 됐다. 내 인생에 생긴 금이, 그 금으로 인해 생긴 빈틈이 처음에는 나를 무너뜨릴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그 빈틈 덕분에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다름을 다름으로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더라.
내 안에 생긴 그런 빈틈을 우리 가족은 '사람 됐다'라고 표현했고, 내가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해서 안타까웠다던 후배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말랑말랑해졌냐'라고 하더라. 후배는 내게 나이 드는 것 같다고, 예전으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나는 말랑말랑한 내가 조금 더 좋았다.
과거에는 '나'로 세상을 채우는 게, 세상을 '나' 중심으로 움직이는 게,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게 행복을 담보해 줄 것이라 믿었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이 주는 행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자아에, 자의식에 금이 가고 생긴 빈틈 덕분에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나도 조금 더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게 되면서 그런 행복은, 나 자신만으로 공간과 마음을 가득 채운 행복은 그런 빈틈으로 밀려들어오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란 것을 알게 됐다.
어제는 정말 친한 형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 어찌 보면 나보다는 상황이 낫고, 또 어찌 보면 나보다도 힘든 상황에 있는 그 형에게 전화로 2시간 넘게 잔소리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면서 그 형이 고맙다고 하더라. 내 마음 이해하고 챙겨줘서, 위로의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
전화를 끊고 내가 했던 말들을 되뇌어 봤다. 잔소리를 한 것은 맞는데, 나는 결국 인생 별 것 없다고, 지금은 돌아가는 것 같아도, 다른 길로 가면 지금까지 쌓은 게 무용지물이 되는 것 같아도 어디에서든 최선을 다하면 그게 결국 어떻게든 다시 쓸모가 있게 되더라고 말했더라. 내 인생을 한 땀, 한 땀 돌이켜보면서. 내 인생을 보라고, 지금 내가 이 정도로나마 살 수 있는 건 결국 언젠가 최선을 다했던 것들이 돌아왔기 때문인 거 알면서 왜 그러냐면서.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갖고, 펼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인가를 하는 게 가장 큰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험해 보니 절대 그렇지 않더라. 그것들이 주는 행복과 만족감은 있지만 그 효용은,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아물었지만 어딘가에 남아있는 내 과거의 상처가, 상처가 생길 때 생긴 금이, 그리고 그 금으로 인해 만들어진 빈틈이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을 때 밀려오는 행복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큰 감정들이야말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고, 살만하다고 생각하게 해 주더라.
그렇게 빈틈이 없는 사람일 때 나는 내가 자아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돌아보니 나는 속에 상처와 열등감으로 가득 차서 그걸 숨기기 위해 빈틈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며 내 안에 있는 공허함을 무엇인가를 넣어서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은 뭔가를 채우고, 더 가지고 넣는다고 해서 채워지지 않더라. 겉은 화려해져도 내면은, 저 깊은 곳은 텅빈 곳간처럼 휑한 것을 경험했고,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다.
진짜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자신 안의 상처와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고, 필요할 때는 그것을 빈틈 사이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다. 만약 본인이 계속 나, 나, 나, 나만 얘기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건 어쩌면 본인 안에 있는 해결되지 않은 상처, 부족함과 어떠한 이유에서든 존재하는 열등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처와 아픔과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게 있다고 약한 것도,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상처와 아픔과 부족함은 그걸 받아들이고, 비슷한 상처와 아픔과 부족함이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같이 공감하면 행복이란 표현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벅찬 감정이 밀려오고 나를 채우는 것을 나는 경험하고, 또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 감정을 느끼고,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만약 지금 그런 상처와 아픔과 부족함에 허덕이고 있다면, 잘 버티시길 기도한다. 이는 지금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또한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그 시간을 잘 버텨내면 그것이 남긴 흉터는 당신에게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선물해 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리고 있는 그 선물을, 당신도 언젠가 누릴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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