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재지 논문 투고를 마쳤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 딱 3년이 되었는데 처음이다.
학계에 있지 않으신 분들은 이 얘기에 무덤덤하겠지만, 박사학위를 받고 학계에 계신 분들은 '정신 나간 사람 아니냐?'라고 할지 모르겠다. 인문. 사회계열의 박사라면 더더욱. 박사들은 보통 직장을 잡으려면 자신의 연구실적으로 일종의 경력을 증명을 해야 하는데, 등재지 논문실적이 없으면 경력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등재지 실적이 하나도 없는 건 마치 이력서 한 줄도 없으면서 경력직에 지원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박사학위를 받고 3년 동안 당연히 쓰려고 했다. 쓰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도저히 써지지를 않더라. 사람들은 박사학위를 받고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쓰는데, 관심 없고 마음이 없어도 20-30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을 찍어내기도 하는데 난 그게 도저히 안되더라. 심지어 작년에는 지도교수님이 공저로 논문을 쓰자고 하신 주제 하나,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한 연구용역과제의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해서 논문으로 내자고 하신 것 두 개. 거의 입에 넣어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쓰지를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이유 때문이었다. 관심이 없어서 마음이 가지 않는 주제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주제는 교수님께서 던져주신 것이고, 연구용역과제는 돈을 받으니 하긴 했지만 그 역시도 내가 특별히 관심이 있는 주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보니 100페이지 전후가 되는 보고서를 작업하고 나서 보니 다시 들여다보기도 싫더라. 여기에 더해서 현실적으로 생계를 위해서, 당장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보니 돈이 되기는커녕 게재료를 내면서 투고해야 하는 논문 작업은 계속 밀리게 되더라.
사실 이번에 논문 작업을 해서 투고한 것도 우연히 발견한 원고 모집 공지에서 콕 집어서 내 전공 관련 논문을 기획논문으로 모집하고 게재가 될 경우 게재료를 면제해준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작년 하반기부터 '아... 이제는 관심이 안 가는 주제의 논문들도 써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내가 발표는 안 했지만 수년 전에 연구용역에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했던 주제와 연결고리가 있는 분야였다. 수년 전에 썼던 글들을 오랜만에 다시 열고, 가족여행 중에도 저녁에 자료를 보고 지필 작업을 하다 못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2-3시간 자면서 가까스로 투고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3년간 연구를 안 한 것은 아니다. 1년 차에는 등재지 실적이 인정되지 않는 학술지에 여러 가지 이유로 논문을 실었고, 작년에도 학술대회 한 곳에서 발표를 했으며, 3년 동안 꾸준히 연구용역과제는 하고 있었다. 신진연구자로 내 개인과제를 한 것도 있었고, 지도교수님과 공동연구로 참여한 것도 있었다. 등재지 연구실적이 없었을 뿐이지 나름의 연구는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논문을 쓰지 않고, 아니 못하고 있었을까? 사실 이 바로 윗 문단까지는 논문 투고를 한 다음날인 어제 쓴 거고, 이 문단은 오늘 쓰기 시작했는데, 어제를 지나면서 확실히 알았다. 몇 년간의 수험생활,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 하나에만 집중한 2년의 후폭풍이 컸던 것 같다. 그때의 힘들었던 감정들이 남아 있었고, 논문을 마무리하고 나서 진이 빠지는 경험이 논문을 시작하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했던 연구들은 발표를 해야 하니까,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니 스스로를 밀어붙였지만 논문은 그렇게 강제하는 게 없다 보니 쓰지 못했던 게 아닐까.
브런치에서 글은 계속 썼지만 아무래도 브런치에서 쓰는 글과 논문은 다를 수밖에 없다. 논문은 문헌들도 계속 참조하며 한 땀, 한 땀 써 내려가야 하고 길이도 기본적으로 20장 전후이기 때문에 '하나의 글'을 완성시킨단 측면에서 논문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월등히 클 수밖에 없다. 그런 글을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쓰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스펙을 쌓아서 어디에든 취업하려는 목표가 있으면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펙을 쌓는다고 생각하고 뭔가를 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못하던 성질머리다 보니... 논문이 그렇게 쓰여지지는 않았다.
어느 분이 내게 '글은 너한테 뭐니?'라고 물어봤던 적이 있다.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나의 일부를 떼어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렇다 보니 스펙을 위한 글은 도저히 써지지가 않더라.
그저께 논문을 투고하고, 어제 하루를 보낸 후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 정도 후폭풍이면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나의 일부를 다양한 형태로 가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젠 그게 다시 되는 상태이기를 바란다.
ps. 여러가지 상황상 브런치에 글을 도저히 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보니 일주일 정도 들어오지를 못했네요. 일단은 브런치에서 쓰는 마지막 해라고 선언한 해의 벌써 두 번째 달이라니... 하루, 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다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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