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

by Simon de Cyrene

확신.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다 보니 많이 들었던 표현이다. 구원의 확신, 믿음의 확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등등등...


어렸을 때부터 그 표현이 불편했다. 마치 그런 확신이 없으면 내가 이상하고, 믿음이 작은 사람처럼 취급되는 분위기 속에서 내 안에는 의심이 가득했고 '다른 사람들은 이게 그냥 이렇게 믿어진다고?'란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양가가 모두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교회 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고, 또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는 편이다 보니 교회에는 열심히 나갔지만 항상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런 와중에 주위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거나 믿음의 확신이 있다며 교회에 올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부터 20-30년이 지난 지금 내 주위를 보면 그때 그렇게 확신이라 외쳤던 사람들 중에서는 아예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고, 종교적인 관심이 확연하게 줄어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의심하고, 확신이 없었던 내가 가장 종교적인 색이 강한 사람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의심하고, 더 알아보고 고민하며 여러 자료들을 찾아다녔다. 다른 종교도 들여다 보고, 씨름하며 20-30년을 보내는 과정에서 특정 종교나 믿음에 대한 의심이나 확신보다는 '신이 있다면 00은 00할 듯하다'는 생각들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교회'나 목회자가 말하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아니라 '개신교'와 '개신교의 성경이 말하는 것을 찾아다녔다. 여기에 더해서 필요할 때마다 상황적으로 교회도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성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다 보니 물음표와 의문들이 느낌표와 답안지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내가 의심하지 않았다면, 고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확신'이라는 나만의 믿음을 너무 견고하게 가지고 있었다면 그 견고한 생각이 강하게 도전받고 흔들리게 된 순간, 내가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기독교 자체를 떠났을 것이다. 어렸을 때,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을 때는 그렇게 믿음과 신앙에 확신이 있었던 사람들이 교회를, 기독교를 떠나게 되어버리는 것도 부실한 기초 위에 형성된 확고한 확신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든 형태의 '확신'들이 그렇다.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으면, 경험이 아니라 느낌으로 믿고 들어가면 실망하고 배신당하게 되어있고, 자신을 너무 믿어도 다른 요소의 영향을 받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이는 세상에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있고, 우리가 갖는 '확신'의 대상은 그런 변수 중에 한 두 가지만 무너져도, 전제가 깨져도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가장 위험한 확신 중 하나는 투자가 아닐까? 특정 주식, 부동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코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투자를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분산 투자'라는 것도 결국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말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세상 어떤 것도 100% 믿을 수는 없으니 리스크를 분산시키라는 것은 결국 확신을 갖지 말라는 얘기다.


'오빠 믿지?'라는 고전 멘트 역시 마찬가지. 오빠가 뭔데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둘 사이에 확신이 없단 것을 의미한다. 이 멘트가 폭력적인 것은 확신이 없는데 확신을 강요하면서, 그 확신이 있어야 본인을 사랑한다는 것처럼 사랑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오빠 믿지?'라는 말에는 당당하게 '당신과 나 사이에 뭐가 그리 많아서 내가 당신을 믿을 수 있냐?'라고 되물어야 한다. 당신이 내게 확신을 줄만한 행동을 한 후에 그런 말을 하라고, 아니 그 정도 확신을 줬으면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냐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확신을 갖는다고 쉽게 말하는 건 위험하다. 확신에 찬 말을 하나 가득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도 위험하다. 이는 세상에는 확신을 가질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신이, 지인이 확신을 가지고 했던 선택 중에 믿었던 결과가 그대로 나온 일이 몇이나 되나? 몇 가지는 당연히 있겠지만 모든 일이 확신한 대로 흘러가는 사람은 없다. 이는 세상은 사람들의 결정이 모이고, 상호작용하면서 돌아가는데 세상에는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누가 어떤 의사결정을 할지를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업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 우리는 사업이 성공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을 100% 확신하는 건 불가능하다. 반대로 예상하지 못한 수준의 성공을 하는 사업이 있고, 또 반대로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한 게 실패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정말 믿을 수 있었던,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자신이 코너에 몰리고 자신이 힘들어질 듯하거나 배신하는 것이 자신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따라간다. 사람은 대부분이 그렇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매우, 극히 드물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우리 삶은 불확실하고, 불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고, 안정적인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완벽하게 100%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올라온 인터뷰 영상에서 추신수 선수가 '돈을 많이 번 후에는 사람을 오히려 잘 믿지 못하고 벽을 세우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는 말에 많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확신'을 잘 말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확신'이 생겨야 결혼을 할 수 있을 듯하단 생각을 했는데, 그런 기준을 갖고 있으면 결혼은 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기더라. 다른 모든 것도 그렇지만, 연애와 결혼도 결국에는 결단이고 일정 수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상대가 정말 좋은 사람이더라도 막상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상대도 본인이 몰랐던 본인의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게 현실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결혼을 '결단'할 때는 결혼생활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단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노력하며 맞춰가겠다는 생각을 두 사람이 모두 한 상태에서 하는 결혼이 '건강한' 결혼이 아닐까?


확신이 강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거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확신이 과도하게 강한 사람은 오히려 깊게, 많은 고민을 해보지 않은 아마추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 링 안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주먹을 마구 휘두르다 그 움직임을 읽은 상대가 빈 곳에 카운터를 계속 찔러 넣은 주먹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신중을 기하며 상대를 파악하는 데 신경을 쓰다 결정적인 빈틈에 주먹을 찔러 넣을 것이다. 정찬성 선수 유튜브에서 진행되고 있는 '좀비 트립에서 오히려 격투기를 배운 사람들이 프로를 상대로 주먹을 내지도 못하는 것은 그들이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확신을 갖지 못한다고 그 사람이 나약한 것도,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단 것도 아니다. 그건 오히려 그 사람이 진중하고,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직 확신이 없어도 확신을 갖기 위해 조금 더 알아가고, 노력하다 보면 그런 사람들에게도 일종의 확신 게이지가 차기 시작할 것이고, 그 확신의 게이지가 100을 채우는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시간과 경험을 통해 차곡차곡 쌓인 확신에 대한 게이지는 부실한 기초 위에 세워진 확신보다 훨씬 단단하고 견고할 것이다.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경험치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의 경험이 모두 필요하다. 운동에서 생각해보자. 어떤 종목이든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운동과 실전을 통해 능력치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선수가 항상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와 경쟁을 할 때는 상대의 능력치와 특성을 알아야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반복되면 '상대에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생길 수 있다. 격투기에서 한 선수에게 한 번 이겨도 두 번째 경기에서는 지고, 세 번째 경기에서는 다시 결과가 뒤집히기도 하는 것은 상대를 경험하면서 맞춰나가기 때문이다. 세 번을 이겼다고 해서 네 번째도 이길 수 있다고 100% 확신할 수 있을까? 프로라면, 겉으로는 그런 척을 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준비할 것이다.


확신이 생겼을 때, 확신을 갖게 됐을 때 움직이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생은 수많은 결정들이 모여서 만들어지고, '결정'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어느 정도로 리스크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확신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은 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단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확신이 생겼다면 결정을 하고, 그 후에 직면하게 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ps. 누군가 내게 '당신은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냐?'라고 묻는다면,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는 없다는 것에는 확신이 있다고는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난 여전히 조금 더 강한 확신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지만 내가 죽을 때도 그 방향으로 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은데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겠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진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고,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다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가 된 사람들의 책이나 영상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생각을 곱씹고 반박해 본다. 그 질문에 대해서 내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은 '아직까지는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고, 다른 진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설득되지는 못했고, 내가 해 온 고민과 검토한 자료들에 비춰봤을 때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을 듯하다'는 것뿐이다. 내가 가졌던 많은 확신들이 너무 자주, 많이 무너졌기 때문에 거기에 '확신'이라는 표현을 쓰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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