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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선택받은 자'의 허와 실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4편

by Simon de Cyrene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은 '선택받은 자'이고, 교회 다니지 않는 자들은 '나머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자신은 마치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여기거나 그걸 전제로 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다. 그중에 극단적인 사람들은 '난 죽어서 천국에 가지만 넌 지옥에 갈 거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게 왜 말이 안 되는지는 이 시리즈의 이전 글들에서 이미 얘기를 했으니 거기까지만 짚고 넘어가겠다.


그들의 말은, 생각은 맞을까? 틀릴까? 맞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거기에서 파생되는 결론은 틀렸다. '선택받은 자'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 본인이 우월하다는 건 틀렸다.


그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성경에 '선택받은 자'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펴보자. 성경에서 '선택받은 자'라는 말은 대부분 하나님이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는 자에게 '괜찮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라'라고 할 때 나온다. 그 대표적인 구절로는 요한복음 15장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는 구절이 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서 43장에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는 말씀이 '선택받은 자'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의 경우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가 마치 '하나님만 받으면 원하는 건 다 줄게'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건 잘못된 해석이다. 성경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주리라'는 전체적인 맥락에 비춰봤을 때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너의 마음이 되었을 때 구하면'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하면 준다는 것은 '다 줄게'가 아니라 '일단 내 안에 거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가깝다.


왜 그래야 할까? 왜 하나님 안에 먼저 거해야 할까? 이는 그래야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무엇이 진짜로 나를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독약이 정말 예쁜 병에 들어서 먹음직해 보여서 당신의 아이, 아니 당신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한 아이가 그 독약을 달라고 하면 당신은 그 아이에게 그 독약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 우리를 위해서 좋거나 나쁜 지를 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세상을 우리의 욕정, 욕망,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시선을 봤을 때 무엇이 진짜 가치 있고 좋은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성경의 전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또는 신은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주지 않으시겠단 것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태에서 구하라'의 의미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경험을 굉장히 많이, 자주, 반복적으로 해왔다. 인생에서 거대한 실패를 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했고, 그 과정에서 아주, 매우, 잠시 (일주일 정도) 진지한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실패는 사실 내게 축복이었더라. 내가 그때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래서 내가 꿈꾸던 길을 갔다면 나는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며 일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었겠더라.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왜 몰랐냐고?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다. 자타공인 생각이 엄청나게 많고 진지한 편이고 당시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보니 내 나름대로 진지하고 깊게 고민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당시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더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성취가 내게도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고 나는 사실 그런 것들을 향해 달리면서 '나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여기고 있었더라.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사회적으로(교회에서 쓰는 표현으로는 '세상적으로') 성공이라고 여기는 것을 달성하지 못하고 나서야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게 맞는 일들이 들어오고, 인생이 내가 갖고 있는 성향과 능력에 맞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왜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건 성경을,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한 것이다. 신이 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면 신이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는데 당연한 게 아닐까? 자동차를 직접 만든 사람이 차의 구조를 잘 아는 것처럼?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는 살아가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생각하고 고민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현실의 문제들에 구속되어 그런 고민을 거의 하지 않고 산다. 아니, 그런 고민을 깊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인지, 우리의 성향과 경향성 중 어떤 것이 '타고난 것'이고 어떤 것이 '학습된 것'인지를 알기가 힘들다. 이는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장환경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의 영향을 다양한 형태로 받으며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걸 알기 위해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하나, 하나 복기하면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를 분석하면서 내가 '타고난' 것과 '학습되고 영향을 준 것'을 분리하고 분류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럴 여유도 없고, 여유가 있으면 또 굳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쓸 사람들을 '광야'로 부르신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광야'를 그저 '힘든 시간'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잘못된 이해다. 광야는 그저 '힘든 시간'이 아니다. 광야가 그저 힘든 시간이라면 우리 인생은 전부 광야여야 한다. 이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게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광야'는 하나님, 신과 1대 1로 마주하게 되는 시간을 말한다. 인생이 앞으로 가지 않고, 멈춰 있는 시간. 뭘 하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안 되는 시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하나님만을 보게 되는, 하나님만 붙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시간이 광야의 시간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이런 시간을 거쳤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요셉도, 다윗도, 예수님도, 바울도 그랬다. 하나님이 그들과 그런 시간을 가지신 건, 인간은 그런 시간이 아니면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고 사고하며 알아가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선택받은 자' 얘기를 하면서 왜 광야 얘기를 하는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야 말로 제대로 '선택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선택받은 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사후에 천국을 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어떤 상황과 고난과 핍박에도 복음을, 하나님을, 예수님을 전하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선택받은', 소위 말하는 '특별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성경적인 의미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더 우월하거나 무엇을 많이 알거나 뛰어나거나 더 선하지 않다. 다윗을 보면 알지 않나? 그는 자신의 충신을 사지로 몰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한 자가 아닌가? 그런 그를 어떻게 더 선하다고 할 수 있나?


성경에 나오는 '선택받은 자'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요한복음과 이사야서에서 '선택받은 자'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도 그들이 앞으로 가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그 길로 가. 내가 그 길로 갈 사람으로 너희를 선택했으니 괜찮을 거야'라며 안심을 시켜주고 계신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선택받은 자'들이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런 일을 하는 일종의 특별 소명을 받은 자들만 선택받은 자들일까? 아니,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특별 소명'이란 말이 우습다. 어떤 것은 특별한 소명이고 어떤 것은 아닐 수가 있을까? 그런 구분은 지극히 인간적인 구분이다. 우리가 하는, 맡은 일에는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그걸 당시에 낮은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보여주셨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을 수는 있지만 어떤 것에도 우열이 있을 수가 없다. 목사, 전도사가 더 성스러운 일이고 다른 일들은 천박한 일인가? 아니다. 이스라엘 지파들로 따지면 레위지파만 고귀하고 나머지는 다 천한 존재들인가? 아니다. 목사도, 전도사도, 레위지파도 각각의 기능과 역할이 있을 뿐이다. 개신교적인 교리에서는 모든 일이, 어떤 일을 해도 그것이 '성직'일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을 망가뜨리고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렇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선택받은 자'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고? 그건 창조의 원리에 놓고 봤을 때 말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세상을 만드셨다'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정말 기독교인이라면, 성경과 개신교의 교리를 믿는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 안에 계획과 목적을 심어놨다고 믿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선택받은 자'라는 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 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냈으면 하는 삶의 방식과 계획이 있고, 그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우리를 그 목적에 맞게 선택했다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선택받은 자]라는 개념을 '나는 선택받은 자고 너는 아니니까 나는 천국에 가고 너는 지옥에 갈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무엇을 심어 놓으셨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어떻게, 어디로 선택해서 부르셨는지'를 알아가야 하는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그걸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우리가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sin)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성공,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들을 추구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회는, 세상은 그런 가치와 방향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그 한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영향에서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이상 절대 그 기준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따라서 '선택받은 자'라는 표현은 종교적인 색을 배제한 표현으로는 '나의 능력, 재능, 성향을 알아내서 그에 맞는 일을 찾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나를 알아가고, 내게 맞는 일과 자리를 찾아가는 것. 그게 성경적인 삶이고, 그게 '선택받은 자'의 의미다.


그게 꼭 특정한 일이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는 배우자를 평생 서포트 하는 것이, 또 다른 사람은 아이에게 온전히 사랑을 주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나 사명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크거나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사실 누군가를 성심성의껏 사랑해주는 것은 사회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은 한 세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작은'일은 기초를 쌓고 유지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큰 일이다. 기초가 무너지면 그 위에 쌓은 모든 게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교회는 비전, 소명, 사명 같은 거창한 표현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욕망하고 욕구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건 절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에 이름이 나오는 인물들보다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나? 그런데 한국 교회는 왜 '선택받은 자'라는 표현으로 사람들이 그런 예외가 되기를 욕구하고 욕망하게 만들고,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기도 하는 걸까?


성경에서의 '선택받은 자'는 [사회적으로 큰 일]을 해야만 한다거나 교회에 나와야만 천국 간단 의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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