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3편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 '예수'를 가장 많이 듣는 경로는 아마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그 구호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깊이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복잡한 면이 많다. 우선 첫 번째로는 '지옥은 실재하는가?'라는 문제가 있고, 두 번째로는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세 번째로는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중에 두 번째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직전에 글을 써서 정리한 바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지점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지옥은 실재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지옥을 언급하셨다고 주장되는 부분은 두 지점이 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이라고 언급된 부분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언급된다. 그게 전부냐고? 그렇다. 성경 전체에서 지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그 정도밖에 없다. 심지어 지옥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글에서도 [지옥은 성경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주제다.]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내용들마저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청자들이 대부분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언급들마저도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문화적 맥락'에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는 데 있다. IVP에서 발행한 성경배경주석에 의하면 당시에는 유대인의 민간전승에 의인이 천사들에 의해 옮겨진다는 내용이 있었고, 지옥을 불이 타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표현은 모두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을 하시는 과정에서 나왔다. 예수님께서 [죽은 후에는 지옥에 간다!]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온 지옥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께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입증해주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회, 문화적 이해와 맥락에서 예수님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 전승을 사용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계란으로 바위깨기'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정말 계란으로 바위를 깨 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똑같은 비유도 듣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맞춰서 해야 하듯이 예수님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런 문화적인 요소를 사용하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후세계는, 죽은 다음에는 천국과 지옥이 없나? 모르겠다. 사실 이걸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은 성경은 애초에 사후세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사후세계에서의 지옥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 중에는 '하나님 나라'와 '구원'이 있는데, 그 표현들과 맥락을 들여다보면 이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표현은 신학적으로는 사후세계와 관련지어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사후세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고 알 필요도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기에 '현실'에 초점을 맞춰서 이 두 표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하는 건 어렵고, 추상적이며, 논쟁적일 수 있기도 하고 이 시리즈에서 계속 밝혔듯이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깊게 들어갈 마음이나 상황적 여유도 되지 않고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모든 인간이 그 정도로 그에 대한 이해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그런 인간의 한계를 알고, 이해하며, 용서해 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대부분이 '이 땅에서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고, '구원'은 죄(sin)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창조로 시작해서 인간이, 이 세상이 어떻게, 얼마나 망가지고 창조된 상태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왜 살도록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면서 그 상태를 회복할 필요, 이유와 방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글에서도 설명했듯이 성경에서의 '죄'라는 것은 결국 창조된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구원 역시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모습을 회복하고 우리 안에 심어놓은 계획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래야 할까? 앞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사랑은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인간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 욕망과 이기심 때문이다. 나는 신은 그걸 되돌이키는 원리를 설명해주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자 행복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가면 '그러면 기독교는 불교와 똑같네!'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다. 불교는 인간이 '열반'에 어쨌든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그럴 수 없고 '성령'에 의지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반면 불교는 그게 힘과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놓고 어디로 가도 정상으로 가면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그건 마치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수영을 할 수도 있고, 배를 탈 수도 있고, 비행기도 탈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얘기다. 가능해 보일 수는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수영을 해서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통통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이러한 미묘한 지점의 차이로 인해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다르게 행동하고, 방향성과 지향점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표가 같더라도 누군가는 그 지점으로 갈 수 있는 반면 누군가는 같은 곳을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 신자는 지옥에 갈까? 모른다. 왜 모르냐고? 성경은 그에 대해서 명확히 얘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조금 더 도발적인 도전을 해보고자 한다. 넷플릭스에는 기자의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쓰여진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죽음과 관련된 [서바이빙 데스]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 다큐에서는 아주 어렸을 때 이번 생이 아니라 전생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 아이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연구자에 의하면 극소수의 아이들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자신은 000이라고 말하며 그 사람의 기억을 그대로 갖고 있는데, 그 기억은 나이가 들면서 희석된다고 한다. 그 다큐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와 인터뷰를 들으면 '윤회가 사실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그런 일이 없다고 완강하게 부인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그런 사상은 기독교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안될 것은 없다. 이는 성경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사실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성경에서는 그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사상을 가진 다른 종교들은 더 진리에 가깝고 문제가 없나? 그건 아니다. 이는 윤회가 사실이라고 해도 인간이, 영혼이 어떻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종교들은 현실에서의 삶이 윤회와 연관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실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그건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하고, 현실에서의 일이나 행동이나 마음이, 과거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는 아예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겨져 있어야 한다.
앞의 다른 글들에서도 말했지만 성경은 철저히 [현실]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성경은 지독할 정도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이번 생을, 이번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구호는 외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 구호는 철저히 인간이 알 수 없는 사후세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사후세계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신은 이 땅을, 이 세상은 왜 만들었나? 인간을, 생명체를 죽여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삶은 그저 천국이나 지옥에 가기 위한 수단이란 것인가? 굳이 왜? 신이라는 존재가 왜 그렇게도 어리석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데 이렇게 많은 에너지를 쓴단 말인가? 만약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왜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며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신은 인간과 어떻게 소통하고 인간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만 얘기하고 있을까?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구원'은 철저하게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 속에서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이 땅에서 자신이 할 수 있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게 맞다.
한 걸음 더 물러나 보자. 좋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사실이라고 전제해보자.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그건 하나님이 예수님을 롤모델로 이 땅에 보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믿으며, 그 발자취를 따라 사는 게 목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하자. '나는 예수를 믿으니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겠지만 당신은 믿지 않으니 지옥에 갈 거야'라는 말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인가? 아니다. 그건 상대에 대한 저주임과 동시에 상대에 비해서 본인이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과시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는 구호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에게 그런 말은 내뱉을 수가 없다. 그걸 보고 불쾌하고 불편한 사람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외치고 다니는 건 절대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이 아니다. 그건 예수님보다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모습에 가깝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지옥도 마찬가지. 지옥도 죽어서 가는 것보다는 이 땅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 땅에서 천국을 살아내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만은 안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현실과 인간 안에 있는 죄(sin)를 넘어서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은 욕망과 욕구로 가득 차서, 그것에 중독되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며 살지 않으면 그런 삶을 살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그런 원리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매우 이타적이고 선한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지?'라는 말을 하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성경은 '그건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그렇게 살아지는 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본인이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인간은 절대로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구호를 외치고 다닐 정도로 오만할 수가 없다. 이는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구원을 받는 것도,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도 자신의 힘과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일까? 인간의 욕구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현실의 조건과 상황에서 자유롭게 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고 평안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목사들의 배임, 횡령, 세습, 강간, 간통, 성폭행, 성추행 등은 그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안에 거하고 구원된 상태라면 자신들의 욕망과 욕구의 노예가 되어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반성하기는커녕 뻔뻔스럽게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라며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자라면 순간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 잡아먹힐 수는 있지만 그랬던 과거를 부끄러이 여기고 반성하며 살 것이다. 이는 정말 하나님 안에 거해 있는 자들이라면 그게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를 알고,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니란 것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성경에서의 '구원'은 현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워진 것이 행위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나? 물론,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선해도 그 의도는 악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만을 놓고 그 사람의 선악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 안에 거하고 구원받은 자라면, 그 사람의 행위는 악하고 이기적일 수가 없다. 이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고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사람의 행동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기독교인으로 남은 것은 성경은 이 지점에 대해서도 굉장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언젠가는 성화되거나 완벽하게 변해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은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다시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사로잡힌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은 순간을 안다'라고 주장하는 자들과 구원파의 교리가 잘못된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이러한 인간관을 무시하고, 사후세계에만 관심을 두고 거기에 매몰되어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그런 존재라면 성경에서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하고 있겠는가?
성경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도 그런 삶을 사셨다. 그걸 안다면 우리는 절대 오만해질 수가 없다. 자신의 자신된 것임이 오롯이, 100%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그게 본인의 힘과 노력에 기인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안다면 어떻게 오만해질 수 있겠나?
성경은 이러한 지점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보여준다. 성경은 우리가 회개를 하면 다시는 그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다시 실수를 해도 또 용서하신다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인가?
이 지점에서 '회개'에 대한 부분도 짚고 넘어가자.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를 잘못했다고 말하면 다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람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죽인 후에 '잘못했어요 하나님'이라고 말한 후에 또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가 아니다. 성경은 항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기준으로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진심을, 진짜로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게 되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피해나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계속 안고 살면서 같은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회개를 한 자의 삶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번 회개하면 잊으신다고 하는 건 성경은 인간이 그렇게 회개를 하고 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 형식적으로 회개를 하면 모든 게 원상 복귀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입으로는 회개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고 '난 회개했으니 끝났어'라고 말하는 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를 한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들은 껍데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일지 몰라도 성경의,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그걸 분명히 얘기하고 있다.
만약 사후세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렇게 껍데기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은 지옥에 갈 것이다. 한국에 산다고 해서 모두 한국인은 아닌 것처럼,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 사람의 ‘직업’이 형식적으로 목사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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