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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기적들, 진실? 거짓?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1편

by Simon de Cyrene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하는 가장 큰 비판, 또는 성경과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에 대한 얘기가 아닐까 싶다. 구약의 경우 모세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올 때까지 보여준 기적들과 홍해의 기적들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병을 치유하고 죽은 자까지 살리는 기적들이 성경의 내용을 허구로 여기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평생 교회에 가지 않는 삶을 산 적이 없는 나도 그런 요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30년 가까이 고민했으니 그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그로 인해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걸 넘어서서 교회에 다니게 되는 것 자체가 기적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어떻게든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뤄진다. 예를 들면 '홍해'로 번역된 원어를 따져보면 호수를 지나간 것이고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은 수심이 얕은 갈대밭을 지나간 것이 잘못 번역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물리적으로 빵과 물고기가 증가한 게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내놓은 아이의 마음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도시락을 공유하다 보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먹게 되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들은 모든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느낌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되면 또 반대쪽 끝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모든 건 있는 그대로 일어난 절대적인 진리라고 반박하면서 그 일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증명하려 들면서 논쟁 자체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방향으로 진행되는 듯한 건 나만의 느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어도, 또 그렇지 않고 특정한 목표를 위해 일정 부분 픽션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어도 상관이 없다고 본다. 이는 그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과 취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건 어느 개인을 높이고 칭송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 설화들은 개인을 영웅시하고 그 혈통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은데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그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성경에서 나오는 기적들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전제한다면 그 이야기들은 개인이나 민족을 높이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부족함, 타락함을 더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인간과 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면 그것도 개신교에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신이 그 이야기가 전달되도록 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성경에 나온 기적들이 담고 있는 인간과 신의 관계와 인간의 본성은 사람의 지혜로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까지 인문, 심리학에서 연구들을 통해 밝혀지고 있는 인간의 심리와 특징들이 그 안에 담겨 있는데 그걸 노예생활을 하고, 항상 쫓겨 다니는 광야생활을 하는 속에서 그런 픽션을 쓸 능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수년, 아니 수 십 년을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들이 알아내는 것에 대한 통찰력이 그런 환경에서 수 천년 전에 있는 게 가능할까?


마치 '기적들이 다 픽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온 기적들은 대부분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홍해가 갈라진 것과 같은 일은 실제로 번역의 오류로 그렇게 기록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외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과 구약에 나오는 여러 기적들도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논증을 집중적으로 해보려 한다.


우선 앞에서 쓴 글들에서도 말했지만 당시의 인쇄술과 기록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고려했을 때, 그리고 성경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쓴 문서를 합쳐 놓은 것이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 그 문서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매우, 매우 높다. 이는 신화들의 경우 거의 예외가 없이 권력자나 지배자들, 그 시대에 '배운 사람들'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성경을 구성하는 문서들은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것들이고, 그걸 기록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그 문서들을 기록하고, 남기고, 전달할 이유도 없고 그런 자리에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을, 심지어 기록한 사람이 자신을 비하, 폄하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누구가가 만든 가공의 이야기이기는 힘들다. 솔로몬과 다윗은 자신이 왕이었던 시절에 울부짖고, 자신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남겼는데 그게 가공된 이야기들일까? 구약에 나오는 내용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군신화보다는 조선왕조실록에 가깝다. 조선왕조실록에 왕과 신하들의 작은 일들까지, 심지어 흠으로 보일 수 있는 점들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구약에도 그런 내용들이 담겨 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치부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한 여자를 갖기 위해 자신의 충신을 사지로 내모는 이야기까지 기록되어 있으니까... 사람이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했다면 그걸 굳이 픽션으로 만들고 기록하고 후세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은 기적을 통해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 쓰여진 게 아니냐'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따지면 교수형 당한 사람에 대한 기록을 그 시대를 산 사람이 남기면서까지 굳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기록했을까? 당시에 십자가에 못을 박히는 건 중대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만약 예수를 신격화하고자 했다면 그 부분은 편집되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만 기록했을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반박은 가능하다. 예수를 더 억울하게 피해받은 사람으로 그림으로써 영웅화시키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예수를 신격화하기 힘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나님이 괜찮으시다면 제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담겨 있다. 이 문서들이 기록된 시대에서 떠받들어지고 추앙받던 인물상에 비춰봤을 때 만약 누군가를 신격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장면은 실제로 존재했어도 삭제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예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인지를 놓고 다투고,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실제로 왕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가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그 시대의 기준으로 가장 비참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신격화하는 경우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지점까지는 공감도, 동의도 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그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인 행적은 성경에 예수님과 관련하여 기록된 것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단 것을 보여준다. 왜냐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180도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떠나 자신과 연고도 없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 낯선 지역으로 이동하며 고생,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제자들은 댑부분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베드로는 심지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이 모두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것도 아니다. 바울은 심지어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완전한 엘리트에 기득권을 가진 자였다.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 중에서도 넉넉하게 먹고살 수 있는 벌이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태는 당시에 돈을 쓸어 담을 수 있는 세리였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은 어부였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 반경을, 경제적 기반을 모두 포기하고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돌다 감옥에서, 처형을 당해서, 살해되어서 죽었다. 그들은 그걸 각오하고 그렇게 살았다.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낀 게 없다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보고, 들었어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보이신 행적은 기록된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전파하러 다녔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유대인들의 기준에서는 이단이었다. 그들은 몰래 만나야 했고, 핍박을 받았고, 현실적인 피해를 입는 왕따를 당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 예수 제자지?'라고 묻는 질문에 세 번이나 아니라고 한 건 당시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리스크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 즈음에서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만약 무엇인가를 믿었을 때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고, 교수형을 당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도 일상을 순간순간마다 조마조마해 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생지옥과 같은 현실을 감당할 수 있나? 대부분 사람들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삶을 선택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도 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게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이 지점에서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물리의 법칙까지 거스르는, 죽음을 거스르는 게 말이 되냐?'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반박을 하는 사람이 신을 믿지 않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우연히 진화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인간이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된 것도 우연한 진화의 일부이며 지구의 조화로운 환경이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런 희박한 확률을 믿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대로 존중하겠다. 그 정도로 낮은 확률을 '우연'에 기대어 믿겠다면 그 또한 엄청난 믿음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게까지 신이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성경에 있는 기적은 믿지 않으면서 사주는 보고, 무당을 신뢰하고 찾아가 점을 보는 건 뭔가 모순되는 느낌인 건 왜일까? 이 세상의 원리와 이치를 통계로 따져서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면, 내가 우연히 짚은 타로 카드가 나의 미래를 점친다고 믿는 것은, 귀신이 들어서 미래를 말해 주고 좋은 기운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사실은 이미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걸 어느 정도는, 무의식 중에라도 믿는 게 아닐까?


아니, 그런 걸 하지 않는다고 치자. 믿지 않는다고 치자. 하지만 왠지 인연이라는 건 있는 것 같다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것 같다고, 왠지 뭔가 벌어질 느낌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사실 그 자체로 뭔가 보이지 않는 힘과 원리가 있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석하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나?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과 원리가 없다면 인연이라는 게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신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없다면 필연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작은 표현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절대적인 존재나 힘, 신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있단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신이나 절대적인 존재나 힘이 있다고 친다면 그런 존재는 능력치가 어느 정도까지 되어야 할까? 그런 존재나 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진화 또는 발전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하는 건가? 그런 존재나 힘은 인간보다 못할 수는 없는 건 기본일 듯한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나는 이런 고민들을 복잡하게 한 끝에 그것, 혹은 그 존재를 뭐라고 부르든지 이 세상과 질서의 흐름 전체를 주관하는 존재는 있다고 전제하는 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우연'이나 '자연' 또는 '보이지 않는 힘'을 믿는 것보다는 그걸 믿는 게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구에서, 아니 우주에서 일어나는 질서를 주관하는 존재나 힘이 있다고 한다면 그 존재나 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초월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 안에서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자동차를 개발하고 만든 사람이 자동차를 개조하거나 수리는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나? 그게 말이 될까?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사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따지면 이슬람교나 불교가 훨씬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지점들이 많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 보자. 인간이, 우리가 세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알 수 있을까?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직접 경험했던 것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대부분 사람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을 초월하는, 근본에 깔려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다듬은 것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박진영 씨의 가사를 빌리자면 '기나긴 역사의 한 점도, 이 넓은 우주의 한 먼지도 안 되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라면...


성경에서의 기적은 그저 아무렇게나, 아무 때나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대부분, 아니 내가 판단하기로는 모든 기적들이 신이 자신이 신적인 존재임을 인간이게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성경에서 신은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고, 인간의 상식과 이 땅의 기본적인 질서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소통의 수단으로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일들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게 신에게도, 절대적인 존재나 힘에게도 기적일까? 예를 들면 많은 것을 경험했을 수 없는 다섯 살인 어린이는 아빠나 다른 어른들이 하는 많은 일들을 '기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하다 못해 본인 기준에서는 엄청나게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도 아이들은 기적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본인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드는 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세계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기적은 아니라는 것을 같은 성인인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 관점에서 '기적'인 성경에 나오는 일들은 사실은 신의 관점에서는 기적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함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표적'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신이 인간과 소통을 하고 설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적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성경의 본질보다는 '기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기적'을 목적 또는 목표로 삼는다는데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런 기적을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맞춰서 사용하고 싶어서 신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는 그런 기적이,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며 기독교는 틀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만약 정성을 들여서 빈다고 해서 인간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 이 땅의 질서는 어떻게 될까? 현실에서 시간과 재화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는데 왜 누군가의 요구는 들어주고 누군가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아야 할까? 더 정성스레 빈다고 해서 들어주는 식으로 인간을 줄 세운다면 그게 신이 할 짓인가? 그런 신은 어떤 신인가? 이 땅의 질서를 전체적으로 관장하면서도 고작 자신이 만든 인간을 줄 세우고 이 땅에서 만들어진 물질을 탐내는 존재란 말인가?


다른 종교들은 그처럼 말하지만, 공을 들여야 신이 원하는 바를 준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기도를 더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내면 신이 좋은 것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 성경을 왜곡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샤머니즘적인 사고를 기독교로 포장해서 그 사람에게 잘못 알려준 것이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기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왜곡되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오해가 적지 않은 듯하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이렇게 하면 신이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와 달리 성경은 굉장히 냉정하다. 성경은 인간이 요구한다고 해서 신이 그걸 다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신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맞춰준다고 하지 않는다. 그걸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 이유도 분명하다. 신은 인간 자신보다 더 인간을 잘 알기 때문에.


생각해보자. 자신의 자녀나 조카가, 친구가 독약을 달라고 하면 줄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아무리 협박하고, 울고불고 떼를 써도 독약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성경은 오히려 '너한테 정말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면 신이 안 주겠니? 네가 원한다고 해서 그게 정말 너를 위해 좋은 게 아니야. 신을 좀 믿고 살아 봐.'라고 말한다.


성경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먼저 신과 이 땅의 질서를 알 것을 요구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광야의 시간도 거쳐야 할 수 있다는 것도 여러 인물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신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인간의 기준에서 좋은,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 성경은 대놓고 여러 곳에서 말하고,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설명되는 신은 모든 사람에게 그걸 동일하게 요구하지도 않고, 그러지 못하는 자들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도 않는다. 이와 관련된 더 구체적인 얘기는 이후에 쓸 예정인 글들에서 다루겠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기적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런 기적은 이제는 끊겼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결론 지을 근거도 성경에는 없다. 다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오늘날처럼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기적'으로 보이는 일이 일어나도 그로 인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 과학적인 원리로 분석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기적'이 신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또 생각해보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일들은 수 천년 동안 일어난 것들이다. 그런 '기적'은 애초에 흔히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기에 오늘날에 그런 일들을 흔히 볼 수 없는 게 이상하지도, 그게 그런 일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단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사람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의학이나 심리학적인 연구결과를 성경에서 그려내고 있는, 드러내는 인간의 심리와 본성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요즘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을 갖고 믿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시대가, 문화가 바뀌면 소통방법도 달라져야 하니까.


애초에 '기적'에 너무 초점을 맞춘 믿음과 신앙생활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 그런 경향성이 우리나라에는 적지 않은 듯해서 조금 길고 장황하고 본격적으로 그에 대한 내용을 다뤄봤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1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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