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9편
성경을 허구라 여기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말도 안 된단 표현이 '성경무오설'일 것이다. 수 천 년 전에 쓰여진,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하나 가득 담긴 이 책에 오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의 비판은 타당하고 일리가 있다. 그리고 성경무오설은 '무오설'을 어떻게 해석하고, 오류가 없음이 의미하는 바에 따라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보수적인, 극도로 보수적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무오설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성경에 쓰여진 모든 사실은 객관적으로 맞고, 글자 하나, 하나도 틀림이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틀렸다. 성경은 '과학주의적 사고방식'에 비춰봐 봤을 때 곳곳에 '객관적인 사실'에 있어서 오류인 것으로 보이는 지점들이 있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그리고 그걸 밝혀낸 신학자들 중 상당수는 '문자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를 입증하려다 자신의 신앙을 버리게 되었다. 이는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들여다보면 발견되는 모순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자주의적 사고방식은 기독교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경에 대한 이해와 해석 방식은 '축자영감설'이라고 하는데 이 이론은 종교개혁 이후 16세기와 17세기에 일부 제기되었으나 종교개혁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부한 이론이다. 축자영감설은 그 자취를 감췄다가 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다시 등장했을 정도로 그 역사도 깊지 않고 개신교와 구교에서 주류에 해당하던 성경의 이해 방식이 아니었다.
개신교 신자라면, 아니 개신교 신자가 아니어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마틴 루터, 장 칼뱅, 존 웨슬리는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데는 동의했지만 마틴 루터는 성경을 신이 인류에게 윤리와 영성을 알려주는 절대적인 근거로, 존 웨슬리는 신이 인간과 함께 한다는 증거로 이해했다. 그리고 장 칼뱅은 저자들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서술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성경 무오설은 성경에 기록된 디테일들, 예를 들면 7일 만에 창조가 이뤄졌다고 할 경우 그 하루가 무엇인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광야 생활을 할 때의 숫자, 예수님이 가르칠 때 모인 사람들의 숫자 등이 한 치의 오류가 없다는 입장이 아니다. 아주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전통적인 성경무오설은 그렇게 미시적인 영역이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쓰여지고, 구성되어서 전해진 것은 그 안에 신이 인간에게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서로 줬다는 측면에서 오류가 없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는 이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문자주의적'으로 성경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거나, 이단들이 그 안에 있는 숫자를 갖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접근방식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자들을 넘어서 한국교회는 왜 성경을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했을까? 그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쉽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건 쉽다. 이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그렇게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성경적 지식을 넘어 인문학적인 사고방식과 감수성까지 갖춰야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인생 경험도 축적되어 있어야 하는데 신학교와 교회라는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목회자들은 대부분이 그런 경험을 갖추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목회자들 중 상당수는 성경에서 드러나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외우라고, 받아들이라고 하는 경향이 강해졌을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목회자의 잘못만은 아니다. 목회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해도 살아남는 것을 넘어 교회를 키울 수 있는 목회자들이 생긴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런 수준이기 때문이다. 어렵고 복잡한 것은 싫고, 귀찮아서, 내가 믿는 신은 내게 엄청난 것을 줄 수 있는 힘 있고 신비주의적인 존재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그들에게 어렵고 복잡하고 깊은 얘기를 하면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를 않으니 목회자들도 그에 맞춰서 대응을 했을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산업혁명, 경제발전과 더불어 밀어닥친 '과학화'라는 트렌드와 '규모의 경제'를 강조하면서 '효율'을 따지게 된 사회적인 분위기가 교회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면 아무리 엉망인 사람들이 교회에 와도 목회자들도 중심을 지켰을 수 있었을 텐데, 사회적 분위기가 '과학적인 것'을 강조하고 시스템과 효율을 따지게 되면서 목회자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리면서 한국교회들이 이렇게 되고, 성경에 대한 접근방식이 왜곡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성경을 이해시키는 방법 중에 가장 쉬운 게 뭘까? 몇 가지 행동지침 같은 구절을 뽑아서 '이건 반드시 지키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샤머니즘이 널리 자리 잡고 있었던 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다 보니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복을 많이 받고, 죽은 후에 천국 간다'는 샤머니즘과 같은 논리를 도입하는 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기독교'라는 생경한 종교를 퍼뜨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 중 한 가지라 할 수 있다.
만약 우리나라에 개인이 중시되고,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와 상명하복과 같은 군대문화가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접근방식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한반도에 처음 전파되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윗사람'을 공경하는 문화가 완전히 자리 잡고 있었고 당시 조선사람들에게 '선교사'나 '목사'는 종교 안에서는 '높은 사람'이다 보니 그들이 이게 맞다고, 이렇게 믿으라고 하면 그걸 그대로 따른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과 모순된다. 성경에서 그려지는 하나님, 또는 신은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적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허락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성경에 신이 개입하는 부분들이 많다며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다). 그런 신이 성경이 쓰여지는 과정에 갑자기 인간에게 개입해서 인간을 조종해서 성경을 구성하는 책이 처음 쓰여진 시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적인 요소들까지 쓰게 만들었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 만약 성경에서 그리는 신이 그런 신이 있다면 성경에는 왜 실패하고 실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가득 그려져 있을까? 왜 성경을 구성하는 책들의 사본이 여러 버전으로 발견되는 것을 '허용'했을까? 더 근본적으로 그렇다면 신은 언제 개입하고 언제 개입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존재인가? 그에 대한 기준은 어디에 나와 있나?
이처럼 성경을 '문자주의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성경에서 그려지는 신의 모습과 많은 모순을 야기한다. 성경은 그 내용을 기록하는 사람들의 주관이 개입하고,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한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록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완벽'하지는 않다. 성경이 그러하기를 기대하는 건 '예수천당 불신지옥'처럼 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신비주의적인 무엇인가가 성경과 기독교 안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 신의 폭력은 그 맥락을 놓고 보면 신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다 이유가 있고 이해도 되며 일어나야 할 이유가 있는 것들이다(이 역시 다음 글에서 설명하겠다). 그냥 이유 없이, 신비주의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없단 것이다. 성경은 오히려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고단하다는 것을 대놓고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걸 숨기는 것은 그런 얘기를 하면 사업으로서의 교회 운영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이 설명을 시도하는 이면의 다른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 인간 간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이 세상의 원리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믿는 것이 개신교가 구교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종교개혁자들이 믿었던 '성경무오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성경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을 하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되고 잘못된 것이다. 성경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서 조금씩 뉘앙스가 달라져도, '실'이 '낙타'로 오역되어 이해할 수 없는 비유가 있어도(마태복음 19장 24-25절) 문제가 없는 건 성경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나 미시적인 디테일들이 아니라 그 안에 드러나는 인간과 신의 관계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내가 성경에 대한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신학서적이나 성경 배경 주석, 주해서를 보던 시기에 문득 '그런데, 문자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시대에는 이런 디테일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런 걸 알아야만 신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신이 이상한 것 아닌가? 신이 인간을 잘 안다면, 창조했다면 대부분 사람이 성경을 이렇게까지 공부할 마음이나 상황의 여유가 없다는 걸 알아야 정상 아닌가?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이렇게까지 파고 들 필요가 없지는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여러 자료들을 보다 보니 중세시대까지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종교인들이 있었더라. 만약 단어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들은 신을 몰랐을까? 종교개혁 전까지는 종교인이 아닌 자들은 성경을 직접 읽지도 못했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과 믿음은 어떻게 해석되고 설명되어야 한단 말인가? 문자주의적인 성경무오설은 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다는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은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흐름의 관점에서는 모두 분명히 일어났던 일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디테일들은 일부 오류나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성경에 묘사된 상황, 중동지역의 지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문서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오류들은 당시의 세계관, 가치관, 문화, 저자의 지식적 한계로 인해 발행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는 충분히 상식적으로 추론할 수도 있다. 이는 당시의 인쇄술과 문맹률을 고려한다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소설을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쓸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도대체 왜 이런 기록들을 그 시대에 가짜로 만든단 말인가?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이런 성경의 특징에 비춰봤을 때 성경 말씀을 쪼개서 암기하고 암송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늘날처럼 정보와 서적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시대에는 그러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는 성경 말씀을 쪼개서 암송하면 그 앞뒤 말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일 수 있는 것을 자신 마음대로 왜곡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애초에 장절이 없던 책이다. 장절은 12-14세기에야 비로소 붙여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경은 통으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에서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은 '비판을 하고 싶으면 너부터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해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 바로 뒤에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결국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다. 성경은 처럼 맥락적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쪼개서 암기하는 건 매우,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요'도 '달라고 조르고, 기도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주실 거야'의 의미가 아니다. 그 말씀의 전제는 '하나님 안에 거하라'가 깔려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시선을 갖게 되고,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또 여기에서 무엇을 구하라는 것인지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이해해야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을 수 있는데 한국교회에서는 '복'을 물질적 풍요로움과 세상적인 성공'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건 거의 성경 왜곡 수준의 해석과 이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무오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또는 신앙의 방향성은 '성경은 전체를 거시적으로, 관계적으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를 읽지 못해도 '인간과 신의 관계'적인 관점에서 그 내용을 이해한다면 신을 제대로 알고, 내 삶을 최대한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QT책들에서 쪼개 놓은 것처럼 읽을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넓게, 통으로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한국교회들이 무늬만, 껍데기만 교회인 것은 성경을 그렇게 읽으라고 권장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도, 스스로 그렇게 읽는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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