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8편
2022년 1월 1일. 또 한 번의 1월 1일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니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본인을 기독교인으로 분류하는 상당수 사람들은 이날 비슷한 다짐을 한다. 성경 일독. 올해는 반드시 성경을 한 번 다 읽겠다고 다짐하며 그들은 성경의 똑같은 부분을 펼친다. 창세기 1장. 또 한 번의 1월 1일. 이날만큼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의 의미에 대한 글을 쓰기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사실 나는 브런치에서 창조와 진화에 대한 글을, 내가 기억하는 것만 3번 정도 썼다. 이는 개인적으로 그만큼 그 논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아니다. 이 싸움은 과학이나 논리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다. 진화론자들은 이 얘기에 '무슨 멍멍이 뼉다구 긁어먹는 소리냐!'라고 말할 것을 안다. 이에 대해서도 이미 다른 글에서 설명했지만 시리즈의 흐름상 여기에서도 설명을 하고 넘어가자.
인정하겠다. 난 진화론의 세부적인, 세밀한 내용들을 모른다. 그런데 한 번 묻고 싶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진화론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아는지. 나도 진화론에 대한 책들은 읽을 만큼 읽어봤다. 미국인 학교를 다니던 중학교 시절, debate class에서 창조론의 입장에서 진화론을 주장하는 유대인 친구에게 이기고 나서도 뭔가 찜찜해서 관련 서적들을 뒤져본 게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진화론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 관련 연구를 하는 석학, 아니 석학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관련 연구를 하는 생물학자들 정도는 되어야 진화론을 정말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창조도, 진화도 결국 믿음이라는 논지를 과학적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이는 나도 그렇지만 그 논쟁에 끼어드는 대부분 사람들, 거의 99%는 아마추어 과학자도 못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특정 주제에 대해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또 있을까? 그리고 나는 진화론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는, 그 입장에 서는 데는 상당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만 입증하면 된다. 그리고 그건 과학을 몰라도 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종 간 진화를 인정한다고 치자. 이는 개인적으로 그걸 인정하더라도 창조론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건 조금 뒤에서 다룰 예정이고, 일단 종간 진화를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 욕구, 욕망은 어떻게, 왜 생겨났을까?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에? 정말로? 그런 욕구와 욕망이 생존에 유리하나? 아무 욕구도, 욕망도 없는 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 주고 생존에 유리하지 않을까?
좋다. 그것도 인정한다고 치자. 인간은 어떻게, 왜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언어'라는 것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왜 다른 동물들은 인간과 같은 언어체계를 갖추지 않고 그냥 살아오게 되었을까? 왜 인간은 유독 다른 생명체보다 성적 욕구도, 식욕을 포함한 욕구와 욕망이 다른 동물보다 강하게 발달했을까? 그걸 진화론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이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론'이 제기될 수는 있지만 이론은 이론일 뿐 '사실'은 아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은 000 해서 000한 이성을 좋아하게 [진화]되었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정말 그런가? 인간이 만약 종자를 살리기 위해 건강한 개체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남자는 모두 골반이 크고 가슴이 풍만한 여성에게만 끌리고, 마른 여성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여성들만 건강하단 것이 아니다. 외적인 모습을 보고 그런 이유로만 매료된다면, 인간이 그렇게 [진화] 되었다면 그런 여성들이 요즘에도 무조건 선호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게 예외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나?
양귀비가 살던 시대에는 그런 여성들이 아이를 잘 낳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인'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진화론적 관점이 맞다면 '미인상'은 왜 바뀐 걸까? 이제는 그 흐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우리 시대는 그와 완전히 반대로 여성들이 앙상할 정도로 마른 여성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게 다수인 세상이다. 이건 진화론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인간은 양귀비가 살던 시대와 지금 또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것일까?
이는 반대로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여성들이 정말 생존을 위해 우월한 유전자의 남자를 좋아해서 듬직하거나 경제력 있는 남자에게 끌린다면, 진화론적으로 그렇다면 마르고 부자가 아닌 남자에게 매력을 끌리는 여성들도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경제력과 외적 매력 중에 하나만 있으면 여자는 어디에 끌리는 게 '진화론적으로' 맞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기준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다. 모두 '설'들일뿐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이 맞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예외라고 하기에는 너무 예외가 많다! 예외가 이렇게 많다면 그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어디 외적인 모습과 경제력에만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나? 아니다. 사랑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굉장히 많고, 복잡하다. 이걸 '진화론적 관점'으로 포장하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이 정말 그렇게 '본능'적으로만 관계를 형성했다면 왜 여전히 인간의 병약한 유전자들이 남아있는 지도 설명될 수 없다. 아름다움이나 매력은 '사회적인 것'이라고 하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판단할 생각은 없다. 그걸 믿는 건 그들의 자유니까. 하지만 믿더라도 진화론이 완벽한 과학은 아니라는 것을, 진화론이 100% 맞는 것으로 입증되지도 않았고, 현실적으로 입증될 수도 없다는 것을,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일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자. 그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진화론이 입증되기 위해서는 지나야 할, 하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통과할 수 없는 단계가 너무 많다. 인간은 '과학'이란 이름으로 천동설을 주장했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해서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맞다는 것도 아니다. 아니,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이 왜 공존할 수 없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는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기록한 사람들이 살던 시대적 배경과 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 사고방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지어 창세기는 기원전 400년 정도에 쓰여졌는데 그때 아무리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쓰여졌다고 해도 그걸 받아쓰는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계시로 그걸 썼다는 건 성경 내용 전반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경이 과학책이라고 하기에는 연도도, 숫자도 틀린 게 너무 많다... 그것이야말로 고고학적으로 이미 입증이 되었다.
창세기에 나온 창조론은 성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창조론을 과학인 진화론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건 마치 문학책의 내용을 과학적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진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인정하면 성경은 거짓이 되나? 아니다. 진화를 인정해도 그 변화 과정을, 진화를 이끌어 낸 절대자가 있다고 해석을 해도 그게 성경에 반하지는 않는다.
사실 개인적으로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인정해보자. 그렇다면 진화는 어떻게 이뤄지나? 우성과 열성에 의해서, 적자생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열성인 생물들이, 인간 유전자가 살아남지 않았을까? 아니 그보다, 무엇이 우성이고 열성인지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지구의 환경이 바뀌어서 우성이었던 것이 열성이 되면 진화는 어떻게 이뤄질까? 그런 원칙들은 어디에서 왔나? 자연선택? 그러면 자연은 그냥 그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그런 이론들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결국은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구의 환경이 너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건 나만의 느낌일까?
그 '자연'을 '신'으로 대체하면 어떨까? 아인슈타인이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은 믿지만, 인류의 운명과 행동에 관여하는 신은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도 이 자연이 '우연히' 이렇게 조화를 이뤄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아인슈타인보다 과학적인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이 시리즈 앞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성경은 이 세상의 원리, 인간의 본성과 인간과 절대자인 신이 어떻게 관계 맺는 지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설명하는 책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창세기는 그 시작을 그려내고, 창조론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을 것이다. 창세기에서의 창조론은 '자, 인간은 이렇게 신의 모습과 다른 면이 많은 존재야. 하지만 신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 선함이 먼저 자리 잡고 있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이 선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다른 글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링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는 인간이 타고나게 악하다면 선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타고나기를 선하게 타고나도 생존하기 위해 악해질 수는 있지만, 악하다면 인간이 선할 유인이 없는데, 아무리 악한 사람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선하단 것은, 그뿐 아니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선함이 존재한단 것은 성선설이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에는 생각보다 악하기만 하거나 선하기만 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무성악설은 틀렸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죄'라는 표현이 적지 않은 이들에게 반발감을 일으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crime이 아니라 sin이다. Crime은 사회적으로 범죄로 분류되는, 드러나는 행위가 법적으로 비난 가능성이 있어 범죄로 평가받는 것이지만 sin은 내면의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분명히 구분되고, 구분되어야만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개념을 모두 '죄'라고 부르니 사람들이 오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sin의 시작은 '창조된 모습에서 벗어난 상태'다. 이는 인간은 선한 존재인 신의 모습, 사랑으로 가득 찬 신의 모습에서 벗어나면 죄인을 의미하는 sinner이란 의미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 '죄인'이 어떤 의미인지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사용하는데 그건 '신이 인간을 처음 창조했을 때, 우리를 만들었을 때 심어놓은 것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단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을 살리셨다는 것은 인간이 그런 상태에서 원상회복을 하려면 하나님을 통해야만 한단 것이고, 인간의 삶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계획, DNA를 최대한으로 살아내는 데 있다. 그게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또는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얘기를 기독교적이지 않은 언어로 표현해 보자. 성경은 우리가 '타고난 성향'에 따라, 우리가 잘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살면서 자아실현을 하면서 이 땅에서 다름을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인간의 존재의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스스로 도를 닦거나 자신만의 노력으로는 안되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을 통해서만 깨달아 알고 그 길을 갈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신이 인간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 그게 성경이 담고 있는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그걸 이룰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그리고 그 '죄'에는 경중이 없다. 또 그렇기 때문에 '남녀가 함께 가정을 이루는' 창조의 원리에 반하는 동성애도 성경적으로 죄(sin)이지만, 하나님보다 돈이나 자신의 욕망을 먼저 쫓는 것도 똑같은 죄(sin)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이들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성경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런 죄인들을 모두 있는 모습 그대로 일단 품어야 한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신의 사랑이니까.
이처럼 성경의 원리는 창조와 죄에서 시작되고, 그 해석도 창조와 죄 없이는 이뤄질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창조와 죄라는 부분을 양보할 수 없다. 그게 모든 교리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작점이 있다는 것은, 이런 인간관과 세계관이 있다는 것은 '정답은 존재하고, 정상으로 가는 길은 하나 뿐이다'라고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도 진리이고 다른 종교도 진리일 수는 없다. 다른 종교들이 여러 종교가 병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와 같은 '우주의 시작과 원리'의 기초에 대한 세계관은 없이 현실의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창조'라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가장 크게 구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창조론을 그저 성경에 나오는 여러 얘기 중 하나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창조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그 본래 의미가 아니라 과학으로서의 창조론으로 접근함으로써 진정한 '복음'에서 멀어지는 것을 자주 본다. 아니, 오늘날 한국교회들을 보면 상당수가 그러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이 글이 길어졌다.
1월 1일이다. 나도 다시 창세기 1장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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