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0편
어렸을 때 성경을 읽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신은, 하나님은 왜 이렇게 화가 많고 폭력적인지가. 그런데 또 신약에서 설명되는 신은, 하나님은 엄청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신이 조울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호기심이나 탐구심으로 성경책을 들여다봤던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가 이런 신을 믿는 종교라면 난 믿을 수가 없다'며 기독교에 완전히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구약에서 신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만 보면 속도 좁고, 질투심이 많으며, 본인 말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벌하고, 죽이는 존재다. 거기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길을 헤매게 만들다니, 이 얼마나 고약한 짓인가? 그들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약에서 드러나는 신의 모습은 그렇게 보이고, 받아들여지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들이 있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첫 번째 포인트는 성경에 표출되는 신의 분노는 폭력에 대한 경고의 형태로 나타난단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너희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거야!'라거나 '저렇게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아!'라고 폭력을 가하기 전에 신이 말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정말 폭력적인 사람이 폭력을 가하기 전에 경고를 하던가? 조폭들 간에 세력다툼을 할 때 정석은 상대가 모르게, 예상하지 못하는 시점에 급습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살해하려는 사람이 경고하고 접근하는 경우보다는 상대를 수월하게 살해하기 위해 상대 몰래 치밀하게 계획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상대를 겁박하고 긴장하게 만들기 위해 예고 살인이나 예고 폭행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뿐 아니라 구약에서 그려지는 신이 그런 존재라고 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많이 챙기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경고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게 된다. 부모님이 자녀에게 '너 이렇게 안 하면 혼난다'라고 하는 게 자신의 자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때리고 싶어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다. 대부분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바른 길로 가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폭력적으로 보이는 신의 모습 중 상당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와 내가 보내준 사람들을 믿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살면 되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너희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사니?'라고 묻고 경고하는 모습이다. 성경에서 속 좁아 보이고 질투가 많아 보이는 신의 모습은 대부분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들이 가는 길을 바로 잡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리즈 앞의 글에서 설명한 성경에서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창조'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이상향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질서가 있으며, 사는 법과 질서에는 정답이 있고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으로 인해 그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란 것이다. 인간은 그 질서 안에서, 자신 안에 심겨진 계획 / 창조된 모습대로 삶을 살아낼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은 획일적으로 욕구와 욕망에 따른 삶이 주는 쾌락이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기에 그것들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예측가능성과 행복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줄 수 있는 행복은 단편적이고 단기적으로만 유효하다.
이것이 성경이 그리고 있는 세계관과 인간의 모습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거나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성경에서 폭력적으로 보이는 신의 모습은 이해도, 공감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 폭력적이고, 질투가 많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신의 모습은 180도 다르게 보인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쫓아서, 성적 쾌락과 물질적 풍요로움을 쫓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들보다 강한 집단, 민족과 국가들이 있다 보니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보다 강한 자들에게 복속되거나 그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 구약은 그런 이야기들이 다른 패턴으로 반복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본인들의 쾌락과 욕구와 욕망에 중독되어 살았는지, 얼마나 신보다 자신들이 중요한 존재이고 신보다 자신들을 신뢰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을 쫓아 살면 인생이, 자신들의 민족이 어디로 향할지를 그들의 조상이 이미 수 십 차례는 인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 이집트에서 노예생활까지 해야 했다는 것을 구전을 통해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실수를 반복한다.
구약에 나오는 신은,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대부분 시간 동안 그대로 존중하고 지켜보신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신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개입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실수하고, 넘어져도 그들이 자유의지로,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올 것을 믿어주면서 기다리는 존재다. 창세기에서부터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까지의 시간은 짧게 잡아도 수 천년은 되는데 그중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은 성경에 기록된 일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해 보면 인류 역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도록 배려했다.
구약에서 신이 폭력적이고 질투가 많은 것으로 보이는 지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환경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손님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그를 끌어내서 간음을 하겠다고 하지를 않나... 후손을 가져야 한다며 아버지와 잠자리를 하지를 않나...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본인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지를 더 받는단 이유만으로 10년 넘게 죽이려고 쫓아다니지를 않나...
구약에서 신이 개입한 시점은 이처럼 개입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는 시기였다. 우리 몸에서 암세포가 장기에 너무 많이 퍼져 있으면 그 장기는 암세포가 다른 부위로 전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도려내야 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신이 개입한 순간들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러지 않으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나락으로 가는, 타락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상황이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단 10명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은 물리적으로 10명도 없었단 의미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여기에서 물어보자. 암이 걸린 환자의 환부를 도려내는 게 사랑인가? 아니면 암이 전이되더라도 그대로 방치하는 게 사랑인가?
이에 대해서는 '신이 꼭 그렇게 질투하고, 협박하고, 폭력적으로 굴어야 하나?'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사람 10명을 죽인 사람을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시켜서 감옥에 넣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두면서 교육하고, 잘 구슬려서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자 시민의식을 갖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해야 할까? 10명이나 죽인 사람은 또 언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격리를 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갈 때까지, 너무나도 타락하고 창조된 모습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5살짜리 어린아이와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사회초년생과 회사 관리직 정도 되는 나이의 사람에게는 모두 그들의 수준에 맞춰서 대화를 하고, 같은 일을 하게 만들고자 하더라도 다르게 설득하거나 지시, 명령해야 한다. 그런 점을 고려하고,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보면서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방법으로 설득하고 소통할 수 없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은 있기 힘들 정도로 구약에서 그려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고, 이기적이며, 음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구약의 인물들은 그 안에서 도드라지고 그 안에서 '바른 길'을 갔던 사람들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시대와 우리가 사는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성적인 욕구와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며 망가져 간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문화가 사회적으로 팽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킬만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지속 가능한 행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부자들이 오히려 더 우울해하고, 엄청나게 많은 이성과 잠자리를 하는 사람들도 만족해하지 못하며, 매우 문란하게 산 사람들 중에는 '너무 문란하게 살고 보니 더 강한 자극을 느낄 수가 없어서 우울감에 빠졌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성경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사실은 인간을 어떻게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지를 성경은 곳곳에서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구렁텅이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과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은 방향은 욕구와 욕망을 쫓기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그 방향을 쫓아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는 신의 인도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은 신의 뜻과 인도하심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과 그 기준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신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구약이 그런 이야기를 변화구처럼 설명해준다면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과 조언이 직구로 알려준다.
그렇다면 신은 지금도 그렇게 밖에 우리를 대할 수 없을까? 아니다. 당시와 지금은 사회 인프라, 정보 접근성, 문맹률, 인쇄술 등이 확연하게 다르다. 구약이 기록한 시대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했고, 모든 기록은 수기로 작성해야 했다. 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직접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보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밖에 없었다. 성경에서 기록된 바에 의하면 신은 여전히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던질 것이나 그것을 신이 인간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이성, 과학, 합리성이 강조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사람들은 그 이유를 밝히고 설명해 내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우선 '성경'이 기초와 기준이 된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사회, 문화,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신은 그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소통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서 일면 폭력적이고 질투심이 강한 것으로 보이는 신의 모습은 그 시대에 신이 자신을 드러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 세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1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