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2편
이 시리즈를 매달 최소한 한 개 이상은 쓰기로 했는데 2월을 건너뛰고 3월이 되어버렸다. 2, 3월은 많이 정신이 없었나... 싶었다가 이 주제를 눈앞에 눈 2월의 여러 날들이 기억났다. 몇 번씩이나 이 제목을 봤다 망설이기를 반복했었다. 내가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써도 되는지, 이 얘기를 신학을 정통으로 공부하거나 배우도록 트레이닝되지 않은 내가 해도 되는 것인지가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주제가 그만큼 무겁게 느껴진 것은, 이게 [기독교]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없으면 구교인 천주교와 개신교는 없다. 예수님이 없으면 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책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매우, 매우 조심스럽고 무거워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라는 말을 어디에서 가장 많이 볼까?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같은 교단 이름에도 예수는 들어가지만 누구도 교단 이름을 그렇게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은 거리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써 들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서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가, 기독교가 무엇을 말하는 지를 알 수가 없지... 그 구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 글에서 설명하고, 그전에 일단 내가 생각하는 성경에서 예수의 의미에 대해 정리해 보려 한다.
교회에 가면 예수님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표현들을 많이 한다. 신의 아들이다, 성삼위일체라고 해서 성부, 성자, 성령님 중에 성자시다 등등... 그런 얘기만 하니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가르침을 누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부모님이 교회에서 만나셔서 평생을 주 1회는 항상 교회를 나간 나도 여전히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개념들을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들이미는 것은 폭력이다. 그리고 앞의 다른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신학적 교리는 '생각보다'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런 걸 고민하고, 이해하고, 정리할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의 무게로 인해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일단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란 말부터가 사실은 교회에서 쓰는 표현들을 조금만 더 알게 되면 모순되게 느껴지게 된다. 교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 딸이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간은 신이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자 딸인데 왜 예수는 특별하게, 다르게 취급받아야 하나?
개인적으로 구교, 또는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힘든 지점 중에 한 곳이 이것과 비슷한 지점이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교회의 기준에서' 훌륭하게 살다 간 사람들은 '성자'라고 해서 따로 분류를 하고 섬기는 것처럼 대우를 하더라.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성경을 보면 열두 제자들이 얼마나 흠이 많고 믿음이 없는 자들인지를 굉장히 쉽게 알 수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다윗, 요셉,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들이 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인데 그들을 분리해서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취급한단 말인가?
개신교에 있는 그런 모순 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특별취급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성삼위일체'라고 해서 신이 세 가지 인격으로 존재함을 설명하면서 특별하게 분류하고 취급하는데 그 근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쓰여져 있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표현들이 나온다는 것도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이론과 주장들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 견해는 기원후 200년이 되어서야 신학자에 의해서 제시되었고 그게 구교와 개신교 모두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더 나가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 구도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들이 여러 가지 있다.
물론, 그런 신학이론들이 중요하지 않지는 않다. 누군가는 그런 고민을 하며 성경에서 신을 어떻게 그리고 잇는지를 연구해야 하고, 그런 연구들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완전히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이 가장 중요하고, 그 현실은 굉장히 무겁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존재가 왜 '현실'에 의미가 있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해야 한다.
예수님의 행보와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내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너희를 구하고 싶을 정도로 너희를 사랑한다'는 극한의 표현이다.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당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면,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당신을 살리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다면 당신은 어떤 느낌을 받겠나? 그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당신을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아무리 못해도 자신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인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했을까? 인간이 왜 죽어가고 있단 것일까? 이는 다시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와 연결해서 생각을 해야 한다. 성경에 의하면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는데, 인간은 그 창조된 모습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성경은 그렇게 만들어진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인간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인간들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에 제사가 갖는 의미, 속죄제의 의미 등 다양한 신학적, 성서학적 얘기들이 있지만 디테일은 건너뛰자. 우리는 '현실'이 중요하니까.
이 지점은 '우리가 왜 살아야 하나?' 그리고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당신은 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꼭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할 때 기쁘고 행복한가? 뭔가를 가지면, 성공하면, 권력과 명예를 가지면 행복한가? 맞다. 그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 행복은 분명 있다. 그런데 그걸 갖기 위해서는 엄청난 고통과 고난과 힘듬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게 싫어서 그런 걸 회피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은 있으나 그들은 결국에는 같은 것을 욕구하고 욕망하는 자들에 의해서 발각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부와 명예와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엄청나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버틴다고 해서 결과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재화와 자리가 한정되어 있고 그걸 욕구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 결과, 그 힘듬을 감당하더라도 열매는 갖지 못하게 될 확률이 훨씬 높다. 혹자는 '그래도 그 과정에서 손에 쥐게 되는 것들이 있지 않느냐?'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당신이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를 하다가 중상위권 대학에 합격하면 '그래도 서울대가 목표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 대학도 못 왔을 거야'라며 행복해지나?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고대를 가고도 반수나 삼수를 해서 서울대나 의대, 한의대를 가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인간이 어떤 욕구와 욕망을 가지고 사는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걸 손에 쥔다고 해도 그 기쁨과 즐거움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청난 상을 받고 나서 집에 오니 공허했다는 사람들에서부터 해서 평생의 목표로 생각한 걸 너무 어렸을 때 달성하니 우울증이 걸렸다는 사람들까지. 한 때 우리에게 엄청난 것, 저것만 가지면 행복할 것 같았던 것도 손에 쥐는 순간에는 기쁨과 행복을 주지만 그런 기쁨과 행복은 지속 가능하지가 않다. 우리는 1억이 없을 때는 1억만 가지면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만 1억을 가지고 나면 10억, 10억을 가지면 100억, 100억을 가지면 1,000억이 가지고 싶을 것이다. 그런 욕구와 욕망이 없다면 수억만 불을 가진 사람들이 왜 여전히 뭔가를 더 갖기 위해 바둥거리고, 가진 놈들이 더하단 말이 나오겠나?
성경은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고 욕구하며 욕망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십계명 중에 관계적인 계명들은 결국은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결국 다른 사람의 것을 욕구하고 욕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성경은 대놓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이 땅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고, 이 땅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히지 말라는 의미다.
그걸 실제로 구현해서 이 땅에서 보여준 존재가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번민에 휘둘리셨다. 그걸 가장 보여주는 부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부분이다. 예수님도 두려우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아무 죄(crime)도 없으신 분이 오로지 우리에게, 인간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창조의 모습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깨달음을 남기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했던 것은 그것만이 '사랑'을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일종의 시범조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너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그 사랑은 기꺼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서로 아끼며 사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것 자체가, 그렇게 사랑하는 과정 자체가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만약 모든 사람들이 서로 위해주고, 섬기며, 서로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권력과 명예와 부를 과도하게 욕구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이 될까? 하루에 수 천만 원씩 술을 마시고, 숙박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꽤나 많은데 그들이 그것에서 느끼는 효용은 얼마나 오래, 많이 가나? 순간이다. 그걸 더 느끼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많이 써야만 한다. 그런데 그걸 만약 오늘, 내일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과 나눈다면 그 행복은 얼마나 오래갈까? 그런 사람들은 수 천만 원이면 몇 년도 마음 편히 먹고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눈 사람들은 또 본인이 나눔으로 인해 몇 명에서 몇십 명을 살렸다는 생각에 자신이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같이 뒹구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사람들이 사랑할 때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예수님은 이걸 삶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삶으로 이 땅의 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것을, 결국 모든 것은 신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아무 잘못도 없는,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 뭐가 중요한지 좀 알면서 살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한 우리를 향한 신의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도 너희와 같은 인간이었어, 너희도 이렇게 살 수 있어'라고 말씀하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인간이 매일 신 앞에 나오고 그 안에 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건 우리 안에 이미 창조된 모습으로부터 달라지고 왜곡된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해서 예수님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면 다 되는, 사랑할 때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인간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 매일, 매일 똑바로 살기 위해 의지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렇게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성경은 담고 있다.
기독교는 이 지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다른 종교들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거야, 저렇게 하면 신이 이렇게 할 거야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철저히 '너희는 사랑하는 존재로 신이 만들었는데, 너희가 창조된 모습으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고, 너희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렇게나 망가질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제발 신에게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 그렇게 사랑하는 것 자체가 너희의 존재 목적이야'라고 말한다. 성경은 '신이 이렇게 한다'라거나 '이렇게 하면 이걸 줄게'가 아니라 철저하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와 비유와 실제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다르다. 성경에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문학적인 요소와 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신학적인 요소가 거의 50대 50으로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랑'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너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죽기 이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하고 가지려 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 그게 끝이 아니고 모든 건 내 안에 있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다. 그건 어쩌면 그걸 기억함으로써 이 땅에서 사랑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신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나오는 제자들의 삶, 특히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의 회심은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이 미치지 않은 이상 예수님의 존재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부활하신 것이 아닌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신이 이 땅에서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에 대해 알리러 다니는 데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바울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끝까지 핍박하고 억압했던 사람이다.
예수님이 행했다고 되어 있는 기적들이 사실인지, 정말 부활하셨는지는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을 의심하거나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첫 번째로,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고 픽션이라면 누가, 왜 그런 기록을 남겼고 어떻게 다른 저자들이 같은 사건들을 얘기하고 있을까? 그런 소설을 씀으로써 누가 어떤 이익을 거둘 수 있었나? 더군다나 당시에는 인쇄술도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그런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또 사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예수님 부활 이후에 그 제자들은 왜 미친 사람들처럼 중동과 유럽지역을 헤집고 다녔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했나? 미친 사람들 치고는 그들이 남긴 글과 흔적이 너무 이성적이지 않나?
두 번째로, 당신이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최소한 우리가 보기엔 불가능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차를 직접 만든 사람이 차를 고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게 엄청나고 대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차를 만든 사람에게는 그건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인 게 당연한 것이다.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그게 신이라고 할 수 있나?
예수님에 대해서도 '신은 아니고 성자 중에 한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인이 메시아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메시아이던지, 아니면 미친 사람이던지 둘 중 하나여야지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존재일 수는 없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How Jesus Became God'라는 책을 통해 예수님은 그 시대에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추후에 해석과 포장을 통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존재한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인간이 예수님을 이론적으로 성삼위일체라는 틀에 끼워 맞춘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고, 성삼위일체도 이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처음부터 본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알고 계셨고, 아무 잘못도 없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그게 본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극단적으로 보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예수님은 신이 인간의 죄(sin)를 되돌이키기 위해 보내셨고, 그 과정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줬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내가 기독교 신자로 남아있는 것은 살면 살수록 인간은 실제로 그런 존재라는 확신이 강해지고,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인간관과 신관에 동의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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