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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론과 선택의 자유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5편

by Simon de Cyrene

기독교에서 가장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하면서도 인간에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 그중에서도 특히 개신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심하게 비난받는 원인을 제공하는 표현들은 대부분이 이 지점에서 나온다. 이 시리즈 앞의 글에서 '선택받은 자'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지만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선택받은 자'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결정론과 결부해서 '나는 애초에 구원받을 사람으로 선택받았고 너는 그렇지 않았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얼마나 재수 없는 말인가? 말을 그런 식으로 하니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그런데 앞의 글에서도 설명했지만 그런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개념과 모순된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만드셨단 의미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저주받기 위해 만드는 이상한 존재라는 뜻인가? 그리고 결정론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이 땅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게 인간의 상식에도 부합하는데 신이 세상을 만들고는 이 땅의 질서를 망가뜨려도 그 사람은 축복한단 뜻인데 그런 신은 어떤 신이란 말인가? 또 하나님이 세상을 다 만들고 계획대로 잡아놨다면 인간에서 어떤 도대체 자유를, 어떻게, 왜 줬단 말인가?


그렇다면 결정론과 선택의 자유는 틀린 주장들인가? 이 두 개념은 공존할 수 없는 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개념을 조화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핵심인 '사랑'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사랑학개론'이란 시리즈에서 나는 사랑을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가까운 수준으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면 그게 진짜 사랑에 가깝다'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상대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할까?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하게 되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게 되나? 그 사람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생각해보자. 당신이 당신의 연인이나 배우자를 100% 신뢰한다면 그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알지 않아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 반면에 연인이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던 적이 있다면 그 신뢰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신뢰 수준이 낮다면 상대에게 자유를 허락하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안하기 때문에.


이렇듯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는지는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는지와 직결되어 있다. 유튜브에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이성 친구와 단 둘이 만나는 게 어떤 형식과 시간까지 허용되는지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이뤄지고는 하는데 일정 수준 이상까지 허용하지 못하는 건 사실 연인을 100%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다. 우리는 누구도 누군가를 100% 신뢰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허락한 자유가 놀라운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신뢰하신다. 그들이 정말 극악할 수준으로 돌이키지 못할 수준으로 타락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참고, 참고, 참으면서 사람을 보내 협박과 저주의 탈을 쓴 경고는 하시지만 끝까지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신다. 그렇게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자. 만약 신이 인간을 A를 하면 B를 줄게 라는 식으로 조건을 붙이는 존재라면 얼마나 쪼잔한가? 신이 그렇게 작은 존재란 말인가? 자신이 인간을 만들고 나서도 그렇게 딜을 한단 말인가? 그건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네가 울지 않으면 분유를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짓이 아닌가? 나는 이 땅을 창조한 절대자가 그런 존재라고 믿을 수 없다. 인간의 상식과 경험에 비춰봐도 그건 너무 쪼잔한데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이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따라서 신이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될 권리가, 권한이 부여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런 권리와 권한과 자유 때문에 이 땅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참고, 기다리며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이며, 기독교 신앙이다.


그렇다면 '결정론'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결정론'은 [무조건 00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결정론은 '신은 우리 안에 특정한 성향과 계획을 심어놔서 우리가 그 계획에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심겨 있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강제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게 개신교적인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다.


이 땅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계획을 만들고 우리 안에 그에 필요한 것들을 심어놓으셨다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돌아가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망가질까? 그건 사람들이 그런 계획보다 자신이 믿는 가치와 세계관, 조금 더 적나라하게는 더 많이 가지고, 누리고, 다스리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그 계획을 무시하고, 아니 대부분 경우에는 그런 계획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이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지만 뭔가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경우는 적지 않다. '운명'이란 표현 안에 담겨 있는 함의가 그렇고, 사람들이 점이나 사주를 보러 다니는 것도 사실은 결정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닌가? 다만, 그런 신앙과 기독교의 차이가 있다면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은 그 점괴가 절대적이라고 믿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이 절대적이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선택할 자유'도 주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개인의 영달과 성공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가장 차별화된다. 점을 보거나 운명을 알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얼마나 잘 나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점을 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일반적인 성공의 기준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다.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작은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나는 게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정치를 해서 그 안에서 성경적인 질서를 자리 잡게 하는 게 하나님의 계획일 수도 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반감이 생긴다면 그건 그 사람이 여전히 사회적인 기준으로 성공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가장 작고 낮은 곳에서 섬기도록 계획을 심어놓으셨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하는 데서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삶에서 실제로 돈이 아닌 게 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우리는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른 것에서 그 행복감을 누리고 느끼는지를 생각해 보면 뭔가가 없다고 믿는 게 오히려 더 큰 믿음이 아닐까?


나는 인간을 만든 신은 인간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정말 행복하고 즐거워하는 포인트를 찾기보다는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을 충족시키면 그것이 행복을 줄 것이라 믿고 그것들을, 잘못된 것들을 쫓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신은 너무 잔인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도록 계획하고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하나님께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 앞에서 치워달라고 하셨다. 그것보다... 더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까...


안 그래도 그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면... 예수님은 그 후에 부활을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다, 아니다에 대해서도 다양한 얘기들이 오가지만 이 시리즈에서 자주 말했듯이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게 이상한 게 아닐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 땅의 가치들에 너무 집착하지 마. 그게 전부가 아니야'라고 하나님이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왜 그렇게 여겨야 하냐고? 인간은 그걸 깨달아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신 안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계획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줄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이 별로 없네'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가지고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서 그 계획을 살아내야 한다. 그게 과업이나 의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사는 게 우리가 개인으로서 가장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을 테니까. 성경에 나오는 신은 인간이 행복하고 즐겁기를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처럼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성경이 설명하고, 전제하고 있는 몇 가지 전제만 기억하면 조화롭게 해석이 가능하다. 사랑과 창조, 타락이라는 전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전제해도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는 모순되지도, 어렵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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