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6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믿음이 좋다'라거나 '신앙이 좋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그런 표현들이 불편했다. 믿음이 좋다면서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이 좋은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믿음이 '무엇을 믿는 것인지'에 대해서 누구도 분명하게 설명해주지 않아서 누군가의 믿음이나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교회에서 만나신 부모님을 둔 아들로,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는 표현이지만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40년을 살아오며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다른 종교들도 들여다본 끝에 난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 하지만 나는 '믿음이 좋다'라거나 '신앙이 좋다'라는 말을 싫어하고, 그런 표현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이러한 표현을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갖는 의미, 그리고 믿음을 가지면 하게 되는 행동들을 생각해보면 믿음은 있거나 없는 것이지 좋고 나쁘고를 평가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신앙'은 '믿고 받드는 일'이라 정의되는데 개신교적인 신앙에서 신은 애초에 '받들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서 '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우리는 '신앙'과 '믿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고, 성경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믿음'은 사용해도 되는 표현이지만 '신앙'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는 분명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 믿음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엇인가를 '믿는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거나 어느 회사를 믿으면 어떻게 행동하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사람의 조언을 새겨듣고, 그의 조언을 따른다. 우리는 어느 회사를 믿으면 그 회사의 제품을 의심하지 않고 사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형성된다. 그 믿음의 기반은 '신뢰'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이 세상을 신이 만들었고, 성경에 그 신이 행한 일들이 기록되었으며, 세상을 만든 신은 성경에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이 크거나 작을 수도 있고, 있거나 없을 수는 있어도 좋거나 나쁠 수는 없다. 이는 크거나 작은 것, 그리고 있거나 없는 것은 양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가지고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있지만 좋고 나쁜 것은 질적이고 가치평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는지 여부를 따질 때 그 사람을 '많이 믿거나 믿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좋거나 나쁘다'는 식의 표현은 하지 않는데 유독 교회에서는 '믿음'에 대한 평가와 판단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건 분명 잘못된 표현이다.
그렇다면 믿음이 크다는 것,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더 많이 믿으면 믿을수록 그 사람이 말과 행동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당장 조금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어렸을 때는 누군가를 쉽게 믿고, 신뢰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를 믿고, 신뢰하는 건 어려워진다. 그리고 누군가를 더 많이 믿고, 신뢰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도 많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서로를 깊이 알아가야 한다. 두 사람 간의 믿음과 신뢰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시간을 통해 단단해진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갓 개신교나 성경을 접한 사람들은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경험하지 않아도 쉽게 '신자'가 된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사람들이 왜 한 종교의 거룩한 경전에 나오는 거지?'라는 의구심이 들게 되고, 나는 신을 믿는 것 같은데 신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내 인생에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고, 나쁜 놈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한국교회에서는 그렇게 흔들리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는데 그건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자는, 신이 가라고 했던 방향과 반대로 가지 않았던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성경에 나오는 자들은 수도 없이 하나님을 배신했고, 자신을 더 신뢰했으며,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아 분노하고, 원망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너희가 성공하게 해 줄 게'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신에게 대들고, 분노하고, 원망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경고하고 협박하는 신의 모습이 주로 나온다.
신에 대한 믿음은 성경을 읽고, 묻고, 의심하면서 그 안에서 나오는 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과 동시에 자신의 삶 속에서 여러 일을 통해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존재가 있고, 그가 내게 열어주는 길이 내게는 더 좋은, 행복한 길이구나'를 깨달아가면서 강하고, 깊어진다. 이 부분은 사실 꼭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우리가 생각보다 자신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닌 '무엇인가가' 작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럴 때면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개신교 신자로 사는 것은, 개신교 신자로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운명'을 계획하신 분이 있고,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며, 그분은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안다고 믿으며 사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어떤 시행착오도 없이, 한 치의 의심도 가져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생겨서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남녀관계를 놓고 생각해보자. 연애 초기에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커플은 없다. 연애 초기의 두 사람은 서로를 무조건 신뢰한다. 하지만 그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면들이 생기고, 작은 오해들이 생기며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낸다. 정말 좋은, 오래가는 커플은 그 과정을 대화와 다른 지점을 맞춰가는 방식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양보하며 적응해 나간다. 그러다 보면 두 사람 간에는 신뢰가 강해지고, 두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상대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
개신교에서 신과 인간 간의 관계가 이러한 연인과의 관계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신은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이며, 항상 옳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해보자, 신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믿을 가치가 있나? 신이라면 그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서 시행착오도 겪고, 실수도 하고, 의심도 하며, 믿지 않는 시간도 갖지만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커지고, 견고해질수록 인간은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고 힘든 일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게 된다.
그게 처음부터 잘, 많이, 완전히 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성경은 어떤 인간도 죽을 때까지 그게 완전히 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주신다는 것은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회개는 입술로, 말로만 하는 회개가 아니다. 누군가가 미안하다고 말해도 그 사람이 진짜 미안하지 않은 경우가 있듯이, 입술로만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회개는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를 의미한다.
다시 믿음 얘기로 돌아가자면,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인간의 이러한 특징 때문에 강해지고 깊어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고난이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 그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보고, 듣고, 알게 되면서 믿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는 신과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과정이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내가 잘 믿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몰라도 괜찮다. 그저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나아지면, 믿음이 조금씩 더 강해지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을 믿어주지 않는가? 아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신이 어리석을 정도로 인간을 많이 믿어주는 모습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된다. 신은 인간 안에 다양한 모습들이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게 세워진 계획을 찾아오길 바라며,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 자체가 사실은 신이 인간을 얼마나 믿는 지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 시리즈 이전 글들에서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 정도에서 정리하자.
개신교 신자는, 신을 더 많이 믿으면 믿을수록, 그 믿음이 강해질수록 덜 흔들린다. 인생에서 힘든 일이, 실패가 일어나더라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이 단축되고, 그 강도가 약해진다. 믿음이 크고, 강해질수록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은 게 아니라, 힘든 일과 실패가 그 사람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잘, 빨리 극복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일어나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진짜 믿음을 가진 자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지금 당장은 이해도 안 되고 화도 나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신이 그런 상황이 일어나도록 '허락'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고, 장기적으로, 방향적으로 나에게 더 맞고 좋은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그러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착각이나 잘못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고 가르치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 명제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과 나를 아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성립한다. 만약 그 '믿음'이 내 능력과 노력, 그리고 사회적인 기준으로 높고 좋은 것을 신이 자신에게 줄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일어난다고 해도 그게 축복은 아닐 수 있다.
이 기나긴 글의 이야기가 이해되지도,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면 이렇게 설명해 보자. 세상은, 사회는 돈을 많이 벌고, 권력과 명예를 얻으면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인생에 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모두 정말 행복한가? 그렇다면 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자살을 하거나, 이혼을 하고, 마약을 하는 경우들이 생길까? 돈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행복해야 하는데 돈을 번 사람들 중에서는 오히려 그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돈으로 더 큰 자극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이는 그들이 돈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훨씬 크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권력과 명예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와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다른 포인트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목표는 그 계획을 잡아내고, 그대로 사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사회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획일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가고, 우리의 생긴 모습대로 살아가기 위해 가는 과정에서 갈등하고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때도 묵묵히 버티면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창조'와 '계획'과 '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꽤나 견고해야 한다.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