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8편
개신교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 23절)'이라는 말씀이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책을 한 목사님께서 쓰셨을 정도로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표현은 개신교 안에서 꽤나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소화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다닌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개신교에서 말하는 이러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내 뜻은 완전히 버리고, 희생하고, 나를 눌러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순교하듯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니 기독교가 가학적인 종교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이 그렇게나 가학적인 존재라고 믿으면서까지 교회에 다니는 건 죄송하지만 생각이 없거나, 어리석거나, 사실은 기독교와 교회와 예수와 신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창세기에서는 분명 신이 세상을 다 창조하고 '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이 그렇게 가학적으로 자신을 강제로, 억지로 누르면서 사는 게 보기 좋다는 것인가? 아니면 아담이 죄를 짐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과 달라짐으로 인해 그 책임을 사람들에게 계속 물으면서 고통 속에 살게 하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해주셨나? 만약 신이 그런 존재라면 왜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나?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앞부분에서 말했지만 난 성경은 사후세계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설명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의 현실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현실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잠시 성경을 떠나서, 기독교라는 틀도 벗어나서 우리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을까? 세상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은 똑같고, 궁극적인 행복은 돈, 권력과 명예를 가지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공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돈, 권력과 명예를 쫓아간다. 하지만 돈, 권력과 명예 중 한 가지를 차지한 사람은 나머지 두 가지를 갖기 위해 발버둥 치고,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은 세 가지를 갖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 결국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들이 극소수 나오긴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하루, 하루를 바라보면 그들이 과연 행복한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들의 가족 중에는 마약을 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들려온다.
이러한 현실은 돈, 권력과 명예가 행복을 100%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왜 그럴까? 그건 돈, 권력과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희생하고 갉아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언제 돈을 쓰는가? 우리는 상대가 나에게 맞는 서비스나 제품을 제공할 때 돈을 지불한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것을 원하고, 좋아하는가?'를 많이 고민하고 그 기준에 나를 계속 맞춰나가야 한다. '시장조사'라는 건 결국 '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그 안에서 '나'는 없다.
명예와 권력은 다른가? 아니다. 명예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에 의존하면서 생기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지 손에 쥘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시대에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쨌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맞추고, 잘 보여야 한다. 명예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상당 시간 동안 상대에게 낮추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 자체가 사실 자신을 계속 갉아먹는 행위다.
그게 정말 '사는 것'일까? 그들이 '살아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행복한 방법에는 정답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행복에는 정답이 없다. 인간은, 우리는 모두 다른 지점에서 행복을 느끼고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다르다. 누군가는 단칸방에 살더라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정 수준 이상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다. 믿기 힘들겠지만 어떤 사람은 공부를 할 때 행복하고, 또 다른 사람은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그 과정에서 행복함을 느낀다. 우리는 그걸 일반적으로 '적성'이라고 부르고, 그걸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이라 부른다.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적성을 찾아서 그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다. 모든 밥벌이가 고되고 힘들지만 그래도 본인의 적성에 맞는 일로 밥벌이를 하면 그 과정에서라도 어느 정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힘은 들어도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자신을 희생하고, 버리면서까지 돈, 명예와 권력을 찾고 쫓는 삶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것을 쫓아서 사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스스로를 어느 정도 이상 갉아먹으면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삶'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성향과 경향에, 계획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다는 것은 사실 세상에서 내 안에 심어 놓은 돈, 명예, 권력에 대한 나의 욕구와 욕망을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심어놓으신 성향과 계획을 깨달아 알고 그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할 때 일정 수준 이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내 욕구와 욕망을 버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서 그에 따라 사는 삶은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지 엄청난 고난을 짊어지고 참아가면서 사는 삶이 아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부분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태복음 6장 26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너희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거야'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먹고사는 것은 걱정하지 마. 내가 안 먹이겠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정말 말 그대로 '먹고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부자가 되게 해 줄게'라는 약속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나는 먹고살기도 힘든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하는 분들은 한 번 곰곰이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기를 원한다. 본인이 정말 먹고사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가? 아니면 본인이 욕구하고 욕망하는 수준으로 먹고살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인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물어보자. 당신이 정말 힘든 상황에 있다면 자신이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더 많이 갖기 위해 욕구와 욕망에 가득해 무리해서 그렇게 된 것은 없는가?
그런 경우가 아닌 사람들도 물론 있다. 나 또한 그런 시기를 거쳤다. 대학원에 다닐 때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는 상황에 월세 43만 원을 내야 하는데 잔고가 67만 원을 찍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는 정말 하나님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더라.
그 순간에는 분명 그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도 나는 먹고살 수 있는 일들이 들어와 일 년 후에는 잔고가 1천만 원 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그런 과정을 경험한 게 내가 더 성장할 수 있게 해 줬고 내가 신과 세상과 나 자신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줬더라. 단기적으로는 그 상황이 저주 같았는데 장기적으로는 그게 내겐 축복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던 것은 내게 필요했고, 그 이유도 분명했었더라. 이는 힘든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경험들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신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지금도 통장 잔고는 내 나이에 비해서 매우 적지만 내 인생은 내게 꽤나 잘 맞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나는 힘은 들지만 행복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던 수많은 시간을 지나 지금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함을 갖고 살아간다.
성경에서는 세상은 절대 만만치 않고, 인간은 나약해서 그 흐름에 쉽게 휘둘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버티면, 우리가 신에게 묻고, 우리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을 그 안에서 하면 신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가장 맞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단기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힘든 일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또한 우리에게 가장 맞고 좋은 길로 가기 위함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논리, 욕구와 욕망보다 그런 신을 믿으면서 지금 당장은 이해되지 않는 길을 걸어가라고 성경은 권한다. 그런 삶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의 발걸음이란 어떤 삶인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장 36절)이라고 하신데 더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부활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의 욕구와 욕망, 생각들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놓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끝에는 우리 개개인에게 가장 잘 맞는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신뢰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의 적성과 성향을 알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자 잘 맞고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 안에 심겨 있는 하나님의 계획(적성과 성향)을 있는 그대로 살아내면서, 각자 최대치로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그러한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서 11장에서 말하는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는 그럴 때야 비로소 올 것이고, 그게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하나님 나라)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은 '힘들고 고통스럽게 버티면서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돈, 명예, 권력을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획일화된 가치관에 젖어서 살다 보니 우리 안에 있는 성향과 적성을 따라가는 길을 가는 게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고, 그건 엄연히 말하면 신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도, 자신도, 신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의 미숙함으로 인해 생기는 어려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러한 순간순간에도 '하나님은 선하고 우리에게 가장 맞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뢰하면서 그 과정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거나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현실적이고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