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9편
근대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른 지점에 주목하겠지만, 근대국가의 키워드 두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개인]과 [자유]를 선택하겠다. 이는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기준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사회에서는 군주가 존재하고,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며, 개인은 신분에 따라 도구적인 존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근대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제도와 조치들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이는 근대국가에서는 개인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과 '자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이는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개인의 의사대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무엇인가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개인을 구속하는 대상은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개인을 외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이나 환경들이다. 개인보다 국가, 사회나 가족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국가, 사회, 가족의 안녕을 위해 개인을 구속했던 시절들이 있고, 그러한 구속은 보통 법제도들을 통해 이뤄져 왔다.
개신교가 유대교와 가장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이 지점이다. 유대교는 흔히들 '율법'이라고 부르는 원칙들에 개인을 구속시켰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율법들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요구한다. 이 지점이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착각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점인데, 성경에서는 율법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는 내용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같이 들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맥락적으로 읽어보면 이는 율법 자체가 문제인 게 아니라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 내용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들은 일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는 있다. 이는 그 내용에 벗어난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 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시대와 사회적 특성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 그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바울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라는 고린도전서 6장 12절의 말씀은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이 갖는 위치와 의미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가 잠깐 옆으로 갔는데, 다시 개인과 자유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 보자. 오늘날에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러한 개인과 자유에 대한 생각들의 시작점은 어디일까? 그 시작점은 16-17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바울이 개인과 자유를 강조했지만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의 구교(천주교)는 중앙에서 권력을 독점하며 실질적으로 개인들을 율법에 구속하고 있었다. 금전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들의 죄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죄를 면해준다면서 발행한 '면죄부'는 당시 구교가 얼마나 타락하고 성경에서 멀어져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개인을 돈과 재물에 구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보인 행보와 가르침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은 그러한 구교의 문화와 가르침에 반대하며 모든 신자는 평등하다는 교리인 '만인제사장설'을 포함하여 종교를 권력화 시킨 세력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인,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도 흔하게 듣는 개인,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 발전해 나가는 시작점은 종교개혁운동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을 계기로 유럽의 종교지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지형의 변화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변화들은 각종 혁명과 운동으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법제도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 부분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박사과정에서 헌법의 세부 전공을 전공했고, 대학원 과정에서 근대 헌법에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수업을 들었는데 그 시작점이 항상 종교개혁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는 시행착오들과 실수, 잘못된 행위들도 있었다. 제국주의의 팽창과 식민지에서 이뤄진 잔혹한 일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독교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에 동의하기 힘들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난 상태'로 '죄'를 갖고 있는 인간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이 결합되어 일어나는데, 그러한 일들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런 일들을 적극적으로 야기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고 좋아하시며 원하시는 다른 방법이 있었지만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난 인간이 그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고 방치하신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걸 허락하신 것일까? 그 과정에서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으신 것일까? 아니다. 이 시리즈의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광경을 보시면서 누구보다 아파하고, 힘들어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데 그건 인간을, 그렇게 악한 행위를 하는 인간도 사랑하셔서 믿고, 신뢰하시며 자유를 허락하고 계신 것이다. 그들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은 모든 자들을 동등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만약 신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인간은 모두 처벌한다고 생각해보자, 신의 그러한 개입은 사랑인가? 그렇게 개입을 계속하다 보면 이 땅의 질서가 어떻게 될까? 그렇게 개입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장난감이나 도구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신은, 하나님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모두 평등하게, 동등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본인의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을 허락하고 계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반드시 더 선한 일들을 행하신다. 결코 그런 일들이 헛되게 개인의 죽음이나 희생으로 끝나고 두지 않으신다.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고통스러운 일들을 계기로 인해 법제도가 정비되어 그런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경우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는가? 그러한 변화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에 가장 큰 흐름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개인과 자유를 중시하고 평등이 강조되는 사회적 흐름과 법제도의 변화들이다. 우리는 오늘날 개인, 자유와 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분제를 당연시하고, 국가와 사회와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오늘날에도 법제도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지 않은 국가와 사회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법제도적으로는 신분제가 폐지되었어도 많은 국가와 사회에서는 실질적으로 신분제가 유지되고 있지 않나? 그러한 현실은 집단주의적이고 위계질서가 강조되는 문화가 우리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도는 물론이고 사회적인 변화는 큰 틀에서 개인과 자유와 평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에 반하는 문화가 워낙 오랫동안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발은 강하고, 변화의 속도는 더디지만 인류가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70-80년대에 비해서 얼마나 개인과 자유와 평등이 강조되고 있는지만 봐도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개인주의로 정당화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개인은 모두 평등하기에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개인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가 개인과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 정도로 그 변화의 방향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어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나는 박사과정에서 코스웍으로 '평등'에 대해서만 세 학기 동안 수업을 들으며 수 십 개의 리딩을 소화해야 했고, 내가 코스웍을 마친 후 그 강의를 개설하신 교수님은 세 학기 동안 '자유'에 대해서 수업을 진행하셨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스치듯이 지나가며 가볍게 생각하지만 자유와 평등은 여전히 새롭고 복잡한 지점들이 많고,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서 자유와 평등을 해석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흐름은 개인과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 시작점에는 개신교가 만들어진 종교개혁이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는 개인과 자유와 평등은 종교개혁 이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름이 만들어진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계속 쳐서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러한 흐름이 만들어진 지 50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단주의적이고 개인을 억압하며 불평등을 추구하는 법제도와 사회문화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그러한 문화가 얼마나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흐름은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러한 흐름과 성경의 가르침이 일치된다는 것을 발견하면 개신교 신자로 남지 않기가 힘들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나는 의심이 많았고, 다른 종교들도 들여다보면서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개신교라는 종교에는 회의를 품기도 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사과정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법제도들이 근대화되고 변화되는 역사적 흐름을 보면서 나는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 이는 그 흐름이 너무나도 성경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바울이 강조한 가치들과 방향성이 반영되고 부각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런데 그 신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이 아니라면, 신이 다른 종교가 주장하고 가르치는 모습대로 존재한다면 인류의 문화와 법제도들의 변화의 흐름이 왜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까? 신이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존재라면. 그건 말이 안 된다. 이러한 흐름과 변화는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드러나는 가르침들이 진리여야만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개신교 신자로 남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