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1편
기독교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 중 한 가지는 자신의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헌금으로 내는 십일조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지 못하겠다는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십일조다. 자신이 소득의 무려 십 분의 일을 헌금으로 교회에 바쳐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각보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의 주장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그 내신 것을 보고 더 좋은 것을 많이 주신다"라고 믿으며 그래서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 그것도 굉장히 위험한 거짓말이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런 샤머니즘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렇게 믿는 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샤먼으로 전락시키는 사고방식이다.
성경에는 분명 십일조에 대해서 나온다. '하나님'께 십 분의 일을 드리는 첫 말씀은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한 것이고, 레위기 27장 30절에는 "... 그 땅의 십 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 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이라고 나온다.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근거로 '신은 소득의 십 분의 일을 요구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그 돈을 받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한국교회 중 일부 교회들은 마치 교회가 신의 대리인인 것처럼 말하면서 십일조를 반드시 내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마치 면죄부를 받지 못할 것처럼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은 이 땅에 살지 않는데 그 돈을 받아서 어디에 쓰겠나?
그런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도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율법주의적으로, 강압적으로 십일조를 낼 것을 요구하는 것을 비판하셨는데 이는 마태복음 23장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은 누가복음 11장에도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도 나온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는 왜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됐을까? 하나님은 왜 십일조를 '나의 것'이라고까지 하면서 십일조 내지 않는 것을 말라기 3장에서 '도둑질'이라고까지 하면서 십일조를 강조하셨을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방식과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 사람들이 글을 읽거나 쓰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은 12지파로 나뉘어 땅을 받기 전까지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고 살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삶은 안정되지 못했고, 그 결과 신체적으로 약한 자들이 단순히 가난한 것을 넘어서 굶어 죽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12지파가 땅을 분배받은 뒤에는 레위인들의 경우 어떠한 경제활동도 하지 않고 오롯이 제사를 드리는데 집중하도록 임무가 주어졌다.
십일조들은 그렇게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고 제사에 집중하도록 임무를 받은 자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는 신명기 14장에서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라고 말하고 있는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했냐고? 그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밝히고 있는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가장 약한 자들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면 약한 자들과 하나님과의 소통에만 집중하도록 소명을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공동체로서 배려하고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일조를 내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란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세금의 일종으로 분류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사용하는 것을 사회보장제도라고 부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십일조를 통해서 마련했다는 점에서 십일조는 세금적인 요소를 분명히 갖는다. 하지만 십일조는 국가와 같은 중앙집권적인 권력, 시스템과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십일조는 세금과 성격을 분명히 달리 한다.
성경에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너희끼리 사랑하라'는 명령의 연장선에 있다. 하나의 공동체로 부름 받았으니 스스로 노동을 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자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중심을 잡고 그 일에 집중하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라는 것이 십일조의 정신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라'라는 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면 십일조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율법적으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란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것도 아니지 않나? 헌금이, 십일조가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에 십일조를 한다고 해서 그게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일부 한국교회들이 입증하고 있지 않나? 성도들이 아끼고 허리띠를 조여가며 낸 헌금으로 목회자들은 배룰 채우는 것을 넘어서 명품가방, 차를 소유하고 심지어 자녀들에게 그 부를 세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의 유일한 수입원은 헌금이다. 이것만 봐도 십일조를 교회에 반드시 내는 것이 곧 성경적인 일을 하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십일조를 전혀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십일조를 내는 것은 이 땅에서는 자신의 이웃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손에 들어온 물질을 '사랑으로' 나누는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이 땅의 것보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고백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입 중 일정 부분을 사회에 필요한 곳에 흘려보내는 훈련은 스스로 물질에 구속되어 있지 않게 해주는 훈련의 효과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라면 하는 게 낫고, 사실 정말 하나님 안에 거한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굳이 없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십일조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돈을 더 갖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일조를 내고 싶지 않은 마음 이면에는 물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있다. 만약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있다면 우리는 물질을 손에 움켜쥐려 하지 않고 더 약한 자들, 필요한 자들을 위해 기꺼이 물질을 흘려보낼 것이다.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채워주실 것을 믿고.
그렇다고 해서 번 돈을 모두 헌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거나, 스스로 높아지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렇게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면 더 많은 물질을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렇게 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게 요구받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러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한 후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라고 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물으며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어디로 이끄시는지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물질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반드시 출석하는 교회에 내야만 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 목사님의 경우 대놓고 '십일조를 교회에 반드시 안 해도 된다. 그 돈으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도 된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게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매년 조금씩 고정 기부처와 기관을 늘려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운영되냐고? 오늘날 교회들은 이 지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가 정말로 성도들을 잘 섬기고,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깊이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면 성도들은 십일조 이상도 헌금을 할 수 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물질이 간다'는 말은 긍정적인 측면만 갖지는 않지만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사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 안에서 진정한 형제, 자매가 되어가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면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여부는 애초에 논쟁거리가 될 필요가 없다. 자신의 가족, 특히 자녀를 위해서 물질을 아낄 사람이 거의 없듯이 교회가 정말 '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면 성도들은 기꺼이 십일조 이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아니 수 십 년째 한국교회에서 십일조가 이렇게 논쟁이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공동체가 되지 못했고 성도들끼리 입으로는 형제님, 자매님이라고는 부르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그렇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렇게 힘들게 십 분의 일을 교회에 냈는데 그 헌금을 가지고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이 먹지 못하는 고급음식을 먹고, 고급차를 타고 다니고, 돈을 긁어모아서 세습까지 하니 누가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싶겠나? 나라도 그런 교회에 다니면 천 원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십일조를 내라고 강제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교회는 그만큼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말 작아서 재정적으로 힘든 교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교회들은 교단 차원에서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형태로 운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아도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말을 하면 '그렇다면 목회자들은 무조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게 더 바람직하다'라고 답하겠다. 뒤에 목회자들에 대한 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목회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사례비는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윤창출이 주된 목표이고, 이윤창출을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잘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돈을 더 주고 채용한다. 교회는 이와 달리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로 사는 것'이 목표다. 그런 공동체에서 정말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의 일부를 헌금으로 낸 돈으로 사례비를 받으면서 그들보다 더 사치스럽게 사는 건 절대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것은 성도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과한 삶을 살다 보면 결국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혀서 교회를 마치 회사처럼 여기며 성도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나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은 그걸 말해주고 있는 책이 아닌가?
목회자라면 '정말 필요한 물질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거야'라는 정도의 믿음은 있어야 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물질적인 이익은 어느 정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본인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대천덕 신부님이 태백에 예수원을 세운 것이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구석인 태백에 들어가 있어도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믿음의 실험을 한 것 때문이라고 하지 않나? 한 공동체를 온전히 섬기려면 하나님에 대한 그 정도 믿음과 신뢰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십일조에 대한 논쟁은 성도와 목회자 안에 모두 물질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너무 커서, 그 욕구와 욕망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사랑보다 크기 때문에 일어난다. 십일조가 아까워서 내지 않으려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제대로 된 교회공동체를 말씀 안에서 세우지 못하고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강요하는 목회자들이 더 문제다. 이는 목회자들과 교회가 바로 서 있다면, 신뢰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지금보다는 많은 성도들이 기꺼이 십일조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은 마음이 가는 곳으로 흘러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