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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지 않는 '자칭'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20편

by Simon de Cyrene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과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을 구분해서 사용한다. 이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인과 외국인이 있듯이 매주 교회에 출석하더라도 진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기에 힘쓰고 성경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기독교를 샤머니즘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교회 다니고 헌금하는 것을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와 기독교가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기독교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부를까? 누군가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한국말을 할 줄 알고,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외국인들도 할 줄 안다. 한국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귀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외국인이 한국으로 귀화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과 면접까지 봐야 한다. 필기시험의 경우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 역사,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질문들까지 있는데, 이는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만큼 한국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기독교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독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성경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성경을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 한다. 귀화시험을 보고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한국학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신학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도 '기독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필요하단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 아니 어쩌면 상당수는 성경공부를 하기는커녕 읽지도 않는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저 일요일에 교회에 한 번 가서 예배를 드리는 수준에 머무르거나 그보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교회 모임들에 참여는 하지만 정작 성경은 읽지 않는다. 성경은 설교를 통해 접하는 게 전부인 경우가 많은데 사실 설교는 엄연히 말하면 성경이 아니라 목회자의 주관이 개입된 해석이기 때문에 그 내용 자체가 기독교의 본질과 관련되어있다고 할 수는 없다.


목회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 특히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기보다 교회 행정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자신의 주관에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설교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설교가 곧 성경말씀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판적으로 듣고, 이해가 안 되거나 궁금한 것은 목회자에게 묻고 확인해야 한다. 이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목회자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고, 잘못된 설교를 할 수 있다. 개신교에서 목회자는 초월적이고 우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개신교 신자라면 목회자에게 궁금하고 모르겠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의심하고, 묻고, 따져도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음 없는 자가 되는 게 아니다. 만약 그렇게 따지는 성도가 기독교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이해시키는 것도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주어진 책임과 임무다.


내가 지금 출석하고 섬기는 교회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 교회의 목사님께서 가장 자주 하시는 말씀 때문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은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 나도 믿지 말고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만 믿어라'라고 하신다. 공개적으로 본인도 믿지 말라고, 본인도 잘못하고 실수하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하시는 게 좋아서,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흩어지게 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셔서 나는 지금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 교회의 또 다른 특징은 떠나는 사람을 막지 않는단 것이다. 최근에는 나와 같은 소그룹에 속한 분들 중에 절반 이상이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다른 교회로 옮기셨는데, 그 과정에서 떠나신 분들은 자신이 다른 교회로 떠날 것임을 이야기했고, 떠나기 전에 우리 교회에서 본인과 본인의 자녀가 세례를 받기도 했다. 그들이 떠난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 교회 목사님들은 기꺼이 세례를 주셨고, 축복하며 그분들을 보내드렸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노력하고, 마치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이 엄청난 죄악인 것처럼 말하면서 사람들을 구속한다. 그런데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교회에 속하고 머물렀는가?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도들은 유럽과 서아시아 지역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들은 도대체 왜 성도들을 구속하고 붙들어 놓으려고 난리일까? 이에 대해서는 십일조 얘기를 하면서 조금 더 깊게 다룰 테니 일단 여기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그런 한국교회의 문화와 구조가 문제인 것은 그 과정에서 목회자가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절대적인 존재가 되다 보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목회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받고, 그렇다 보니 오늘날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목회자에게 묻고, 의심하고 따질 수가 없게 된다. 이성과 합리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의심하고 물어보면 '의심하지 마라, 그냥 믿어라'라고 강조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왜 교회에 머무르겠나? 그런 얘기를 하면 목회자들 중 상당수는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성경도 엄청나게 깊게 읽거나 공부하지 않은 나도 성경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신학까지 공부하고 목사 안수까지 받은 사람들이 믿음을 그렇게 맹목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본인이 껍데기만 목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을 목회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는 결국 성경을 읽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호칭은 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도 모르고,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fact)은 알아도 그 함의는 모르니 성경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한글은 알지만 한국어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한글을 쓸 줄은 알아도 한국어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을 한국인이라고 하기는 힘들 듯이, 성경에 기록된 사실만을 알고 그 의미는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처럼 성경을 읽지 않아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음으로 인한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내용이 왜곡된단 것이다. 성경은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 신과 예수님이 어떠한 존재이며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야 하는 지를 전제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성경을 읽지 않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에서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부분만을 잘라서 자신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한다. 소위 말하는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그러한 패턴을 보인다.


그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는 마태복은 7장 7-8절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주실 거야'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는 맥락적으로 봤을 때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 바로 위에 1절에서 6절까지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을 담고 있고 9절 뒤에는 하나님은 너에게 가장 좋을 것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네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네가 원하는 것은 주지 않을 수 있지만 주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라는 의미다. 그리고 같은 장에 더 뒤에 가면 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겉으로만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이 모든 내용의 전제가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7-8절의 말씀은 절대로 '네가 열심히 달라고 하면 내가 줄게'로 해석될 수가 없다.


이러한 예시들은 성경 안에 수두룩하다. 잠언 16장 3절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이 말씀도 '교회에 다니면 네가 성공하게 해 줄게'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바로 앞에 2절에는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결국 어떤 마음으로 구하는지가 핵심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는 않고 결과만 잘라서 편집해서 적용한다. 그리고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라는 것은 '네가 계획하고 네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부분은 무시하고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에만 초점을 맞춘다.


요한복음은 15장 7절에서 분명하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시기 위한 전제는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 간에 간극이 있다는 것은 성경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 부분은 무시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을 해석, 적용하며 교회에 다닌다.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나?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더 알고 싶어 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람을 알아가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그 사람과 시간을 많이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깊게, 잘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갈 수 있는가? 교회에서 사역을 많이 하면 더 깊게, 많이, 잘 알게 되나? 아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더 알아가게 되나?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가면 더 잘 알게 되나? 아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주에 들은 설교를 교회를 빠져나오면서 잊어버린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가기 위한 유일한 1차 자료는 성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예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고,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정말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우리는 상대와 연애를 해도 상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상대를 소유하고, 상대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상대를 더 깊게 알아가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상대가 데이트하고, 데이트 끝에는 잠자리는 항상 요구하지만 대화를 하지도 않고 본인의 마음과 현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채울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에는 다니지만 항상 본인이 원하는 것만 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위해 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ps. 성경 안에 있는 내용에 대한 지식의 양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지식의 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지식의 양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더 모르게 되기도 하는 것을 나는 자주 봐 왔다. 그보다는 성경 안에서 보이는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해가 어떻게 완벽하겠나? 그 이해의 수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더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단 것이다. 그런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오늘날에는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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