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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하나님 나라'와 천국

[예수를 신의 아들로 믿는 이유] 17편

by Simon de Cyrene

[개신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전도'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가 아닐까 싶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인으로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전도한 적이 없다. 초등학생 시절에 교회에서는 '전도 대잔치'라는 것을 했는데 난 친구들을 데려오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강압적으로 친구들을 데려오라는 분위기가 싫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교회 다니는 나도 사회에서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짓거리가 마음에 안 들다 보니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게 너무 이해가 되어 누구에게도 교회에 나오라고 설득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개신교 신자임을 숨기고 다닌 것은 아니다. 난 어디에 가도 개신교 신자임을 밝혔고, 심지어 첫 직장에서는 책상 위에 성경책을 꽂아두기도 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여자분들이 접대하시는 술자리에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랬기 때문이더라. 딱 한 번, 나의 종교적 색을 모르는 형이 '바에 가자'라고 해서 문 앞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런 술집인지 모르고 있다가 거기에서 정색하고 빠질 수가 없어서 잠시 갔던 적은 있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내게 그런 술집에 가자고 제안을 한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에 대한 신뢰가 일정 수준 이상되거나 어느 정도 친해진 사람들은 내게 개신교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들을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말해주면 가장 자주 들었던 얘기는 '너랑은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해도 말이 통해서 좋다'는 것이었다.


'전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내 역할은 거기까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교회에서 '전도'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전도'가 자신들이 한 번 나가서 말하고, 노력해서 끌고 오는 것으로 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지 않은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상식에도 벗어나는 일을 하고, 말을 하는 요즘 시대에 한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누군가가 개신교에 관심을 갖고 발을 내딛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러기 위해서는 그전에 좋은, 신뢰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내가 가진 성향과 재능은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보다는 이 글과 지인들의 대화에서처럼 한국교회들이 왜곡한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지점들을 바로잡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극히 부족한 사람이어서 삶으로 누군가를 감동, 감화시킬 자신도 없고,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개신교와 개신교에서 말하는 신과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는 것 밖에 하지 못한다. 내 역할은 거기까지고, 나머지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개신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아니, 애초에 왜 전도를 하느냐?'라고 물을 텐데, 그건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전도가 왜곡된 측면'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왜곡이 일어나기 전에 '진실'에 대한 부분이다.


개신교 교회들이 전도에 그렇게 열심이게 된 것은 개신교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십자군 전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그러한 노력들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해석에 기반하고 있다. 개신교 교회들의 전도와 십자군 전쟁은 '숫자'와 '기독교인이라는 껍데기'가 많아지는 것에 집착하면서 나타나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어디에도 그렇게 숫자를 늘리고 정복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전쟁들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했었지 '세력을 확산하고 숫자를 늘리기 위한 전쟁'은 벌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곳에서 숫자에 집착하지 말라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이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을 모으고 유지하는데 집착하지 않으셨다. 숫자와 규모에 집착하는 것은 성경에서 신이 추구하고,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력욕에 기반한 '성경적이지 않은'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세력을 확장한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의 탈을 쓰고, 개인의 욕망을 종교로 포장한' 전쟁이었고, '숫자'에 집착하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사업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으로 포장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러한 오해와 잘못된 해석은 왜 나오게 된 것일까?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신약의 가르침과 명령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일까? 그 지점은 개신교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잘못된 명제인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관련되어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에 나와 있는 '천국'이나 '천당'이란 표현이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로 어떤 표현과 의미인지를 알아야 한다. 천국의 헬라어는 `ouranos'인데, 이는 '만왕의 왕이 절대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한글로 '천국'이라고 읽는 것은 '사후세계에 특정한 상태'에 국한된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더 정확한 표현이었겠지만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너무나 신성한 것이어서 가볍게 사용할 수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 의하면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사후세계뿐 아니라 현세에서 이뤄야 하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가자. 그 구호는 사실일까?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무슨 소리냐고? 이 시리즈 앞의 글들에서도 설명했지만 성경은 사후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내용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내용은 철저히 인간과 신이 어떤 존재이며 그 관계가 어떤지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는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어떤지 모르고, 어떤 기준으로 누가 갈 수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 그에 대해서 신학자들이야 다양한 해석과 주장을 할 수 있지만 그건 신학자들 개인의 견해일 뿐이고, 성경의 내용만 놓고 봤을 때는 그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지어질 수 없다.


내가 천주교(구교) 신자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연옥'이라는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위적인 개념을 만들어서 이론화시킨 것이었다. 우리는 사후세계에 대해 알 수 없다. 학자들이 해석을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해석일 뿐이고, 성경은 그 디테일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이게 팩트다. 우리는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만드신 질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창조와 타락'이 신이 만든 질서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면, '하나님 나라'는 그 망가진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땅에서, 현실에서 그 질서를 회복시키는 게 개신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소명이다. 그런데 그 질서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신을 알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전도'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생각해보자. 과연 입으로 '하나님, 하나님'을 외치면서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상식 밖의 일과 행동을 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사람들이 교회에, 하나님에, 예수님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그들보다 더 성실하게, 열심히, 선하게,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개신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만들까? 당연히 후자다. 입 밖으로 '하나님, 하나님' 거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방향과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정말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전도는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눠주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푯말을 들고 서 있고, 거의 강압적으로 교회에 끌고 나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부터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가치와 방향이 바뀐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다른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좇을 때, 세상은, 사회는 그러지 않는 것을 어리석다고 여길 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며 사람을 위하고, 사랑을 전하며, 기꺼이 희생하고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게 성경적인 삶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삶이다.


전도지를 뿌리고 강압적으로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은 당장 숫자를 늘려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기준에서 전도일뿐이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을 기준으로 봤을 때 전도가 이뤄진 상태가 아니다. 그렇게 숫자를 늘리는 것과 동아리에 가입자를 늘리는 건 본질적으로 다른 게 하나도 없다.


누군가를 교회에 데려오고, 전도를 하기 전에 본인부터 말씀을 제대로 알고, 성경이 말하는 가치와 방향대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삶을 살다 보면 전도는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순간, 순간을 '잘'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개신교 신자라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믿고, 그 부분은 하나님의 영역이지 나의 힘과 노력으로 되지도 않지만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영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하루,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교회에서는 믿음이 우선인지, 행위가 바뀌는 게 우선인지에 대해 아직도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처럼 어리석은 논란도 드물다. 남녀관계를 놓고 생각해보자. A가 B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A가 B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A는 B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일단 B에게 잘해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마음도 계속 잘해주다 보면 사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누구도 A의 마음에 대해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만약 A가 B를 정말 사랑한다면, A는 B에게 잘해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A가 B에게 잘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A가 B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는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겉으로 선한 모습을 보이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행동은 악할 수도, 돈과 명예와 권력을 좇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입으로는 온갖 좋은 말을 하고, 기부를 하지만 직장에서 악덕 상사이거나 게으르다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해 불법을 저지른다면 그 사람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행위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성경의 기준과 방향에서 벗어난 행위'는 최소한 그 사람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말씀에 따라 살려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된다.


이는 그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나가고 있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후에 가는 곳이기 이전에, 우리의 '오늘' 속에 먼저 만들어져야 할 세상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그런 '오늘'을 사는 사람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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