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보는 세상. 2편.
실패는 절대 그 자체로 선물이 될 수 없다. '고난은 축복'이라는 말도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한테 할 말이 아니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도 청춘이 아닌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이는 실패도, 고난, 아픔도 절대로 그 자체로 선물도, 축복도, 청춘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창 실패와 고난과 아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치유되지 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그 상처를 칼로 헤집는 것과 같은 짓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내가 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것을 잘할 것을 요구받으며 자랐다. 명문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셨고 당연히 서울대에 갈 줄 아셨지만 가지 못하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살다 보면 그런 요구가 끊어질 수가 없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해외에서 외국인학교를 다니며 중학교 학생회장이 되어도 내게 돌아오는 말은 '여러 나라 사람들 있는데 한국 사람이 학생회장이 되었으면 공부도 잘해야 하는 것 알지?'였고, 부모님은 SKY는 나와야 한다며 재수를 하라고 하셔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재수를 해서 대학에 진학한 후 내가 다니는 학교를 좋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자 내자 내게 돌아온 말은 '나는 00 대학교는 원서도 안 넣었어'였다. 당시에 재수를 하던 내 동생이 듣고 힘들어할까 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는 하지만 그 말은 비수처럼 꽂혀서 내 안에 큰 상처로 남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학점도 잘 받았으며, 부모님이 요구한 대로 휴학 한 번 하지 않고 졸업을 해 당시에 신입사원 연봉 1, 2위를 다투던 회사에 취업을 했다. 평생 회사원이셨던 아버지는 내 첫 해 연봉과 보너스가 말이 안 된다며 놀라셨고, 내가 평생 그 회사에 다니며 대기업 임원이 되어 아버지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줬으면 하셨다. 하지만 난 2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고, 아버지는 그 점이 섭섭하고 내가 철이 없다고 생각하셨지만 어머니는 회사원으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고 어머니의 기준에서 더 좋은 길을 가게 되었다 보니 어머니도 만족하고 주위에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나의 성공은 거기까지였다. 그 후에 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전체를 실패에 실패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경주마처럼 달리며 내 안에 입혀졌던 상처들이 터져 나왔고, 그로 인해 부모님과 같은 집에 살면서 몇 달 동안 말 한마디를 안 하기도 했으며 우리 집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큰소리가 나곤 했다. 아버지는 다니시던 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하신 후 중소기업 몇 곳을 다니시다 후배가 차린 회사에 고문으로 들어가셨고,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대기업에 다니실 때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쓰는 입장이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은 아직 대학생이었다.
그랬다 보니 내게 30대는 암흑의 시간이었다. 항상 높은 곳을 보고,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쌓여 목표지향적으로 살면서 그 목표를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달성하며 살았다 보니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내 인생은 다른 누구보다 내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회사 동기들은 하나, 둘씩 결혼하고 억대 연봉을 찍는데 나는 여전히 구석에 박혀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내 로스쿨 동기들도 상당수는 대형 로펌에 취업하고 대부분이 억대 연봉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구석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 또래들이 결혼하는 것을 넘어 한참 어린 동생들도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모습을 보며 서른 전에는 반드시 결혼하고 싶었던 나는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말도 참 많았다. 제대로 공부한 것은 맞냐, 왜 잘 안 되는 것 같냐, 이제는 그만하는 게 낫지 않겠냐 등등.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어설프게 위로하려는 말들은 다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내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고, 나는 점점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하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 또 사람들을 만나면 거의 반사적으로 말을 많이 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얼마나 외로운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 공간에 털어놓을 수 있지만, 그때는 내가 다시는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진 것으로 여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것에 일단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가정형편이 완전히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보니 학교 안팎에서 일을 하면서 버텨야만 했다. 여러 상황으로 인해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도 그냥 되는 것은 없었다. 내가 준비하고, 알아보고, 지원한 것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 원하는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는지... 소설도 그렇게 쓰면 욕먹을 정도로 이상하게 나는 30대 내내 내가 원하고 노력했던 것은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했다. 사실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듯 어딘가에 뭔가를 풀어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으로 마흔이 된 지금,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길이 내게 더 맞는 길로 나를 이끌어주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어머니와 대화를 할 때면 항상 하는 말인데, 나는 사실 지금까지 먹고살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낼 때도, 내가 지원하고 가려는 곳에는 가지 못할 때도 신기할 정도로 일하고 돈을 벌 기회들이 나를 찾아왔다. 박사과정에 있을 때도 그랬고, 박사학위를 받고 3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그랬다. 월세와 관리비 43만 원짜리 원룸에 자취를 할 때 잔고가 67만 원까지 내려간 적도 있고, 20대에 1억 원도 찍었던 내 통장 잔고는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한 상태로 바닥을 기고 있지만 잔고가 완전히 마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어둡고 두려웠던 길은 단순히 나를 굶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찾아갈 수 있게 해 줬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 보니 어떻게든 살 이유를 찾아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내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놓고 고민하고 기도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린 시절부터 내가 지금까지 내렸던 의사결정, 느꼈던 감정을 반복해서 돌아보면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꽤나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통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했던, 수도 없이 죽음을 묵상하고 아마 가족이 없었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지 모르는 시간을 지나고 나서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면 감사만 남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뤄졌다면 내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았을지가 보이고, 절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그만둔 후 2-3년 정도는 엄청나게 후회를 했고, 10년이 지났을 때도 가끔씩 아쉬웠다가 3-4년 전부터는 그 아쉬움이 사라졌다. 그래도 회사를 그만두기 잘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아직 회사를 다니는 동기를 올해 만나 회사생활을 들으면서 회사를 그만두기 잘했다는 생각을 처음 했고, 변호사가 된 지도 10년이 되어가는 로스쿨 동기들의 삶을 지금 이 시점에 보면서 지금 나의 삶이 내게 더 맞다는 확신이 든다. 내가 그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도, 성공을 해서도, 자리를 잡아서도 아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터널을 지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내게 더 맞다는 확신이 이제는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오는 과정에서 내가 한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것. 일단 주어진 것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더 행복해지고, 이 일들을 내게 더 좋은 일이 되도록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러다 보니 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시간들이 내게 축복이 되어 돌아왔다. 그 끝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도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내 삶이 완성되지도 않았고, 아직 갈 길도 멀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내게 맞는 길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제는, 이제야 그 시간이 감사하고, 축복으로 여겨지며, 청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그 시간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축복으로 여기라면서 청춘이었다고 한다면 그건 폭력이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시간과 경험이 어떠한 지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 어떤 평가나 판단도 해서는 안된다. 그저 수고했다고, 다행이라고, 축하한다고 해주는 것 정도가 그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해도 되는 말이다. 그 고통도,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오롯이 그 당사자가 책임져야 할 무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해 줄 수 있는, 해도 되는 말은 없다.
실패는, 고난은, 아픔은 그냥 저절로 선물이, 축복이, 청춘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냉장고에 있는 자투리 음식물을 '아무 쓸데없다'라고 버릴 때 누군가는 그 재료들을 가지고 레스토랑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실패와 고난과 아픔은 당사자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선물도, 축복도, 청춘도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원리와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설명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