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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un 09. 2023

많은 부모님들이 착각하는 것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내가 널 위해 얼마나 희생을 많이 했는데!'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우리나라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꽤나 자주 하는 말들이다. 그런데 한 걸음 물러나서 생각해 보자. 이 말들, 사실인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열심히 일했다는 부모님은 아이가 없었다면 다른 일을 했을까? 다른 일을 했다면 성공이 보장되어 있었을까?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했던 일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고, 모든 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부모님의 말도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런 말을 하는 부모님들은 정말로 오롯이 아이만을 위해서 본인을 '희생'했을까? 그 아이를 통해서 본인이 성취를 이뤄내고 싶은 마음은 콩알만큼도 없었을까? 그리고 그런 말을 하는 부모님이 아이에게 요구 혹은 강요하는 것이 정말 아이를 위해서 좋은 일일까?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확률이 더 높다.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면서 회사생활을 했다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어차피 본인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회사에 다녀야 했을 수 있다. 그리고 꽤나 좋은 대기업에 2년 다니고 그만둬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신에게 맞는 다른 분명한 일이 있는 사람은 회사에 절대 오래 다니지 못한다. 회사에 다녀진다는 것 자체가 사실 회사생활이 본인에게 맞는단 것이다. 회사원들 중 상당수는 마치 다른 삶은 더 편하고 좋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 경우가 있는데 회사 안이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자신의 희생을 스스로 강조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자신이 정말로 희생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겉으로 봤을 때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뒀을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 정말로 일이 중요한 사람은 직장을 그냥 그만두지 않는다. 아이가 부모님의 손이 조금 더 필요한 시간 동안 휴직으로 하거나 잠시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있지만 진짜 일을 좋아하고, 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일을 찾아낸다. 아이에게만 올인을 하는 부모들은 많은 경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아이를 통해 이루고 싶어 하거나 아이를 통해 본인이 이익을 보고 싶어 한다.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이게 다 널 위한 거야'라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정말 아이를 위해서 아이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이라면 아이의 '무엇을 위해서' 아이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적인 경험과 지인들의 삶에 비춰봤을 때 의사가 맞지 않는 사람이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맞지 않는 사람이 변호사가 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삶은 없다. 좋은 대학에 진학을 한다고 해서 이젠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데, 이는 내 지인들만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이가 하기 싫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금 하도록 강요하는 게 어떻게 아이를 위한 것인가? 


적지 않은 부모님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아이와 시간을 많이 갖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서 평일에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 뿐 아니라 주말에는 피곤하다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아니, 아이들 중에는 평일과 주말에 학원을 많이 다녀서 부모님과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하는 아이들도 굉장히 많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이 모든 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아이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며, 놀고 행복한 삶을 사는 건 어른이 된 다음에 해도 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좋은 대학과 로스쿨을 나온 사람들은 변호사가 되어 대형 로펌에 갈 수 있겠지만 그 뒤로 6-7년은 아침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을 해야 할 것이다. 대형로펌에 가지 않거나 가지 못한 변호사들은 낮에는 사건을 끌어오기 위해 발로 뛰고, 밤에는 서면을 쓰면서 사무실에서 늦은 밤이나 새벽까지 일해야 한다. 의사들은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30대 초중반까지 위계적인 의사사회 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변호사들은 사람의 사회적 삶을, 의사들은 사람들의 생물학적 삶을 책임져야 한다. 거기에서 삐끗하는 순간 곧바로 나락으로 간다. 


그런 삶이 아니라면 회사원이 되거나 사업을 해야 하는데, 회사원은 정년이 50대일 뿐 아니라 회사의 특성상 개인은 그 안에서 부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고 사업은 언제, 어떻게 리스크가 작용할지 모른다. 이런 삶을 뒤집는 유일한 변수는 '돈'인데, 문제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돈을 쓸 시간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대형로펌 변호사들 중에 슈퍼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슈퍼카를 몰 시간이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만지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변호사는 비서와 바람이 나고 변호사의 아내는 변호사가 번 돈으로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농담은 씁쓸함을 머금게 한다. 


회사원은 어떨까? 회사원의 별은 대기업의 임원이 되는 것일 텐데 통계에 의하면 10대 상장사들 중 임원에 처음 발탁된 뒤 재직기간은 2년이 가장 많았고(20.9%), 그다음은 3년(13.4%), 5년(11.6%), 6년(10.1%)이었으며 임원으로 재직한 평균 기간은 5.6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원들의 경우 임원이 될 때까지 일하면 조직 안에서만 20년 넘게 일하게 되다 보니 조직 없이 개인으로는 일하기가 힘들고, 50대에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작할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게 현실이다. 


변호사와 의사로 일하는 게 적성에 잘 맞는 사람들은 이처럼 빡빡한 삶 안에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일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가정에도 조금 더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으로만 묘사한 이러한 직업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 지인들의 삶을 보면, 그런 삶 자체가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류의 길을 가도록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말, 진심으로 아이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부모님이 자신의 자녀가 변호사, 의사, 대기업 회사원이 되었다는 것을 주위에 자랑하고 싶은 트로피가 되었으면 하는 욕구와 욕망이 있기 때문일까? 


아이의 진짜 행복을 위하는 것은 아이에게 초점을 맞추고, 아이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 지를 먼저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원하는대로,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맞춰서 할 수 있는 일이나 진로에 대해 부모님이 귀를 열고 진지하게 아이들과 대화를 한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거나 더 행복한 일을 찾아갈 수 있다. 그에 대한 답을 부모가 절대로 제시할 수 없는 이유는 부모님들은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좋다고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아이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좋아하고 요구하는 건 대부분의 경우 아이의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제쳐놓자. 어차피 완벽한 삶은 없고,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먹는 건 항상 힘들기 때문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확실히 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벌 수 있는 삶을 아이가 살도록 하는 게 정말로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치자. 그걸 전제해 보자. 자,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살도록 초중고등학생 시절 내내 요구하는 건 아이와 부모 사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초중고등학교 내내 학원과 공부의 압박 속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가 없다. 부모는 과외비를 대기 위해서라도 일하는데 시간을 많이 써야 하고, 아이들은 학원에 가고 공부를 하느라 부모와 시간을 보낼 수가 없다. 그렇게 12년을 보낸 아이들은 과연 부모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적지 않은 부모님들은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크면 괜찮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은 일을 할 때도, 아이를 학원에 보낼 때도 아이를 생각하면서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믿으며 결정을 하다 보니 아이들도 그 마음을 알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건 폭력이다. 자신이 경험한 사회라고는 학교와 학원 밖에 없는데, 그 안에서도 놀기보다는 공부하고 경쟁만 하도록 요구받고 그에 순종한 아이들이 어떻게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나? 아이들은 오히려 공부하기 싫고, 힘들어 죽겠는데 위로하고 안아주기보다는 채찍질만 하는 부모님에 대한 분노나 두려움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12년을 보낸 후에 성인이 된 아이들이 당연히,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친하기를 바라는 건 과도한 욕심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만 안다. 부모의 입장에선 정말로 돈 벌고 일하면서 아이를 생각하고 아이를 바라봤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선 그걸 직접 듣고, 느끼고, 경험하지 못하면 그걸 알 수가 없다. 어른들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아이들이 어떻게 그러기를 바란단 말인가? 


이 지점에서 더 큰 문제는 아이가 성인이 된 후 적지 않은 부모님들은 '가족'이라는 말로 아이들을 묶어두려고 한다는데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학원과 학교만 오가고 경쟁하고 공부만 하기를 요구받은 아이에게 가족은 어떠한 존재로 느껴질까? 그런 아이들에게 가족은 뭔가를 하지 않으면, 달성해내지 못하면 사랑해주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예민하고 여린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을 실망시키면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한 것처럼 죄책감을 갖게 될 수 있고, 상처가 많아 쉽게 분노하는 아이들은 자신에게 갑자기 '가족'을 이유로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부모님에게 분노할 수 있다. 


아이와 함께 놀아주고,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은 부모님과 아이의 관계에는 어떠한 경험도 공유되지 않고, 유대감이나 신뢰 같은 게 있을 수가 없다. 실제로 아이와 대화하거나 시간을 보내지 않은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안다고 착각할 뿐이지 아이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아이의 모습을 투영해서 아이를 대하면 아이는 그게 당혹스럽거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교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부모님들은 '어른'이나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강요하거나 강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신이 부모님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보자. 당신이 회사에서 실수를 했을 때 평소에 회사에서 본인에게 잘해주고 따뜻했던 선배가 지적을 하는 것과 평소에 말도 안 되는 것을 갖고 트집 잡던 선배가 지적을 하는 것이 느낌이 완전히 똑같은가? 아니다. 전자의 경우 지적을 조금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 그 지적이 부당하다고 느껴지거나 지적이 맞다고 느껴져도 귀에 잘 안 들어왔을 것이다. 왜 그럴까? 상대와의 관계에서 축적된 경험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식은 모든 관계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평소에 친절하고 좋은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신뢰하는 반면 자신과 접점이 많지 않았거나 불신이 존재하는 관계에서 오는 피드백은 쉽게 신뢰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공식은 부모와 자녀나 가족 안에서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족이라고 해서 그냥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놀아주면서 대화를 많이 하는 게 중요하다. 그게 쉽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런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은 그런 노력이 꾸준히 축적되어야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물론이고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과의 관계가 대부분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에 가까울 수 있다. 그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의 마음과 머리는 말랑말랑하고 백지에 가깝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기억한다. 우리 부모님은 모르지만 나는 두 분이 크게 다툴 때 마루에서 오가던 이야기들을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건 내가 당시에 그만큼 어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다 알아듣고, 느낀다. 


부모가 완벽할 수는 없다. 다만, 부모가 아이보다는 많이 알고 성인이니 실수를 했을 때는 미안하다고 할 수는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금 더 설명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사실 그런 대화를 하려는 노력이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평상시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를 부모가 하려고 시도를 하다 보면 아이가 크면서 그런 흐름에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수학이나 언어영역에서도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무의식 중에 개발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너무 멀리간 것이라고 해도, 부모님이 자신의 힘과 노력을 다해 화를 누르고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한 노력을 하면 아이는 그걸 반드시 느끼고 안다. 


그냥 이뤄지는 것은 세상에 없다. 가족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되는 것도 없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고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과 시간을 쓰고 마음을 전하는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 투자 없이 돈을 번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오지 않고, 아이는 학원에 박아놓고 있으면 그 관계가 절대 건강해질 수 없다. 좋은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그 관계가 미래에 자연스럽게 좋아지겠나? 


최악의 경우는 그렇게 망가진 관계를 아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영향은 필연적으로 절대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망가져 있다면 그건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쓰지 못한 부모의 탓이다. 그걸 되돌이킬 유일한 방법은 부모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녀에게 사과하고,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그들에게 말하고 가르치려 하기보다 먼저 듣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런 노력 없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절대로 개선될 수 없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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