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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Jan 21. 2024

사랑, 소유욕과 이타심의 조화

브런치에서 연애, 사랑, 결혼에 대한 글을 오랫동안 써 왔다. 2017년부터 써 왔으니 벌써 7년 차, 몇 달이 지나면 8년 차가 된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장 생각이 많고, 힘들었던 건 '사랑'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고, 그보다 적은 사람들은 사랑을 어떻게든 정의해보려고 하지만 그 정의들에는 항상 한계가 있었다. 이는 사랑에 대한 진지한 글을 쓰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에서 느껴지는 한계는, 그 정의들이 대부분 단편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그 정의들은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랑의 유효기간은 1년이라며 사랑을 설레이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정의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 같은데, 우리는 연예인을 보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봐도 현상적으로는 비슷한 설레임을 느낀다. 그렇다면 연예인이나 물건에 대한 설레임이 연인에 대한 설레임과 동질적인 것이란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그런 정의가 사랑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랑이 설레이는 감정이라면 노년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부부의 사랑은 그 안에 포섭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노년 부부의 사랑을 누가 감히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런치에서 7년 넘게 연애, 사랑, 결혼에 대한 글을 써오면서 내가 사랑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이해했을 때야 비로소 그걸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간결하게 설명하거나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애, 사랑, 결혼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나름 관련된 글이나 서적들을 읽었지만 그 안에는 그런 내용들을 찾아보기 힘들거나 그 정의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사랑에 대한 고전들은 사랑을 하게 되면 일어나게 되는 마음들을 아주 잘 설명해 놨지만 그 안에 '사랑은 000야'라고 간단명료하게 정의하는 내용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어떤 저자들은 노년 부부의 사랑과 같은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대부분 저자들은 연애 초기에 느껴지는 감정과 현상에 집중해서 사랑을 논했다. 나의 고민은 그 두 가지를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 고민 끝에 일단 지금, 2024년 1월에 내가 정의하는 사랑은 소유욕과 이타심이 조화된 감정이나 상태이다. 누군가는 사랑이란 거룩한 개념에 소유욕이라는 천박한 표현이 무슨 일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연애 초기에 느끼는 상대에 대한 감정은 사실 소유욕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일단 그 감정이 생길 때 일어나는 신체적 변화나 패턴이 위에서 설명했듯이 연예인이나 갖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와 사실 동일하지 않나? 상대를 생각하면 설레이고, 떨리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연예인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소유욕일 수 있냐고? 상대를 갖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상대의 사진을 모으고, 상대를 실물로 보기 위해 시간이나 돈을 써가면서까지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팬덤 중 극소수이긴 하지만 사생팬들이 생기는 것도 결국은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극단으로 발현되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대부분 팬들은 그렇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요즘의 팬들은 그런 경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더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를 위해 그가 광고모델인 제품을 사거나 그와 관련된 굿즈를 사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안에는 분명 자신의 최애에 대한 이타심도 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의 굿즈를 사는 것도 사실은 그의 일부를 소유하려는 마음이 발현된 결과이기도 하다.  


연예인과 우리가 호감을 느끼는 상대와의 차이가 있다면 그건 연예인은 우리가 소유할 수 없거나 힘든 대상인 반면 호감을 느끼는 상대는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데 있다. 사람들이 이상형 월드컵을 하고, 이상형을 물어볼 때 연예인을 예시로 들고 물어보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람들이 그런 게임을 하고, 연예인을 기준으로 이상형을 물어보는 것은 그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연예인과 호감이 느껴지는 상대의 결정적인 차이는 상대가 내게 베푸는 호감에 있다. 연예인들은 [팬] 전체에 대해서는 역조공을 하는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주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당연하게 기대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와 달리 사람들은 호감이 느껴지는 상대는 [나]에게만 특정한 호의를 베풀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은 연예인은 다른 세상에 있는,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존재인 것과 달리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이 소유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표현 속에 상대를 소유한단 개념이 있단 것을 사실 모두 알고 있다. '00는 나의 것, 나는 00의 것'이란 표현을 우리가 주위에서 듣거나 직접 사용한 적이 있단 것인 우리가 사랑 안에 '소유'의 개념을 갖고 있단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소유'는 그렇게 흔하게, 오래 사용되었던 개념은 아니다. 이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소유할 권리를 갖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귀족들은 인류 역사 속에서 거의 항상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었지만 절대다수를 차지했을 그 외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일부다처제가 어떻게 존재했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과거에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도 극소수였고, 그런 사회적 분위기만 경험했던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부터였다. 모든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법 앞에서 평등하고,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우리는 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소유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 범주 안에는 이성관계도 포함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랑에서 상대를 내 것처럼 '소유'한다는 건 근대사회를 넘어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러한 소유의 개념이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인정된 시간이 길어야 400-500년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소유는 사랑의 본질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건 '이타심'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가 현실에서 겉만 봐서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낚시할 때 물고기에게 미끼를 던지듯이 상대방을 소유하기 위해서 이타심처럼 보이는 미끼를 던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기준과 방법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별도로 설명을 해야 할 듯하다. 이미 이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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