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리안을 좋아한다.
이 말 한마디로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도 경악을 금치 못할 수도 있다. 과일의 왕이라고 불림에도 불구하고 두리안을 어렸을 때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화장실 냄새가 나는 과일로 느껴질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왜, 어쩌다 두리안을 좋아하게 됐을까? 나는 만으로 네 살 때 아버지 직장을 따라 태국으로 이사를 가서 3년 반 정도를 방콕에서 살았다. 그렇다. 난 평생 살면서 다른 건 조기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데 두리안과 열대과일에 대해서만큼은 조기교육을 받은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두리안을 먹었던 내게 두리안은 어떤 과일보다 깊은 맛과 향을 가진, 말 그대로 과일의 왕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 태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 태어난 내 동생은 두리안을 혐오한다. 우리 가족이 생두리안을 사서 마루에서 자르기 시작하면 동생은 방에서 1시간 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로. 두리안을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 동생도 이럴 정도라면 어렸을 때 두리안을 접할 일이 거의 없었던 한국 사람들이 그 냄새에 치를 떠는 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취미 두 가지를 꼽으라면, 첫 번째는 웨이트를 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커피다. 그중에 커피의 경우 나는 반강제적으로 맛을 들이게 된 편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블랙커피를 드실 때면 난 그렇게 쓰게만 한 걸 왜 마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20대 초중반에 이탈리아에서 한 달 정도 살면서 이탈리아 사람들을 매일 인터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인터뷰가 조금만 길어지면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들어가자고 하더라. 에스프레소는, 최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웃으면서 마셔야 했고, 심한 날에는 하루에 10잔을 마신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얼마가 지나자 호기심이 일더라.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어진 것이다. 그렇게 마셔 본 에스프레소는, 맛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범주를 넓혀 나가면서 집에서 모카포트로, 드립으로, 커피를 집에서 내려 마시기 시작했고 한 동안 멀어졌던 취미에 최근 몇 달간 다시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 사무실과 집에는 원두 종류만 6-7가지가 있다.
두리안과 커피의 공통점은 사람들은 그 맛에 적응하기 전에는 그걸 왜 먹거나 마시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반면 그 맛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하면 빠져나오기가 힘들 정도로 좋아하게 된단 것이다. 커피 중에서 나는 신맛이 나는 커피를 싫어했었는데 최근 몇 달 동안 여러 원두를 사서 맛을 보다 보니 오히려 신맛을 좋아하게 되어서 다크로스팅을 한 커피들을 잘 마시지 않으려 하는 경향성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리안이나 커피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저걸 왜 돈 주고 사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럴 수 있다. 나도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먹는 것은 사실 그냥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두리안은 우리나라에서 어차피 말도 안 되게 비싸고 접할 일이 별로 없고, 커피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대체재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누군가가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우린 그냥 취향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두리안이나 커피가 아니라 인생의 경험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도 자신이 경험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예단하는 것들이 있단 것이다. 우리는 제한된 환경에서 제한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시 하고 자신과 다른 관점을 갖고 있거나 유사한 경험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도 쉽게 '말도 안 된다'라거나 '거짓말을 한다'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실 결혼과 연애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은 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개인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무조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이 든 싱글은 내게 기혼자들이 그런 말을 할 때면 나는 그들에게 답한다, 이 나이에 싱글이 되어보진 않지 않았냐고.
그나마 기혼자들은 싱글과 기혼자의 삶을 살아봤으니 그렇다고 치자. 최근에는 10-30대 초반까지의 연령대까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는다.
내 지인들은 거의 다 결혼을 했고, 대부분이 아이가 있다. 그중에는 딩크족으로 살길 다짐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피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겼고, 또 어떤 이들은 부부가 딩크족으로 살기로 했는데 결혼생활이 3-4년 지나자 한 사람이 아이를 갖고 싶어 해서 아이를 갖게 됐다. 그런데 그들 중에 아이를 가진 것을 100% 후회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 중에는 오히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게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아이를 일찍 낳아서 2-3명 가졌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건 당연히 힘들다. 그래서 한 지인은 내게 '아들을 낳으면 체력이 엄청 중요하니 어렸을 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게 힘들다는 걸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지인들은 모두 진지하게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 힘듦 이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고 하더라. 심지어 극 T인 공대 석사, 박사학위를 가진 형들까지도. 지인 중에 극 T이고 아이는 좋아해 본 적이 없는 형이 애를 갖지 않을 생각이면 결혼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런데 애가 모든 걸 역전시킨다고 말하는 건 내가 그 순간의 공기와 그 형의 말투까지 잊을 수 없을 정도록 충격적이었다.
10-30대 초반, 아니 어쩌면 30대 중후반까지도 일이 굉장히 중요하거나 취미가 많은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삶에 행복이 지속가능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나는 지금도 사무실에서 10-11시까지 있는 게 전혀 힘들거나 불편하지 않은, 일을 좋아하고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첫 직장을 그만둘 때 친한 동기 형이 내게 '너는 회사가 너무 널럴해서 그만두게 되는 것 같아'라고 했을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어느 정도의 성취와 또 실패를 맛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는 그런 취미와 일에서 오는 행복과 기쁨은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그나마 승승장구하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다. 요즘에는 40대 초중반만 되면 회사 안에서는 보통 임원이 된 사람, 임원이 될 가능성이 된 사람, 팀장으로 끝날 사람, 팀장도 되기 힘든 사람으로 길이 갈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일과 취미에 너무 깊게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걸 느끼기 시작하는 시점에 주위를 둘러보면, 괜찮은 사람들은 상당수가 이미 가정을 꾸린 상태인 경우가 많아서 자신의 짝을 찾는 건 몇 살 더 어렸을 때의 몇 배 이상으로 힘들어진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긴 했는데, 자신은 모성애가 없는 것 같아서 당혹스러워하는 지인도 있다. 그리고 정말 가정의 필요성이 없는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게 확실한 사람들에게까지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너무 단언하지 마'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자신이 정말 그런 사람인지는 20대 때부터 고민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는 분명히 있고, 최소한 '난 절대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갖지 않을 거야.'라고 단언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돌아보면 20-30대의 나 자신을 누구보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그때 내가 생각했던 진실과 진리는 사실과 완전히 거리가 멀었던 것들도 있더라.
경험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의 경험이 얼마나 객관적인지, 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살펴보면서 상황과 자신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내가 틀릴 수도 있어'를 전제로 하고 정보를 접하고, 책을 읽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말과 경험, 생각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는 진리와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