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안 한 건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다. 기혼이 아니고 미혼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것도 이제는 '노총각'이란 사실을 부정하기 힘든 나이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간헐적으로 몇 달 정도를 제외하면 가정에 대한 소망함은 항상 있었다 보니 결혼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당연하게도 '결혼생활 해보지도 않고 아는 척하지 마'라는 말도 종종 들었다.
과거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해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당당하게 말한다. 내가 결혼을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들도 있지만, 오히려 못했기 때문에 당신들 보다 더 잘 아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고.
무슨 말이냐고? 수십, 어쩌면 수백 명의 결혼생활에 대한 얘기를 십여 년간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분명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완전히 똑같은 결혼생활 같은 건 없단 것이다. A는 결혼은 반드시 하라고 하는데, B는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고, C는 이혼을 하는데, D는 이혼을 하고 나서 재혼을 한다. 그들의 결혼생활을 들어보면 이건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런 그들의 말에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 그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도 모두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데 있다.
결혼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에 들을 일이 없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결혼생활에 대해 들어도 큰 관심이 없고 잘 잊어버린다. 그건 그들이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결혼생활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다행이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행복으로 가득 찬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가식이나 포장되었다고 여기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해 민망하니까 좋은 얘기는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제삼자인 나 같은 사람은 어떨까? 굉장히 열심히 듣고, 분석을 한다. 가정을 꾸리고 싶으니까. 그것도 좋은 파트너를, 잘 선택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가정을 꾸리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은 수십, 수백 가정의 결혼생활을 듣고, 통계를 내고 분석하고 앉으면서 경험적으로는 결혼생활을 모르지만 머리로는 결혼한 사람들보다 객관적으로, 제삼자의 입장에서 더 잘 이해하는 부분들이 생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우리나라 부부들 중 상당수가 갖는 공통점은 결혼 후 스킨십이 줄어든단 것이다. 그렇지 않은 부부들도 있지만, 그들은 매우 극히 예외에 해당한다. 심지어 결혼하기 전에 속궁합이 가장 중요하고 너무 잘 맞아서 결혼한 사람들, 그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 뿐 아니라 나보다도 나이가 한참 어린 지인들 주에서도 결혼 후에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들은 왜 그럴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애초에 너무 모범생이어서 연애 중에도 스킨십을 크게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부부나 개인의 경우 애초에 스킨십을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흐름이 이어질 뿐이니 그게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는 다르다. 정말 활발하게 이성을 만나고, 자유롭고 왕성하게 스킨십을 다양한 사람들과 하고 다녔던 이들 중에서 결혼 후에 배우자와는 스킨십을 거의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그런 경우에도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첫 번째는, 어렸을 때 워낙 자유롭게 살았다 보니 스킨십에서 오는 자극에 무감각해져서 흥미를 잃는 경우다. 지인 중에 가장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은 진지하게 '나 이젠 어떤 스킨십을 해도 자극이 느껴지지 않아'라고 고민을 토로하더라. 그 정도가 아닌 경우도 있는데, 그런 케이스를 자세히 들으며 결혼 전에 그들이 연애 과정에서 했던 말과 패턴을 떠올리며 '왜 스킨십이 없어지는 것일까?'를 분석해 봤다.
그런 패턴을 보이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그들에게 결혼 전에 스킨십은 그 자체로 목적이었던 것이었다. 누군가와 스킨십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하는지, 그리고 스킨십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자극들이 그들에게 목표이자 목적이었다. 연애를 할 때는 많이 봐도 일주일에 2-3번, 평균적으로 1-2번, 적으면 한 달에 2-3번 정도를 그것도 어느 정도는 관리된 외모로 만나다 보니 만나면 새롭게 느껴지고, 본능적으로 욕망이 생겼지만 결혼 후에 매일, 그것도 아주 매우 일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다 보니 그런 욕망이 생겨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스킨십 자체가 목적이나 목표가 되는 경우의 가장 큰 부작용은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왜 연인이나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울까? 두 사람이 싸우거나 사이가 안 좋을 때 그러는 것은 이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큰 문제가 없을 때도 바람을 피운다. 그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새로운 자극이 없기 때문에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상대방과 잠자리는 했지만 사랑한 것은 아니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스킨십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나 목표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말이 아닌가? 스킨십에 대한 세팅값이 이렇게 설정되어 있는 사람이 연인이나 배우자와의 관계가 안정될 때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그에 반응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가끔씩 결혼 후에도 연애시절과 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스킨십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사람들이 신기해 보여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관계에서 스킨십은 연애할 때부터 그 자체로 목적이나 목표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경우를 많이 본다. 그리고 그런 부부들의 경우 스킨십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을 더 갖고 있다 보니, 스킨십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마음을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스킨십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주된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그게 주된 목적이나 목표가 되는 순간 상대방은 나의 욕구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거나 여겨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스킨십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사랑을, 마음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나 목표로 설정되면 스킨십은 상대방에 맞춰서, 상대방이 그것을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그러한 경우에는 가정을 꾸린 이후에도 스킨십이 결혼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듯하다.
스킨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돈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돈 없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 뒤에서 돈을 오히려 더 챙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가 더 다양한 것을 자유롭게 해 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에 매우,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으로 시간과 자유도 벌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기계나 사람이 귀찮은 일을 대신하도록 함으로써 그 시간에 우리는 다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 돈은 정말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주된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야 한단 것은 아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돈이 주된 목적이나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는 누구에게 돈을 주고, 상대는 왜 우리에게 돈을 주는가?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은 상대가 자신에게 맞춰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만족시키거나 자신에게 맞춘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돈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돈 자체가 주된 목적이나 목표가 된다는 것은 결국 내 주관이나 생각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없애면서 상대에게 맞춰주는 삶을 산단 것을 의미한다. 수십 년간 회사생활을 하다 퇴직하신 분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한일이다. 수십 년을 자신의 주관과 생각은 죽이고, 돈 주는 자들이 요구하는 일만 해 왔으니 그 과정에서 자신은 희생되고 억눌렸을 텐데 어떻게 자신이 무엇을 원하거나 하고 싶은지를 알 수가 있을까? 돈'만' 쫓는 삶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삶이다.
돈을 주된 목적이나 목표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돈은 사실 실체가 없는 욕구와 욕망의 상징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돈'을 낸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사실 욕구와 욕망만이 투영되어 있다. 사람들이 왜 수천만 원짜리 시계나 수억 원 하는 자동차를 살까? 그게 정말로 그 정도로 중요해서? 아니다. 우리는 1만 원짜리 시계를 가지고도 시간을 알 수 있고, 경차를 타도 이동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돈을 주고 사치품을 사는 것은 그것을 욕구하고 욕망하는 마음 때문이다.
물 1리터가 있다고 치자. 사막 한가운데서 그 물의 가치와 오늘날 한국에서 그 가치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왜 그럴까? 물론, 희소성과 물에 대한 필요도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건 결국 환경의 특성상 사람들이 물을 더 욕구하고 욕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반드시 사야만 하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에 집착을 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우리의 욕구와 욕망에 잡아먹히게 될 수밖에 없다.
돈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돈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벌어야 하는, 필요로 하는 돈의 총량은 우리가 어느 정도 돈을 가졌을 때 진심으로 자유로운지를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가 돈을 벌어서 얻는 효용보다 돈을 벌기 위해 희생되는 자아와 자유의 양이 더 커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을 제어해야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고,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욕구와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성욕도, 물욕도. 욕구와 욕망은 잘 통제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가 더 행복하게 되는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욕구와 욕망을 잘 조절하고 통제하지 못하면 그것에 잡아먹히게 된다는 데 있다. 식욕은 우리의 생물학적 신체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신호이지만, 식욕에 중독되고 무감각해지면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칼로리를 섭취해 살이 찌고 그로 인해 건강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욕구들도 과한 경우 그 욕구가 우리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리고 욕구와 욕망 자체를 주된 목적이나 목표로 설정하고 추구하게 되면, 다른 것을 수단으로 여기게 되면서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이 본질이고, 어떤 게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야 하고 어떤 게 수단에 머물러야 할지를 구분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은 수단이 목적이라고 광고하고, 홍보하며 마케팅을 한다. 그게 쉽고, 자신에게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 사는 우리는 늘 신중해야 하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 욕구와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괴물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