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거짓말

by Simon de Cyrene

성경은 사후세계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하여 '스올 (Sheol, שְׁאוֹ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만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벌 받는 자'들이 가는 곳으로써의 지옥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올이라는 곳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죽음의 영역, 어두운 곳을 뜻 할 뿐이다. 신약에서는 '하데스 (Hades, ᾍδης)'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이는 스올의 헬라어 표현이고, 아주 특수한 용례로 타르타로스 (Tartarus, ταρταρόω)'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이는 타락한 천사들을 보내는 곳으로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 사용되어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는 개념이 다르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흔히 생각하는, 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표현을 들으면 떠올리게 되는 '지옥'을 의미하는 표현에 가까운 것은 '게헨나 (Gehenna, γέεννα)'이고 예수님께서 주로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것으로 나온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남쪽 경계에 있던 아이를 제사로 드리거나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했던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 표현은 실제로 도덕적, 종말론적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이 표현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에서 암시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지옥에 가'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 5장 22절, 29절, 30절에서 사용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제자들에게 형제에게 노하거나, 오른 눈이 실족하거나, 오른손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 설사 그렇더라도 이 땅의 것을 잃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다. 이 외에도 마태복음 10장 28절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맥락, 18장 9절은 5장과 같은 맥락에, 23장 15절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표현을 사용된다. 이 흐름은 마가복음 9장 43절, 45절, 47절과 누가복음 12장 5절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야고보서 3장 6절에서도 말을 조심하라는 의미로 게헨나라는 표현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지옥'하면 떠올릴 사례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 곳은 '하데스'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과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나사로가 '천국에 갔다'라고 생각하는 곳은 '아브라함의 품(εἰς τὸν κόλπον Ἀβραάμ)'으로 천사들에 인도되어 아브라함 곁에서 안식과 위로를 받는 낙원 같은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천국'이 모두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천국으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들은 굉장히 다양한데, 한국 성경에서는 그 표현들이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되고 이는 사후세계로서 의미를 갖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후세계와 현생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과 천국에 대한 내용의 전부다.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에 가장 가까운 개념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지만 그마저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럴 경우 불에 떨어질 수 있단 뜻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제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사용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말하는 '불신자(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이 표현을 좋아하진 않는다.)'였던 이방인을 상대로 예수님은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이러한 흐름을 현대로 옮겨온다면, 즉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셨다면 누구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예수님은 교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 뜻을 왜곡해서 가르치고 너희 이익을 취득하면 지옥에 갈 수 있어'라고 말씀하실 때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하시면서 사용하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가치와 기준, 개인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며 그 뜻을 따라 살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 때 지옥을 언급하면서 경고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표현은 어떤가? 그 표현은 나는 옳고, 당신들은 틀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말이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일까? 그 표현이 절대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단 것은 아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기회나 방법이 없었던, 복음이 이 땅에 처음 전해질 때는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알리기 위해서, 이웃들이 예수님을 알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그건 이미 100년도 더 된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개신교, 예수님이란 표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표현이 구호로 외쳐지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외치는 것은 사랑일 수 없다.


복음을, 진리를 양보해야 된단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우리는 왜 그것을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는가?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이 땅에 와서 인간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 지를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상의 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만약 그게 가장 큰 사랑이고,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아는 죽이고 세상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구호는 최소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뿐인가?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휴지나 물티슈와 함께 주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나는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든 우편함에 전도지를 넣고 가는 교회가 있다. 그렇게 전도지를 나눠준다고 해서 복음이 전해질까? 다시 말하지만 100년 전, 아니 어쩌면 50-6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전도가 의미가 있었을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 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게 전도지가 있다고 그 내용을 읽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도지를 만드는 데 사용된 나무는 전도지가 아니라 나무로서 존재하여 이 땅에 조금이라도 더 공기를 정화시키는 것이 더 존재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들이 여전히 거리에서 전단지 뿌리듯이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열심히 전도를 했어'라는 자기 의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성경은 사후세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하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한다. 성경에 묘사된 인간은 자신이 힘들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조금 먹고살만하면 등을 돌리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따라 사는 존재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자 차라리 이집트로 돌려보내달라고 칭얼대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식량을 내려주시자 처음에는 감사하다 똑같은 것만 준다고 불평하고, 그렇게 원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이방족속의 영향을 받으며 하나님을 떠나고 만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폭력적이냐고 하는데, 위에서 묘사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당신의 친구나 자녀에게서 보인다고 상상해 보자. 친구에게 '나한테 등신이라는 표현 쓰지 마'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며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 같이 하다 다음날 다시 그런 표현을 당신에게 쓴다면, 그걸 10년 동안 매일 반복한다면 당신은 친구를 어떻게 하겠나? 10년이 아니라 1달만 그렇게 해도 그 사람을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먼지가 뭉쳐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집어 먹으려는 자녀에게 '그거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라고 말했는데 자녀가 다음날 다시 먼지를 먹으려고 한다면, 그걸 1년 내내 한다면 어떻겠나? 그게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생각보다 자주 벌하지 않으신다. 실제로 벌하기보다는 경고하는 내용이 구약에 훨씬 더 많이 있다.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이 땅이 하나님의 통치에게서 영원히 멀어질 것으로 생각될 때에 한해서 하나님은 실제로 인간을,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신다. 만약 당신이 암에 걸려서 당신의 장기를 잘라내지 않으면 살 수 없다면, 당신은 그때도 그 장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 장기를 잘라내지 않고 암을 품고 살고 싶은가?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암덩어리를 안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정말 부득이할 때,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실제로 벌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주셨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여기에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는 것은 그 숫자만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삶의 기본적인 태도로 삼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개신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성경은 철저히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 땅의 원리는, 그리고 선악과를 먹은 후의 모습인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려는 경향성이 있는데 그것을 거스르라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모습을 회복하면서 이 땅에서 사랑을 베풀며 손해 보는 삶을 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불가능해 보여도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안에서 결국 승리하실 것이라는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사랑으로만 이뤄질 수 있다고. 그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핵심이다.


나는 사후세계를 믿고, 성경에 나와 있듯이 어떤 형태로든 분류된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 세계가 어떤 형태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최대한 궁금해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사후세계는 우리에게 맡겨진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영역이다. 이 지점이 개신교가 구교(천주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와 다른 지점이다. 구교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조합해서 '연옥'이라는 사후세계의 중간개념을 만들고 인정하며 대부분 종교들은 오늘날 착하게, 선하게 살면 죽어서 천국에 가거나 다음 생애에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연옥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죽음 이후의 세계를 우리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영역으로 두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 구호는 사용하는 경우에도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습하고, 교회에 수십억 원을 요구하는 목회자들과 교회에서는 거룩한 척하면서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온갖 착한 척을 다하면서 뒤에서 지인들을 욕하고 다니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쳐야 하는 구호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이 아니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와 선생을 향해서 지옥에 대하여 경고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성경에서 말한 적도 없는 구호를 외침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모순이 발생하는가? 그 명제가 사실이라면 이순신과 세종대왕은 지옥에 가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에 대한 정답은 있다. 우리는 그걸 알 수 없다. 이는 성경에서 사후세계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지옥이란 표현은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인해 벌 받게 되고, 영혼이 망가진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삶의 목표나 종료되는 지점을 명확히 알려주기 위해 사용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개신교 신자는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믿고, 그 영역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의 초점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느껴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지에 맞춰져야 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에 대한 답을 알려준다. 그건 네 자아를, 욕구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고 좁은 길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라는 것이다. 그 이후에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실 영역이다. 그건 하나님의 전쟁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작은 전투를 사랑으로 살아내고 이기면 된다.


그게,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자 작은 예수로 살아내는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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