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곧 만으로 9년 출석하고 있는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에서 계엄을 언급하셨다. 2024년 12월 3일에 계엄이 선포된 직후에는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하셨는데,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직전에는 그에 상반되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그 말로 인해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고, 뒤에 하신 말씀이 담긴 영상을 퍼 나르고 그에 대해 비판과 비난을 한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는 한 SNS에서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다 그 말에 실망하고 다시 교회를 떠났다는 사람의 글도 봤고, 내 지인은 노망이 난 게 아니냐고까지 SNS에 썼더라.
그 시점에 8년 넘게 한 교회를 출석하며 들어온 목사님의 설교들이 있기에 목사님께서 어떤 의도로 하신 말씀인지를 안다. 계엄이 옳았다는 게 아니라 계엄을 하지 않은 상대 정당에서 탄핵을 남발하는 것도 잘못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라고 나는 해석하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는 계엄 직후에 계엄을 비판하셨던 것과 그다음 해에 하신 말씀이 모순되지 않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도 보수 기독교계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들이 설교 중간, 중간에 있었다 보니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목사님을 한쪽으로 분류해 버리기에 딱 좋은 상황이 발생했었다. 그렇다면 계엄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어땠을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일부 목사님들에 대해서 계엄을 선포한 것을 비판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라고 요구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게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정의를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비판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구체적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교회는 잘못된 것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만, 모든 사람들을 다 품는 공동체이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계엄에 대해서 어떻게든지 언급하는 것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언급한 것이어도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혼란스러운 시국과 갈등이 해결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가장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인 신자는 다르다. 개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구현되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따라서. 법학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있으며, 가르치고 있는 입장에서 봤을 때 2024년 12월 3일에 선포된 계엄은 절대로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아직 법원의 확정적인 판단이 나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날 일어난 사건을 아직 '내란'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내란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해석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맡은 헌법 수업에서 2024년 12월 3일에 선포된 계엄이 왜 허용될 수 없는 지에 대해서 그 다음날도,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있었던 다음 날도 설명했다. 하지만 교회는 다르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교회나 교단, 목회자 차원에서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목사님께서 설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뒤에 한동안 힘들었다. 머리로는 목사님께서 어떤 맥락에서 하신 말씀인지를 이해는 하지만 그 말씀이 상처가 되더라. 그 말씀이 상처가 된 것은, 내가 계엄이 선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느꼈던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다음 날 다른 지역으로 강의를 가야 해서 국회로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강의 준비를 사무실에서 저녁 11시까지 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사는 아파트를 멀리서 보는데 문득 '계엄군이 설마 나 같은 조무래기까지 잡으러 오진 않았겠지'란 두려움이 들더라. 내 박사학위 전공의 성격상 항상 정부와 일을 하게 되는데, 나는 지난 정부에서 요구하는 것들이 내 주관에 반한다며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건 이번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년 말에 있었던 한 회의에서 나는 격양된 목소리로 현 정부의 방향성을 비판했다. 그런데 계엄이 선포되고 나니, 계엄이 유지된다면 나도 언젠가는 잡혀갈 수도 있겠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엄습하더라.
그래서 그 말씀이 상처가 되었고, 목사님의 얼굴을 보기 싫은 것은 물론이고 2개월 넘게 목사님의 설교와 목소리도 듣기 싫더라. 우리 교회는 목사님을 보고 온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나는 오히려 목사님에 대하여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가 상황들이 겹쳐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게 된 이후 오해가 풀린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떠나기가 더 쉬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나지 못했다. 떠나고 싶다고, 떠나겠다고 하나님께 따지며 기도했지만 그때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머물러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내가 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목사님 때문인가? 아니었다. 나는 우리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성에 동의하고, 공감하며 내가 섬기고 있는 어린이부 아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목사 개인이나 한 사람이 아니라 이 공동체를 사랑하기에 9년째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목회자 한 사람 때문에 그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되지 않나? 목회자가 곧 교회는 아니니까. 한 목회자의 설교가 좋아서 교회를 옮기는 것도 목회자를 우상시하는 것이지만, 목회자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교회를 떠나는 것도 목회자가 우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내가 우리 교회 다른 목사님이나 교회 사무실로 이메일을 쓸지에 대해 한참 고민하고 기도하다 참았다. 목사님의 말씀이 위험한 면이 있고, 온라인에서 편집되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만 한 목사님께 간단하게 전했다. 더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누르고, 누르며 참았다. 내가 8년 넘게 봐 왔던 목사님은, 본인이 하신 실수를 인지하실 것이라고 나는 믿었고, 사모님께 혼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다.
실제로 목사님은 그 뒤로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만한 말씀은 설교에서 거의 안 하셨고, 내 마음도 조금씩 회복이 되어 나는 그대로 교회에 남았다. 목사님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목사님께서 만약 그에 대하여 해명을 하시려고 했다면 오히려 논란은 더 증폭되었을 것이기에 나는 그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신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내게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를 떠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떠날 수 있다고 곧바로 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싫거나 목회자에게 실망했을 때가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곳, 섬겨야 할 공동체가 보이고 기도하는 중에 옮겨야겠단 마음이 들면 나는 곧바로 옮길 것이다. 그 준비를 사실 몇 년째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 교회의 방향성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지점도 언젠가는 반드시 흩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공동체가 보인다면, 망설이지 않고 옮길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보다 규모와 교인의 숫자가 적을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전에는 강동구에 있는, 세습으로 많이 비판을 받은 대형교회에 여전히 출석하시는 이모네 가족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교회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새벽예배에 나가서 강대상 위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담임 목사님 손을 잡기 위해 눈을 똘망거리며 줄에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새벽예배 후에 먹는 육개장 사발면 맛을 못 잊어 지금도 컵라면은 거의 육개장 사발면만 먹는다. 가족 여행을 가야 할 때도 교회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며 갔다가 늦어서 아버지께 엄청나게 혼날 정도로 나는 그 교회와 담임 목사님을 사랑했다.
하지만 세습이 이뤄지는 과정에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하여 분노하는 글을 브런치에 쓰자 임시조치가 날아오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사랑했던 교회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게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세습이 이뤄지는 과정에서는 잠시 출석을 안 하시다가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 교회에 나가시는 이모네 가족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런데 내가 2025년에 목사님께 상처를 받은 뒤에도 남아있게 된 뒤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목사님 때문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그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이 힘들어도 그 교회에서 자리를 지킬 수 있겠더라. 누군가는 목회자가 우상이어서 남아있고, 누군가는 그 교회가 사역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아 편해서 남아있고, 누군가는 설교가 좋아서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남아 있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그 공동체를 바로 세우겠단 마음으로 남아 있다면, 그건 성경적일 것이다.
구교(천주교)나 다른 종교와 달리 개신교 안에서 목회자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목회자는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말씀과 양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가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아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단 것도 아니다. 목회자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고, 구성원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그것을 잘 감당하는 목회자는 존경도 받을 수 있겠지만 반드시 존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사실 지금도 목회를 하시는 큰삼촌을 어머니께 '000 목사'라고 부르시는 걸 좋아하진 않는다. 큰삼촌이 교회에서나 목사이지 친척 모임 안에서까지 목사인 것은 아니지 않나.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목회자는 목회자 만의 책임과 임무, 그리고 권위가 있고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헌금도 사실 구제를 하기 위해 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역할과 기능을 맡아주는 목회자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레위지파가 그런 역할을 했고, 다른 지파가 레위인의 생계를 책임져 줬던 것처럼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헌금은 일차적으로 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온전히 섬기는 데 모든 것을 쏟는 목회자들의 생계를 해결해 주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잘못했을 때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교회 재산을 자신이 이룬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성도들이 피땀 흘리며 일한 돈 중 일부를 낸 헌금은 목회자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앞에 낸 것임을 목회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또 한 분의 유명한 목사님의 ‘지분’에 대한 이야기도 마음이 아프다. 개인적으로 그분을 존경했고, 그분의 설교와 책을 너무 좋아했기에 더 그렇다. 그 분이 하신 녹취록의 내용을 보니 그 분께는 어느 순간 설교하는 것과 아들이 우상이 된 느낌이 든다.
교회를 기업처럼 세습하고, 성도들에 대하여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감행한 목회자들은 당연히 비판받는 것을 넘어서 그 직분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 '목회자도 실수를 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건 맞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로서 그들을 여전히 용서하고 품어줘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목회자라는 차원에서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성도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낸 헌금은 목회자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교회와 하나님 앞에 내놓은 것인데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은 것도 모자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떻게 용납이 될 수 있을까? 그런 결정을 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바로 세울 능력도, 자격도 없다. 그리고 성도를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는 것은 그 성도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보다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상대를 도구로 이용하려는 마음이 큰 것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 방치되어서는 안되고 이에 대해서는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상처를 받는 성도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목회자로서의 직분을 유지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을 저지른 자들 중에 뻔뻔스럽게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며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잘못된 말이다. 그렇게 혀를 놀리는 것은 성경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붙이는 이단과 다를바 없다. 그러면 사람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하나? 하나님 앞에서는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난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판단을 받는 것이고, 이 땅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에 대해서 판단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판단받을 것은 하나님께 받아야 하지만 이 땅에서 드러난 잘못은 이 땅에서의 기준에 따라 당연히 판단받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무너지는 것은 목회자와 교단들이 하나의 카르텔이 되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명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내가 설명했던 예시들이 어떤 목회자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인지를 알 것이다. 그런데 그 목회자들은 여전히 교단 안에서 그대로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면에 들어가면 결국은 돈과 권력과 정치적인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다. 그리로 그걸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건 돈과 권력이 하나님보다 높단 것을 인정하고 복음에 힘이 없단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내가 알고 경험한 하나님은 그렇게 약하고 능력 없으신 분이 아니다.
교회와 교단들이 공동체로서의 성도들을 위하고, 사랑한다면 그들을 그렇게 방치할 수 없다. 돈과 권력보다 하나님이 위에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한다면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방치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도 목회자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른다면, 반성이나 회개는커녕 세상에서도 용납되지 않을 일을 저지르고도 여전히 정치질을 하면서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포장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교회를 '경영'하는 자들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교회에서 쫓겨나 개척한 교회에 목사를 따라가는 건 그들에게 교회 공동체는 중요하지 않고 목사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그 목사의 제자가 되는 길이다.
오늘날 한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에서 교회 공동체에 말씀을 바로 세워야 하는 목회자들의 커뮤니티에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말씀보다 돈을, 사랑과 인내보다 정욕과 욕구와 욕망을 좇은 목회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종교개혁 시기에 구교(천주교)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목회자들부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현실과 돈을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이 땅에서 복음이 바로 세워질 수 있겠나.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세가 작아지는 것은 세상이 타락해서가 아니라 목회자들, 교단과 교회들이 망가졌고 복음을 세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상에 해야 할 말을 하는 교회에는 젊은이들이 몰린다. 그리고 세상은 원래, 항상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었고 최근에 더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그런 세상을 바꿀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내부도 정화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나.
목회자가 성도들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목회자도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는 목회자가 곧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개신교 교회에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