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과 개신교

by Simon de Cyrene

브런치에서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활동할 때였다. 넷플릭스를 달고 살았고, 드라마에서부터 다큐멘터리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영상을 봤다. 그러던 중 '서바이빙 데스'라는 시리즈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만 하던 시절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단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고, 이제는 너무나도 살고 싶어 졌지만 그때 깊게 묵상했던 '죽음'은 여전히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내게 죽음을 이겨낸다는 '서바이빙 데스'란 제목을 보고 시리즈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내용은 특별한 게 없었다. 임사체험, 영매, 유령에 대한 내용은 누구나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편이었던 환생은 달랐다. 환생이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나. 더군다나 보수적인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기사의 7일이 24시간으로 구성된 7일이라고 믿기도 했던 내게 '환생'은 받아들일 수도 없는 소설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매우, 매우 충격적이었다.


티베트에서 환생한다는 달라이 라마 수준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 영상은 무려 미국에서, 그것도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환생에 대한 데이터를 대학교 연구소에서 수집을 50년 넘게 수집해 온 사례들 중 일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상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에 대해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전생을 말하는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진술을 통해 실제로 찾아낸 실존했던 인물들, 그리고 그 실존했던 인물들이 몰랐던 사실까지 아이들이 진술한 사례를 보며 환생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논리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내 나름대로 여러 종교들을 비교한 끝에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아는 개신교는 환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의 믿음이 틀린 게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내용을 부인하고 허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환생 연구를 해온 기록을 찾아봤고, 연구를 했던 사람들이 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발견하여 그 책도 읽어봤다. 내가 개신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정말 유일한 진리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른 종교의 경전과 교리를 볼 때도 했던 작업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환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행한 연구의 객관성을 담보받기 위해 철저한 기준을 세워 신뢰할 수 있는 사례들만 수집했더라. 나처럼 영상과 책 몇 개만 본 아마추어 같은 사람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러한 현상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녀를 둔 부모가 자신의 자녀가 전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는 장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환생을 부정하는 근거를 찾기 위해 성경을 꼼꼼하게 읽었다. 성경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 번이라는 언급은 구약과 신약에 모두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구체적으로 '환생 같은 건 없다'라는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왜 그런 것일까? 3년 전에 마무리 한 시리즈에서도 설명했고, 이 시리즈에서도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그건 성경은 철저히 '현생'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개신교를 사후세계와 연계해서 생각하지만 성경의 대부분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질서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신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내용이 주로 담겨 있다. 사후세계는 성경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환생에 대한 개신교의 경전인 성경의 정확한 입장은 '침묵'으로 정의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내게 '그러면 너는 환생을 믿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내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영역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환생을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종교들의 경우 이 땅에서의 삶과 환생을 연계하고 있는 반면 성경에서는 그런 연결고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모든 초점은 절대자인 신에게 맡겨져 있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사후세계에서 조금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조건이라는 명제는 개신교에서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 명제는 오히려 개신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용서'라는 관점과 배치되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환생은 개신교 세계관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절대자에게 맡겨진 영역이다.


내가 이 시리즈를 자극적일 수 있는 '환생'이란 주제로 시작한 것은 개신교를 둘러싼 많은 쟁점들이 환생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알 수 없는 문제들을 둘러싸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생물이 환경에 맞춰서 일부 특성이 변한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전혀 모르는 개신교 신자들조차 자신들의 주장이 평생을 과학만 연구한 사람들보다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입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나도 그러한 한국 개신교 교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주재원으로 해외에 파견되신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미국의 교육체계 하에서 학교를 다니며 토론 수업을 들을 때 '창조론 vs. 진화론'에 대한 토론에서 창조론의 입장에서 주장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진화론의 입장에 서 있던 유대인 친구의 주장보다 내 주장이 투표에서 더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을 받았는데, 그 토론 이후 수업을 담당하신 선생님은 내게 나지막이 '구진아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가 꼭 24시간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발끈하며 성경은 성경은 토씨 하나 틀린 게 없고 세상이 창조된 6일은 24시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그 선생님께서 하신 질문은 내 안에 깊게 새겨졌다. 그리고 나는 성경을 읽으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루'가 24시간일 필요는 없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성경이 작성된 배경을 더 알게 되며 오랜 시간 동안 구전되어 온 내용을 모세가 정리했을 뿐 아니라 성경에는 많은 상징들이 의도적으로 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7, 10, 12, 70과 같은 숫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7, 10, 12가 유대교에서는 완전함을 상징하기에 그 숫자들과 두 숫자를 곱한 숫자들은 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모든' 것이 객관적이어야만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가 내 안에 큰 물음으로 남았기에 나는 학부시절 다른 종교들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두 이론은 사실 완벽하게 대립하지 않고, 둘 모두 결국엔 '믿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다. 진화론이 완벽하게 입증되었나? 아니다. 생명체에서 일부 진화가 이뤄진단 사실은 입증이 되었지만 진화론은 여전히 완전무결할 정도로 입증되진 않았다. 그리고 진화론은 과학의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일정한 전제 하에 주장되고, 그 '전제'는 결국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믿음'에 기반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더 발달해서 그 전제가 깨지면 진화론도 깨어지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설사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궁극적으로 왜 그런 진화가 일어났는지는 과학의 영역에서 완전히, 완벽하게 설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해도 그 안에서 진화는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천문학적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빅뱅 이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주의 팽창은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에 그 이면에 있는 원리나 힘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지 않은가?


진화론자들은 자연법칙과 현상을 세상의 시작과 진화의 원인으로 믿고, 창조론자들은 그러한 원리 뒤에 절대자가 있다고 믿는다. 결국 두 입장 모두 끝까지 가면 믿음이 기초를 형성하고 있고 두 입장은 병존할 수 있다. 개신교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빅뱅 이론과 진화론이 창조론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사람이 아무리 과학과 신학을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해도 진화론자인 과학자보다 과학을 더 잘 알 수 없고, 교황만큼 창조론을 잘 알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신자는 '나는 신의 존재를 믿기에 창조론을 믿는다'까지만 입장을 취하면 된다.


인간이 이처럼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영역에서의 논쟁은 계속 이어진다. 이 시리즈 뒤에서도 설명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가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마찬가지. 개신교 신자라면 그 답에 '모른다'라고 답하면 된다. 성경에 그에 대한 답이 나와 있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한 자신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의 구체적인 작동원리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컴퓨터나 핸드폰의 작동원리도 알지 못하고 알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신이 만든 세상과 원리에 대해 본인이 알 수 있고, 설명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 오만함이 신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먹고, 바벨탑을 짓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이 안타까운 것은 그 논쟁에 매몰된 사람들은 그로 인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관심은 갖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쟁으로 인해 성경에서 진짜로 말하고 있는 것들이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환생이나 창조론과 진화론, 사후세계에 대한 논쟁은 성경에서 말하는 악한 영인 사탄이 인간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이 땅에 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날수록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과 자신의 일상에서 주어진 현생에 최선을 다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라고, 자신의 지혜나 통찰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아도 눈 앞에 보이는 길을 가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개신교 신자로 분류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라고 답할 줄 모르고, 자신의 지혜, 지식과 통찰이 옳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쓰여진 배경과 언어, 구체적인 의미와 맥락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도 하지 않은 상태로. 이 얼마나 오만한 모습인가? 그런 모습이 과연 시편, 잠언과 전도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삶을 살아내는 올바른 태도일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기독교인, 그리고 작은 예수가 되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개신교 신자가 아닌 이들로부터 비판을 넘어 비난까지 받게 된 것은, 그러한 겸손함을 교회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짓밟히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칭 기독교인들 중 상당수가 예수님의 이름을 도구로 여기며 망령되어 일컫는, 기독교인의 탈을 썼을 뿐인 비기독교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뛰어난 개신교 신자라고 해도, 시간이 흘러서 돌아볼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안다. 자신이 옳다고, 자신이 확실히 안다고 주장하는 건 전형적인 이단과 가짜 메시아의 방식일 뿐이다. 진짜 개신교 신자라면 항상 내가 틀릴 수 있고, 절대로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완벽하게 분별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이 기본 자세로 탑재되어 있어야 한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게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