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로 포장된 샤머니즘에 대하여

by Simon de Cyrene

인생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기나긴 터널의 끝에서 저 멀리 있는 출구에서 들어오는 빛이 희미하게라도 보이지 않을 때 그런 기도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잘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냐고. 도대체 왜 날 이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지 않는 거냐고. 어처구니가 없고 기본도 안된 말도 안 되는 기도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마치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대가로 뭔가를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헌금을 쓰실 곳이 없다.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인간 세상에서 살고 계신 게 아닌데, 그 돈을 받아서 어디에 쓰시겠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헌금이 필요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일조와 제사가 강조되는 건, 물질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우리 마음에 붙들림 받게 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현실의 영역이 우리의 마음과 그에 따른 결정, 그리고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물질을 가져오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나 나를 쓰셔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통해서도 이루실 수 있는 분이다. 그래야 '전지전능'하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가. 우리가 개인이 잘된다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까? 공개된 자리에서 우리 입술로 하나님께 감사한단 말을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할까? 아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하나님과 기독교, 그중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그 말 한마디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 흐름은 사람들이 예수님이나 개신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시대와 사회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자신이 진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있다면 그 마음을 공개석상에서 밝히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런 발언을 하기 전에 우리는 그 말을 하는 것이 자신이 겸손해 보이고 싶어서 그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깊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감사인지를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후자의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그 말이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거나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교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개신교 신자들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교회와 개신교를 더 싫어하고 부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위선이라 여기고, 그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개신교 신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배려로 입 밖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단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도 있고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결정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하고 있는지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더라도 아실 것이 아닌가?


마태복음 6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왜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는가? 마태복음 6장 16절에 의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 자신이 얼마나 신실한 사람인지 티를 내기 위해서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의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티가 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말 감사함이 벅차 올라서 나오는 감사의 말은 아름답지만 내가 잘된 것에 대한 감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실제로는 외식하고 거룩한 척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공개석상에서는 하나님을 언급하지 않은 배우나 가수가 평소에 배려심이 많고, 힘든 사람들을 많이 도우며 겸손한 행실을 보이는 것을 유명했는데 알고 보니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고 밝혀지는 경우와 공개적인 석상에서는 종교성을 강조하던 신자였던 연예인이 알고 보니 횡령, 탈세를 하고 매니저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경우 중 어떤 경우 사람들이 더 하나님, 예수님과 개신교에 호감을 갖게 될까? 당연히 전자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일상에서 부족한 게 많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여전히 성화의 과정에 있기에 내가 개신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면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쉽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언급하진 못할 것 같다.


이처럼 자신이 사회적인 기준으로 성공을 거둔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위험한 또 다른 지점은, 그것이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본인의 감사가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힘든 시간을 지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진 것임을 고백하는 경우에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개신교 신자들이 그것을 보며 하나님을 더 붙들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더니 이런 것을 주셨다는 식의 고백은 오히려 다른 개신교 신자들이 '하나님은 저 사람은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으셔서 저주를 하시는 건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명백히 틀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어쩌면 상당수 개신교 교회는 교회와 개신교의 탈을 쓰고 실질적으로 샤머니즘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의 핵심은 인간이 정성을 다해 대접하면 신령이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그에 상응하는 복, 치유, 보호를 준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샤머니즘에서는 사람들이 그런 존재에게 정상을 다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굉장히 냉정하고 현실적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셨다. 요나는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적국인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니느웨로 보내셨다.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수십 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노아는 홍수가 나기 전에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으면서도 방주를 지었고, 야곱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은 후 자신의 삼촌인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여 20년 동안 일했으며, 요셉은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기 전까지 13년간 종으로 살고 감옥생활을 했다. 이 정점에는 예수님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잔을 내 앞에서 치워달라고 절실히 기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 정성을 보이고 헌금을 많이 하면, 교회에 헌신하면 좋은 일이나 본인이 원하는 일이 그대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나? 그런 구절은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며 '종교 장사'를 하는 종교인들이 나오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그들을 비판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서는 헌금을 많이 하면, 열심히 봉사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이 여기는 문화가 있다.


왜 그럴까? 그 시작점에는 개신교가 확산되는 시기의 문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한반도에서는 샤머니즘이 토속신앙으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개신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샤머니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토속신앙을 하나님이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으로 대체했고, 그로 인해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대형교회들이 성장과 규모를 강조하면서 성경 내용 자체를 강조하기보다는 이러한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활용해서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면서 그런 문화가 고착되어 버렸다.


한국에서 새벽기도를 유달리 강조하는 문화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새벽에 일어나서 예배나 기도를 드리는 문화가 기독교 전통에 없는 것은 아니다. 수도원에서는 해가 뜨기 전에 모여 찬미가를 부르고 시편을 낭송하며, 구교의 영향이 강한 국가에서도 새벽 미사를 드리는 전통이 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도 새벽 시간대를 강조한 시기와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부에서는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오순절 교회를 제외하면 한국만큼 새벽기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는 소수에 불과하다.


우선 우리나라의 새벽기도의 전통은 정화수 또는 정화수를 떠놓고 새벽에 빌던 민간신앙적인 정서와 결합하여 문화로 자리 잡힌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새벽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형식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어떠한 영적인 것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말씀으로, 경건하게 시작하면 하루를 살아가는데 당연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패턴이 자리를 잡으면 말씀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당연히 깊어질 수 있기에 새벽기도를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벽기도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새벽기도를 나가는 것도 어떤 마음으로 가는 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교회는 매년 1월에 일정기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를 하는데, 작년 초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새벽기도를 나갔다. 그런데 학기 중에는 내가 다른 지역으로 강의를 다녀오고 나면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나는 8-9시에 일어나는 루틴이 자리 잡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새벽기도를 다녀오고 나면 낮에 거의 잠을 자게 되더라. 이게 맞는 것인가 싶기도 했고, 작년 말에 올해 1월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안에 나도 모르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새벽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내 삶을 조금 더 빨리 안정시켜 주실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적극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거나 그런 목적으로 나갔단 것이 아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돌아보니 그런 마음이 무의식의 영역에 있었을 수도 있겠단 뜻이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나가기 위해 노력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을 제대로 못하고 낮에 잠을 자게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다 싶어 올해는 온라인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내게 주어진 일에 더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30대 초반부터 샤머니즘적인 기독교를 비판하고, 샤머니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그런 마음이 일부는 있었던 것 같더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헌금을 낸 대가로 무엇인가를 주신다고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절대로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을 마치 기도하면 주실 것처럼 해석하고 적용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적용이다. 그 앞에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말씀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에 합한 것을 구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단 것을 보여준다.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과 말씀을 아는 것이 선제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바뀌게 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이 달라지게 된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이 바뀌어 하나님께 모든 기준이 맞춰질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요구한다.


이런 내용에 대해서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위적으로 바꾸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 주지 않는 폭력적인 존재'라고 규정지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만약 어린아이가 독극물이 든 병을 들고 그것을 마시려고 한다면, 갓난아이가 낭떠러지가 있는 줄 모르고 낭떠러지를 향해 기어간다면 그걸 가만히 둘 사람이 있을까? 성경은 인간이 자신을 모르고 자신에게 무엇이 좋고 나쁜 지를 모른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사실은 우리가 욕구하고 욕망하는 것은 우리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진짜로 좋은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할 때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창조론을 믿는다면 이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누가 우리를 가장 잘 알겠나? 자동차를 그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전하는 사람이 더 잘 알까? 아니면 그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기획했던 자동차 회사 사람들이 더 잘 알까? 당연히 자동차 회사들이 더 잘 안다. 마찬가지로 창조론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우리는 자동차가 고장 나면 정비사들이 정비하듯이, 살아가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계속해서 알아가게 된다. 그래서 20대에는 자신에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30대에는 그것이 사실은 주위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자신도 욕구하게 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리고 한의학에서 소고기와 밀가루는 태음인에게 좋은 음식이지만 소양인에게는 맞지 않는 음식으로 분류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맞는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임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사회에서 말하는 '좋은 것'과 다를 수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직장이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독일 수 있단 것이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은 대기업에서 연봉을 많이 받고 사는 삶이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당시에 상위 1%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공채로 시작했지만, 그 안에서의 틀에 박힌 삶은 내게 고통스러웠다. 창조론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 아신다고 믿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을 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기 위해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심어놓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가고, 그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다른 영역에서 느낄 수 없는 자신만의 기쁨, 행복, 즐거움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으니까.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은 그게 결국 우리가 가장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 즐거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요구하고 욕망하는 것이 우리를 망가뜨릴 것이란 것을 아시기에 우리가 달라고 하는 것을 주지 않으신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 일을 많이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거야'라는 명제가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당신의 자녀가 당신이 준 용돈에서 일부를 당신에게 주고, 당신 말을 잘 들으면 당신은 그 아이가 독극물이 독극물인 줄 모르고 달라고 하면 그에게 그것을 줄 것인가? 그걸 주는 게 사랑인가?


샤머니즘적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은 그런 독극물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명예, 권력을 갖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성경과 복음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을 왜곡하여 그런 존재로 전락시켰고, 그런 하나님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산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