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틀에 박힌 성격이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담배도 한 적이 없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런 유혹이 주위에 아예 없었냐면 그건 아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보니 나는 90년대에 한국에서 학생들이 노출되지 않았을 환경도 많이 접했다. 주위에 술, 담배를 하는 동급생들도 당연히 있었고 중학생 때부터 피임도구들을 수집하는 친구도 있었다. 내가 살았던 국가에서는 외국인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잘 논단 이유로 나이트클럽에 미성년자여도 우리 학교 학생들은 자유롭게 출입하는 곳들이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술, 담배, 성관계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워낙 보수적이셨고, 그런 부모님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이트클럽에는 한 번 가봤는데 그 역시도 부모님, 정확히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갔었다. 그때 나와 함께 나이트에 갔던 일행 중에 술과 담배를 그곳에서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술을 입에 댔다. 정확히 말하면 재수생활을 하면서. 밤늦게 공부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아버지의 양주를 몰래 꺼내서 조금씩 마셨던 게 나의 첫 음주였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뒤에는 자유롭게(?) 마셨다. 담배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고등학교 때 줄담배를 피우던 친구들조차 '나는 피우지만 너는 하지 마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피울 생각이 없었지만 술은 달랐다. 친구들과 어울리려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수적인 분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어떻게 술을 마실 수가 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나의 논리는 분명했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 게 잘못된 것이라면 예수님이 행하신 첫 표적이 어떻게 포도주를 만드는 것일 수가 있단 말인가? 성경에 술에 취하지 말라고 하는 구절까지는 갈 필요도 없이 예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술은 왜 마시면 안 된단 말인가?
나는 이 주장을 반박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그렇게 신입생 시절에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런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서 체육대회 포상으로 우리 내무반이 모두 휴가를 나와서 가진 술자리를 계기로 술을 끊었다. 압구정동에서 만나 선임들이 거의 막내였던 내게 술을 엄청 먹였는데, 복귀해서 내가 술을 마시고 한 행동들을 들으니 술을 마시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 나는 분명히 싸움을 말린 것으로 기억했는데 사실은 내가 싸움을 했고,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거리를 가다 내가 만두집에서 밖에 나와 있는 호빵을 집어 먹어서 선임이 대신 돈을 지불했다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술이 사람을 어떻게 잡아먹을 수 있는 지를 경험했고, 술을 마시는 게 무서워졌다. 난 그래서 그 즉시 술을 끊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학부시절 동아리나 학과 사람들은 내가 신앙적인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무슨 소리냐고? 술을 마시지 않는 게 아니라, 그렇게 아는 경우가 많다고? 그렇다. 나는 술을 즐기거나 찾아다니지도 않지만, 안 마시지도 않는다. 내가 공식적으로, 아예 술을 끊은 기간은 굉장히 짧았다. 첫 직장생활을 홍보실에서 시작하면서, 나는 강제적으로 술을 마셔야만 했다. 선배들이 마시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장인어른이 목사님이야 임마'라는 팀장님의 논리를 꺾을 방법이 없었다.
혹자는 겨우 2년 다닌 회사에서 술을 강제로 마셨다면 이젠 끊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회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술을 포함한 많은 것들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경영지원부문 체육대회를 홍보실이 우승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뒤풀이 자리였다. 막내였던 나는 체육대회 관련 실무를 도맡아 했고, 홍보실이 우승하자 선배들은 내게 수고했다며 술을 돌아가며 권했다. 고통스러웠고, 토하고 돌아와 마시는 건 물론이고 취하지 않기 위해 팔 굽혀 펴기도 하며 버텼다.
그러던 과정에서 한 선배가 내게 따뜻한 눈빛과 함께 '야 인마, 너 정말 수고했다.'라며 술을 권하는 장면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슬로모션처럼 새겨져 있다. 그 선배의 말투와 표정, 그리고 그 자리의 공기는 그 선배가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이 진심으로 내게 수고했고, 잘했다는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임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종교를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은 곧 그 선배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란 사실도 느껴졌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을 강조하지 않는가?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마음을 담아 권하는 술을 거절하는 게 어떻게 사랑일 수 있을까?
그 뒤로부터 나는 술을 찾아다니거나 즐기지는 않지만,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고맙거나 존경하는 분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는 술을 피하지 않는다. 술을 억지로 먹지 말라는 말을 하더라도, 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분위기를 깨지 않을 정도의 술은 마신다. 그리고 그때마다 느낀다. 내가 술을 즐기거나 잘 마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술을 함께 마신다는 것을 그분들이 고마워한다는 것을. 그런 자리에서 내게 술은, 그들의 언어로 그들에게 나의 마음과 사랑, 존경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에서 술을 마시지 않도록 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배경은 분명하다. 조선후기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마주한 현실은 비참했다. 탐관오리들이 일반 백성들을 착취하고, 재산을 빼앗아 가 백성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재산을 축적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기 시작했고, 그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로 거리에 쓰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조선민족은 게으르다'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외국인들이 그러한 배경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교를 하기에 앞서 조선 사람들의 먹고살기 위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는 술을 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는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시점에는 술에 찌들어 있는 조선 사람들을 술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게 그들을 구하는 첫걸음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단 것을 의미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목회자들도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시는 경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난히 술에 대해 교회들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그런 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술을 만드신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다 먹고 마셔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신자들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어야 하고, 우선순위에 하나님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회와 국가에서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금지하는 것은 그 사회와 국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런 문화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개신교 교회들에서 금기시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금지하는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이 확실히 안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단 것도 아니다. 성경은, 최소한 개신교 경전으로서의 성경은 특정 행위를 절대로 하거나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떤 분들은 고린도전서 6장에 나와 있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술이나 담배 등 몸에 좋지 않은 것은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방식이라면 우리는 삼겹살도 먹어서는 안 되고, 살이 찜으로 인해 건강이 안 좋아지는 것도 죄로 분류해야 한다. 그게 맞을까?
우리는 술과 담배, 그리고 혼전순결의 문제도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서 한 가지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랑'이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상대가 자신과 술, 담배를 함께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술과 담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술과 담배를 해도 된다고 주장해서도 안된다. 상대에게 그런 기준을 강요하는 것도 사랑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관계적으로 보지 않고 혼자서 있을 때는 어떠한가? 사람들을 보통 술이나 담배를 힘들거나 기쁠 때 한다. 만약 하나님이 인생에 있어서 1순위라면, 기쁘거나 힘들 때 찾아야 할 1순위는 술이나 담배가 아니라 하나님인 게 정상이 아닐까? 사실 술이나 담배를 해도 된다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논쟁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다. 건강에 이롭지도 않으니 그냥 안 하면 그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도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굳이 설득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술이나 담배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라고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술과 담배가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이 유익하지도 않기에 굳이 그것을 해도 된다고 강하게 항변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술과 담배를 해서는 안될 때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이나 교회에서 문화적으로 금기시하는 선을 넘어갈 때는 자신이 그것을 자신을 위해,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를 본인에게 정직하게 묻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혼전순결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그대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혼전순결'이란 표현을 좋아하진 않는다. 이 표현 자체가 '여성의 순결'을 말하는 남상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표현일 뿐 아니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압축적인 표현이 없기에 이 표현을 사용해서 결혼 전의 성관계의 문제를 접근해 본다면, 이 역시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이해 및 해석될 수 있다.
결혼 전에 마음 편하게, 안심하고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여성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남자인 나는 솔직히 여성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교회 다니지 않는 지인, 그중에서 심지어 결혼을 한 여성들마저도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남자친구나 남편 몰래 불안할 때는 사후피임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을 듣고 엄청난 충격에 빠진 순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자신이 임신할 가능성이 없는 남자는 생각하지 못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선 아이를 가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선 항상 어느 정도의 불안한 마음과 긴장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을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해 본 모든 여사친들에게 들었다. 반강제로 하게 된 스킨십이 남긴 상처들이 여전히 어느 정도는 남아있다는 말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마치 당연히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경우 1%의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는데 그런 불안한 마음과 긴장감을 갖고 하는 스킨십이, 사랑일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나를 만지거나 안는 것도 불편하고 힘들지 않나? 그런데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100% 내키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킨십을 하면서 어떻게 편하고, 행복하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성관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서,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하는 스킨십과 상대를 자신의 욕구와 욕정,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스킨십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서로의 욕구와 욕정,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스킨십은 중독적이다 보니 서로의 욕구와 욕정,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스킨십은 계속해서 더 자극적인 것을 갈망하게 만든다는 것은 도파민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모두 원하더라도 이러한 스킨십은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없을진대, 상대가 불편해하는 스킨십을 설득하거나 강압적으로 요구해서 하는 스킨십이 어떻게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경에 나오는 율법과 한국 교회들만 가지고 있는 기준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율법, 기준, 원칙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데 여전히 유용하기 때문에 만들어졌고, 그 내용은 상당 부분이 지금도 유효하기에 그것이 폐기되었다거나 지킬 필요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로마서 10장에서 말하면서도 로마서 3장과 7장에서는 율법을 세우는 것과 율법의 의롭고 선함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은 행위가 믿음으로 인해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장만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의미가 없단 것은 아니다. 착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곧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는 착한 행위도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게 되면, 행위는 당연히 바뀌게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가 악한 사람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행위에 대한 율법, 기준과 원칙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및 해석되어야 한다.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사후세계에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게 되면 율법을 대부분의 경우 지키지 않을 이유도 없게 된단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