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란 이름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제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by Simon de Cyrene

'하나님'이 맞는가, '하느님'이 맞는가를 두고 논쟁이 오가는 걸 초등학생 때 들은 적이 있다. 그 장면을 두고 이상하다고 느꼈다. '한 분만 계시다는 면에서 하나님이 맞을 수도 있는 거고, 우리의 관점에서 위에 계신 분이라는 관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결국 한국어 표현일 뿐인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 '하느님'이란 표현은 '하늘'에 존칭 접미사 '님'이 붙으면서 리을이 탈락한 것이고 구교(천주교), 성공회 등은 한국에서 이 표현을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 '하나님'이란 표현의 유래는 유일신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라는 설에서부터 하느님이란 표현이 변형되어 하나님이 되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차이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표현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아닌가? 결국 하느님, 하나님 모두 절대자이고, 유일 신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 신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 신을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라고 부르라고 나와 있는가?


성경에는 절대자인 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와 있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에 대하여 자음만 표기한 YHWH에 유대 서기관들이 신을 부를 때 사용했던 '아도나이'라는 표현의 모음인 A-O-A를 넣어 YaHoWaH로 발음되던 것이 라틴어, 영어 등을 통해서 변형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도 당연히 신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슬람에서 신을 의미하는 '알라' 역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유일신사상을 가진 종교에서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신이 하나밖에 없는데 굳이 신에게 어떤 이름이 필요한가. 신이 이름을 갖고 있다면 그건 그분이 필요한 다른 신이 필요하단 것을 전제로 하지 않나? 영어에서는 이 부분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신은 대문자로 God, 우상인 신은 소문자로 god으로 표기하는 방법으로 구분한다. 결혼한 부부가 상대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우리 남편/아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 남편이나 아내가 한 명이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한 분이라면, 그 신에게는 신이나 절대자라고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이름은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에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는 종교가 많지 않다는 데 있다. 고대종교 중에는 조로아스터교와 아톤 신앙이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로아스터교의 경우 선과 악의 이뤈론적 구조를 갖고 있어서 완전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린다. 아톤 신앙의 경우 태양을 신으로 섬겼던 종교다. 이 외에는 인도에서 발생한 시크교가 형체 없는 유일신을 믿고, 바하이교는 모든 종교의 근원이 하나고 그 뒤에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인류 역사에서 유일신 시상을 가졌던 종교는 구약을 공유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이 종교들 뿐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바하이교는 19세기에 이슬람교에서 파생되어서 뿌리를 이 세 종교들과 공유한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유일신 사상을 전제하고 있는 종교 중 압도적인 다수는 구약을 바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일신사상이 현실적으로 자리 잡기 쉽지 않은 것은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신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데 당장 먹고사는 건 물론이고 생존조차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굳이 믿고 따르는 것이 가능했을까?


아기의 100일을 기념하는 전통이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과거에는 아기가 100일 살지 못한 경우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가 많은 문명에서 형성된 것도 사냥이나 전쟁에 나섰다가 남자가 사망한 경우가 많았는데 집단의 숫자가 곧 집단의 힘으로 이어지기에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둠으로써 숫자를 늘리는 게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것은 매우, 매우 힘든 것을 넘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종교는 그 지역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신성화시키고, 자신들에게 중요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했을 때 유일신사상을 가진 종교들이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종교들이 불교 외에는 전 세계의 주요 종교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굉장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우 '다른 신'을 상정하고 있기보다는 '신은 어떤 존재고, 어디까지가 신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영역인가'에 대한 '신에 대한 이해와 해석론'에서 차이가 나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결정적인 차이를 가진다. 유대교가 경전으로 삼는 구약에서는 분명히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현시점에 누가 다윗의 직계 후손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신이 그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유대 민족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궁극적으로 세계평화가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인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 국가의 물리적이고 완전한 회복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경우 예수님에 대한 해석을 조금 복잡하게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믿지만 '메시아'를 신성을 가진 존재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최종계시인 Quran을 통한 재해석을 통해 예수님은 위대한 예언자일 뿐이고, 먼 훗날 언젠가 다시 내려와 이슬람의 진리를 온 세상에 세우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두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유대민족과 이슬람이 중심이 된단 것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자신들이 결국 현실이라는 이 땅에서 중심이 되고, 유일신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개편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이 두 종교가 유일신 사상을 도입하고는 있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성공'이 종교의 목표이고 자신들만을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는 면에서는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종교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적인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에서의 신도 이런 존재로 오해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선택받은 자'라는 표현이 그런 오해를 야기하는 중심에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용되는 '선택받은 자'라는 표현은 '너희가 우월하고, 너희만 구원받을 거야'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에서 '선택받은 자'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주어진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잘나거나 그들만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유대인과 무슬림들처럼 자신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인 것으로 착각을 한다.


기독교, 특히나 개신교 교리 안에서 선택받은 자는 자신의 특권을 누리려는 마음보다 소명을 다하려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은 이 땅에서, 자신이 속한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만드신 질서를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으로 선택받았는지는 우리가 태어난 환경과 그 이후에 절대자이신 신의 주권하에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으며, 개신교 신자들은 똑같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해 나가는 역할을 할 책임은 공유하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영역은 다르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와도 다른 지점은 특정한 민족이나 종교를 중심으로 여기지 않으며 이 땅에서의 국가, 권력, 명예를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표현을 개신교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개신교 신자이다 보니 구교에서는 이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개신교계에서는 기독교는 특정종교가 아니라 신이 이 땅에서 질서를 어떻게 구현하시는지에 대한 원리와 신, 인간의 관계를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나 또한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절대자인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에게 '민족'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가?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사실 애초에 '민족'이란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고 그건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신이 이 땅에서 인간이 만든 시스템인 국가와 권력에 구속되고, 그것을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통해서만 이루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신의 것이라면 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와 같은 문제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그리고 그가 신성을 가진다고 해석하는 개신교에서 믿는 신은 그런 존재이다. 그러한 개신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르고 책임이 주어진 영역에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것으로 전제된다. 예수님은 다르지 않냐고?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기 때문에 다를 뿐이고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만인제사장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개신교에서 목회자는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지 않는 자들과 믿는 자들 간의 구분을 두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무려 수천 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작성되어 있지 않다. 성경은 노예도, 믿지 않는 자들도, 창녀와 세금을 마구잡이로 거둬들이는 사람들도 포용하고 사랑할 대상으로 삼는다. 이방인들과 분리될 부분들에 대한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이 인간은 나약해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성경에서 말하는 길과 멀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구별되어 삶을 살라고 말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개신교에서 해석하는 신은 무한한 사랑을 가진 존재다. 이에 대해 그러한 사랑의 존재가 어떻게 구약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폭력적이고, 잔인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의문이 있으신 분들은 구약성경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자녀나 동생, 학생이라고 상상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고 배신하며, 불평불만에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힘들면 하나님을 찾지만,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욕구, 욕망, 욕정에 물들어 타락한 문화를 받아들인다.


그런 자녀, 동생, 학생을 그대로 방치하는 게 사랑인가? 아니면 그들을 혼내서라도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게 사랑인가? 혹자는 어떻게 죽이기까지 할 수 있냐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한 장기가 암에 감염되었다면 그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장기의 일부를 잘라내야 할까? 아니면 그래도 장기가 너무 소중하니까 그걸 그대로 유지해야 할까? 전이되지 않도록 잘라내야 몸 전체가 살 수 있기 때문에 잘라내야만 하는 게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더 타락한 문화가 확장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잘라내는 게 사랑일 수 있다. 그 개인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로서 모든 존재를 동등하게 사랑하는 존재라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딱' 변화를 일으키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가 강제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요구하고 강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아니면 상대에게 희망을 두고, 끝까지 신뢰하며 기다려주는 게 사랑인가? 당연히 신뢰하고 기다려주는 것이 사랑이다.


만약 잘라내거나 타락한 길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영역에서 개입을 하고 자유를 보장해주지 않으신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로봇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그리고 신이 개입한다면 어디까지 개입하고, 어디까지는 허락해야 하는가? 이는 인간이 알 수 없기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영역의 문제다. 세상은 복잡하게 엮여있기 때문에 절대자가 인간을 사랑하기에 자유의지를 믿고, 신뢰하며 선물해 주신 게 전제되는 세상에서 절대자가 특정한 시점에는 개입하고, 다른 시점에서는 그러지 않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나오는 벌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대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실제로 벌한 횟수는 수십 번인 반면 경고는 수천 번도 더 된단 것이다. 실제로 벌한 횟수가 10번이고, 경고한 횟수는 1,000번이라고 치자. 이는 하나님께서 100번 경고 후에 1번 실제로 벌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선생님들 중에 실제로 혼내기 전에 100번을 사전에 경고할 정도로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100번은커녕 한두 번 경고하면서 참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래도 성경에서 말하는 절대자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한 번 벌 받은 사람의 입장뿐 아니라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벌하실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마음은 어떨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자녀를 훈계하고 나서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 편할까? 내가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 내가 악의 없이 알림장에 작성한 "먼저 손들고 말하지는 않지만 대답을 할 때는 잘한다"라는 코멘트를 받은 부모님에게 혼난 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먼저 답하겠다고 손을 들 때의 미안한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아이고, 내가 혼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나도 그렇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는데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벌하신 절대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스라엘 민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에서 수시로 벗어나고 있고, 하나님은 그에 대해 경고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며 살아간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자는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신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은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님으로 현실화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예수님을 완전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 땅에서 물리적인 승리를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땅에서 왕이 되거나 승리하실 생각이 없었다. 사실 예수님을 예언자, 선지자나 지혜자 정도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이는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그를 신성모독을 이유로 고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진짜로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이거나 정신병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이 현실화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시대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산제사로 드려진단 의미로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었겠지만 현대인들에게 그 내용과 의미가 잘 해석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사랑은 궁극적으로 상대를 나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 자신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을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표현을 해야 한다. 개신교적인 해석에서는 신은 그래서 직접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의 방법 중에 가장 위대한 방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목숨까지도 인간의 죄를 위해서 희생하셨다. 하지만 신은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이기에 죽음에 구속되지 않으시고 삼일 만에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것이 신이 절대자이고, 창조주이자 사랑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러한 인간과 신의 모습과 관계를 믿고, 그러한 신을 사랑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해 이 땅에서의 삶을 사는 존재.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고, 그러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살지 않는 사람은 교회를 다닐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다.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국인은 아닌 것처럼.


그리고 이렇게나 길이 다른데 어떤 길로 가든지 정상으로만 가면 된다는 말은 당연히 성립할 수 없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과 한라산으로 가는 길이 다른 것처럼, 시작점이 같다고 해도 다른 종교를 믿으면 목표지점과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백두산으로 가는 길을 가면서 언젠가는 한라산에 닿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된다며 수긍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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