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TC

동성애, 차별금지법, 십일조와 결혼

by Simon de Cyrene

제목만으로 감이 잡히지 않는 이 글은 놀랍게도 제목에서 언급한 네 가지 주제를 모두 다룬다. 의식의 흐름대로. 이 글은 몇 주 동안 계속 이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털어내기 위해 쓰는 글이다. 일종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법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법을 가르친다. 매우 조심스럽지만 형법이 아닌 다른 법을 다룰 때는 부득이하게 내 종교를 밝히게 될 때가 있다. '가족'과 관련된 부분에서 그렇다. 우리나라 헌법은 혼인을 남녀 간의 결합으로 전제하고 있어서 동성혼이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나와 종교가 같은 학생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 종교를 밝힌다. 내 생각이 종교적인 시각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히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나는 법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은 동성혼을 법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고 그 두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몇이나 될까? 나는 똑똑하고 건강한 자아를 가진 나와 성적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을 안다. 그리고 그들의 다름은 다름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들이 스킨십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보는 것도 힘들고 어색하다. 나와 같거나 나보다도 더 보수적인 사람이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아주 조금이라도 알려졌거나 방송에 출연했던 사람이 자신의 성적지향성을 밝히기만 해도 가십성 기사들이 포털을 뒤덮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동성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면 그런 기사가 애초에 관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기본단위다. 그리고 어떤 단위를 '가족'이란 이름으로 보호해야 할지는 굉장히 보수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지금처럼 아마도 매우 높은 확률로 대다수 사람들이 동성부부의 모습을 자연스럽고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동성혼을 법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만, 성적지향성이 다른 이들이 사실혼과 같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현실이기에 동거인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법적장치를 통해 보호하고 권리를 보장해 줄 필요는 있다.


다만,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가 만약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가정을 꾸리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나는 그것을 기독교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 지와 무관하게 동성혼은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와 성적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이 법적으로도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다면,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퍼레이드를 한 것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사회에 기여하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들이 꾸린 공동체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는 동성혼이 당연히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것이다.


이 부분 때문에 나는 내 종교를 밝힌다. 이렇게 설명했다가 나와 같은 종교를 가진 학생들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동성애에 대해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많이 있다. 동성애는 타고난 것인지 여부는 아직 완벽하게 입증되지 않았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물학적 공통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질병으로 볼 수 없다'는 건 널리 받아들여진 사실인데, 역설적으로 생물학적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그것이 타고난 것이라는 것도 입증되지 않았단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연구결과들은 아직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 되는 원인들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여러 가설과 이론들만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성향은 타고난 것'이란 것 역시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믿음' 또는 '주장'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보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적인 욕구와 욕망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되었고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란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학부시절 한국의 동성애에 대해 뉴스클립을 과제로 만들면서 우리나라의 최초 여장남자와 성적지향성이 바뀌신 분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신 분들을 모두 취재한 적이 있다. 그들 중에 자발적으로, 선택으로 자신의 성향을 갖게 되신 분들은 단 한 분도 없었다. 인위적으로, 자의로 그런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어떤 이유로 사회적, 관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무의식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 것이 그러한 결과로 발현되지 않을까?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생각보다 입증하기가 어렵다. 이걸 입증하기 위해서는 신생아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어떤 아이가 어떤 성적지향성을 가질지를 모르는 상태로 추적 연구를 아마도 수천, 수만 명에 대해 하며 일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을 모두 기록해야 할 텐데 그런 연구가 이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는 여전히 세상은 물론이고 인간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지만 그러한 약들의 상당수는 원인을 치료하기보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그 증상이 완화된 동안 결정적인 원인의 치료는 몸이 스스로 하게 된다. 이는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질병의 원인을 치료하는 방법을 우리는 여전히 완벽히 모른단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나?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어마어마한 예산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코로나 바이스러스를 완벽하게 정복하지 못했고, 여전히 새로운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지향성에 대한 원인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 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일정 부분 존재하는 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그들을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만,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자신이 평가, 판단받지 않기 위해 더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다. 내 동생의 경우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가서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정상적이고 똑똑해서 충격을 받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성적지향성 때문에 차별하면 안 된단 것은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이 법의 입법을 반대한다. 그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동성애가 죄(sin) 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이 다른 인종이거나 하층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한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도 죄인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죄인이며, 교회를 세습하는 것도 죄일 수 있고, 성도들이 드린 헌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도 죄임은 분명하다. 기독교에서 동성애를 죄로 보는 건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차별금지법이 그러한 신앙과 양심의 영역을 표현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 표현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들은 차별금지법의 내용 중에 그러한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그에 대해 비판을 하면 된다. 정확하게 그 지점만을 짚어서. 그런데 한국교회들은 차별금지법 자체에 반기를 들었다. 그게 쉬우니까. 그래야 일반성도들을 이해시킬 수 있으니까. 내가 아는 모범적인 삶을 사는 굉장히 복수적인 잘 나가는 변호사인 형은 심지어 내게 자신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논리를 정리했고, 발표할 거라며 보낸 자료에는 동성애 혐오에 가까운 내용이 담겨 있었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한 채 그 형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접근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게 이 땅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기독교를 어떻게 보게 만들까? 세상에 차별을 금지하는 법에 반대하는 교회라니.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천하게 여겨졌던 창녀와 같은 민족의 등을 처먹던 세리들과 밥을 같이 드셨는데, 그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차별금지법 자체를 반대한다는 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가?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기 전에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왜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맞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에 대해 바로 서라는 경고를 하시는 것일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똑바로 하라고, 너희는 내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고 있지 나를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 땅의 법이나 프로그램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다. 이 땅의 법은 법이고, 프로그램이 부흥과 부활을 가져오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종교,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시키려는 시도가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땅에서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말을 신뢰한다면 교회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하는 말을 지금처럼 무시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바로 서 있지 못하고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의 주장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들이 해야 할 더 본질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교회를 바로 세우고 진정한 제자를 키워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누구도 차별금지법을 계기로 반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아무리 보내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한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교회들은 실패했다. 껍데기와 규모는 커진 곳이 있지만 본질이 지켜지는 곳은 많지 않고, 유럽에서는 이미 교회 건물들이 다른 용도로 용도변경이 이뤄지기 시작한 지 오래됐다. 미국에서도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지난 10년간 온갖 스캔들로 사퇴하고 회개하는 흐름이 줄줄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런 패턴이 최소한 20년은 이어진 것 같은데 그런 문제를 야기하는 목회자들이 돈과 권력을 쥐고 있어서 누구도 그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만약 사업이 이 정도로 망하고 있으면, 사업가들은 보통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려 들 텐데 교회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존경하고, 운동할 때면 그분의 과거 설교도 즐겨 듣는 목사님이 계신다. 그런데 그 목사님께서 과거에 십일조와 관련해서 하시는 설교를 들으면서 공감하진 못했고 그 지점에서는 동의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분의 삶을 존경하고 설교를 좋아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십일조에 대한 부분은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고 나는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십일조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공동체의 나눔을 위한 것이다. 목사님께서는 이 분류를 설명하시면서 십일조를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취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라고, 십일조가 두 번째와 같은 성격만 갖는다면 그건 맞을 수 있지만 첫 번째와 같은 성격도 갖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신이 속한 교회 공동체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지키면 실질적으로는 십 분의 일이 아니라 오분의 일을 드리게 되며, 본인은 그렇게 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러고도 남으셨을 뿐이고, 나는 그래서 그분을 존경한다. 그리고 나도 기본적으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십일조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자신이 다니는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면 신뢰할 수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교회들의 상황에 따라 그 부분은 유연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힘들고 재정적으로 부족한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있다. 그런 교회들의 경우에는 십일조는 그 교회에 하는 것이 맞겠지만, 십일조를 교회에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을 취하는 교회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교회 역시 그런 교회 중 한 곳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와 고민을 하던 중에 다른 곳으로 더 흘려보내는 게 맞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십일조는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도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와 이 시대에는 목회자들이 '성도들이 기꺼이 십일조를 내고 싶은 교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고, 그런 교회가 많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가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특정 브랜드 제품을 많이 사듯이, 자신의 교회와 목회자를 사랑하면 십일조 이상도 기꺼이 하지 않을까? 교회와 목회자들이 그런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려는 성도들이 문제가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내가 그 목사님의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렇게 십일조를 해야 청소년부 같은 프로그램도 잘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아부, 유치부와 청소년부, 청년부를 구분하는 오늘날 전형화된 교회가, 그런 프로그램들이 정말로 이 땅에 복음을 바로 세웠나? 그 덕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따르게 되었나? 그런 프로그램들이 없을 때는 복음이 잘 전파되지 않고 사람들의 믿음이 약했나?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프로그램들이 믿음을 더 약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같은 나이 또래들이 모이면 설교도, 만나서 하고 듣는 얘기도 비슷한 곳만 맴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편하다'. 아이들 뿐 아니라 부모들을 위해서도 그게 편하다. 미성년자인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 어린아이들은 잘 앉아서 버티지도 못할 뿐 아니라 설교에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으면 부모에게 질문을 할 텐데 부모는 그에 대해 답을 해줘야 하니 아이들과 예배를 함께 드리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게 현실이다. 그런 현실은 의도적으로 어린이부, 청소년부, 청년부를 두지 않고 있는 우리 교회의 구성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다 아이를 낳고 나면 어린이 관련 프로그램이 많지 않단 이유로 교회를 옮기는데, 그렇다 보니 우리 교회의 어린이부는 출석교인 숫자에 비해서 작은 편이다.


그런 편안함이 정말로 이 땅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을 길러냈는가? 아니다. 그런 편안함과 프로그램들 덕분에 성인들은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었는가? 아니다. 편하기 때문에 그렇다. 아이들이 물어보면 답해주기 위해 자신이 성경을 더 읽고, 고민하고, 가르쳐주는 과정에서 부모도 성장할 수 있고, 아이들도 부모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들으며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와 더 친밀해질 수 있다. 그런 교육은 가정 안에서 이뤄지는 게 맞다. 힘들고 불편해도. 그런데 교회의 프로그램은 그걸 교회에게 맡겨버렸다. 그러니 부모와 자녀는 신앙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고, 상호 간에 더 친밀해질 기회도 잃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다음 세대를 길러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오만과 착각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오는 것으로 어떻게 뭔가가 길러내질 수 있겠나? 나는 1년 동안 교회도 출석하고, 평일엔 내 공부를 하면서도 토요일마다 다양한 기독교 세계관 관련 강의를 듣고, 과제도 하는 프로그램도 들었지만 그 프로그램을 함께 들은 사람들 중에 자신의 욕구와 욕망, 명예와 권력을 좇지 않고 진정한 작은 예수가 되기 위해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그중에 10%도 되지 않는다. 그 정도 프로그램에 참여할 정도라면 나름 자신들의 교회에서도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이었을 텐데도 그렇다.


만약 교회가 다음 세대를 정말 위한다면, 프로그램은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들을 향해야 한다. 부모들이 바뀌어야 아이들이 그 변화의 영향을 받고, 부모들이 바뀌어야 성인으로서 자신의 자리에서도 변화될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그건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 부모가 되는 법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텐데 그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회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교회는 지독히도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 편인데, 목사님께서 워낙 직설적이고 비판적으로 설교를 하시는데 그게 젊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지 흐름에 맞지 않게 지난 몇 년간 2030 세대가 엄청나게 많이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러자 교회 내부에서는 청년부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몇 년간 제기되고 있다. 또 그들이 결혼적령기가 되자 이제는 미혼남녀가 교회 안에서 만날 기회라도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 최근에 한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직접 들었다.


결혼 문제로 말하자면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급할 나이다. 그런 얘기를 하신 분도 나보다 어리시니까. 하지만 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 교회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순간, 그 프로그램이 교회의 본질을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적령기라고 부르는 나이 전후의 사람들, 교회에서는 그에 한참 미치지 않는 여자분들까지 결혼은 엄청나게 중요한 목표로 여겨지는데, 결혼도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을 교회에서 운영하는 것은 매우, 매우 위험하다.


결혼 자체가 목표가 되고 그것을 넘어서는 우상이 되는 건 매우, 매우 위험하다.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결혼 자체가 목표가 되면 내 주위 모든 사람을 그 틀로 보기 시작하고, 기도도 결혼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되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어느 순간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그런 프로그램을 운영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냐고? 아니다. 하지만 결혼도 '내려놓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내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배우자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단 것을 내가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결혼할 수 있는 '확률'이 낮아지는 것은 현실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라가 90이 넘어서도 아이를 갖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만나게 하실 것을 신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단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결혼은 하고 싶다면서 주위를 스캐닝하거나 기도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태도를 바꾸고 일단 하나님께 묻고, 상황을 움직여 달라는 기도는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이나 상황을 움직이실 테니까. 그때도 분명한 건 움직이는 것보다 기도가 먼저다. 그런데 나처럼 결혼이 우상이고,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노력해야 한단 생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은 일단 멈추고 기도의 자리로 가야 한다. 내가 움직이는 건 내 욕구와 욕망 때문일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도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듣고 순종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건 주실 것이란 것이 개신교에서의 '믿음'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땅에서의 법도 마찬가지다. 어떤 법이 만들어지는지는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 그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메시아는 이 땅에서 자신들의 민족을 정치적으로 승리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 유대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라도 종교를 확장해야 한다고 믿은 십자군과 다를 바가 없다. 법은 사회현상의 결과물일 뿐이고, 기독교인은 그 법이 만들어지게 되는 사회현상과 현실에 초점을 더 맞춰야 한다.


반성경적인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법이 제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땅이 괜찮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들어서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벌하셨듯이 반성경적인 법이 제정됨으로써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도구로 여기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현상과 형식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본질에 집중하고, 그러한 본질들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면 형식은 따라오게 되어있다. 그게 이 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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