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TC

문과의 효용

by Simon de Cyrene

학부에서 정치외교학, 대학원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생각이 많고 언어로 풀어내는 걸 좋아하지만, 수학은 아주 간단한 것도 잘하지 못한다. 다른 과목은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수학은 학원 원장님께 과외를 받다시피 맨투맨이 붙고 나서야 비로소 뒤처지지 않을 수준을 가까스로 맞췄을 정도.


학부시절에도 인문사회과학에 통계를 사용하는 흐름은 있었다. 이제는 통계를 사용하지 않는 학문이 거의 없는 느낌이다. 이 와중에 운이 좋게도 통계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전공을 박사로 했다. 법학이 그렇다. 이론 학문인 법학은 최소한 아직까진 통계를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법학을 전공하고, 글 관련 일로 생계를 해결하고 있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그래서일까? 문과는 쓸모가 없고, 취업이 안되어서 외면을 당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나는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해 본다. 문과에서 그나마 법학은 아직은 유용하다며 문과 전공생들은 다 로스쿨로 몰린다니...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닌가 싶다가도 법학에서도 나는 완전히 현실에 밀착한 전공을 한 게 아니고, 학문으로서 법학을 하기에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전공자와 문과 중간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이 더 안타깝다.


문과를 전공한 것이 '직접' 자본주의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그나마 글, 콘텐츠, 반짝이는 아이디어, 새로운 관점으로 문과생들도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AI가 적당히 만들면 되고 광고와 마케팅도 통계를 기반으로 돌아간다. 결국 또 수학이다. 효율과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핏 보면 문과생들이 발을 디딜 곳이 없어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과의 가치를 믿는다. 공학적인 기술과 숫자를 기반으로 한 통계가 자본주의 사회의 기둥인 것은 분명하다. 만약 돈이 전부라면, 산업혁명 초기와 같이 자유로운 시장만 만들면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이라면 문과는 그 쓸모도,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는 물론 지금도 기술과 돈 만으로 세상에 나아지진 않는단 걸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이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체제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그러한 시스템을 그대로 방치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시스템은 길면 수십 년까지도 지속가능하지만 세대를 넘어서까지 이어질 수는 없다. 방향성 없는 자유와 사람에 대한 고려가 없는 기술은 시장을 종말 시킬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인류는 공멸하고 말 것이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는 이념과 가치 전쟁을 현실에서 실험하고 대결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실질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가 확정된 지 50년이 되고, 기술의 수준이 어마어마 발전한 지금, 인류는 가치와 이념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정치, 사회, 경제 모두 방향성 없이, 마치 키가 고장 난 선박처럼 좌충우돌하며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증식, 말초적인 자극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현상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문과는, 정확히 말하면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기초로 한 이념과 가치는 자본과 기술의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 자본과 기술이 파이를 키우는 기능과 역할을 한다면, 문과로 분류되는 전공들은 그 파이를 어떻게 분배하고 활용해야 인류가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단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 국가에서 돈, 권력, 명예, 도파민만 남은 듯한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다운 사회와 지속가능한 방향성을 잡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비웃듯이 말하는 '문과'가 제공할 수 있는 방향키일 것이다. 그게 문과의 효용이고, 가치다.


나는 오늘도 그 믿음을 가지고 깨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바위에 계란을 던진다.

언젠가 흠집이라도 나겠지.